162화. 화르르르르.
색관조는 추적에 성공.
여우와 너구리는 천공단과 합류해 신형을 질주했다.
나아가는 길에,
“형아, 그 가면 너무 멋져 보여. 특히 ‘여우임’이라고 적힌 게 난 제일 멋져. 혹시 가면 남는 거 없어?”
소천개가 부러움 가득 물었다.
여우는 가면 안에서 웃기만 했다.
어떻게 된 게 ‘형아’라는 호칭은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이다.
이젠 거울을 봐도 그런가 보다 하고 안 놀라는데, ‘형아’에는 흠칫하게 되고 만다.
“그래, 두목! 우리도 가면 하나씩 쓰자. 난 쥐새끼 할래.”
“두목, 저는 고양이.”
“저는 토끼요.”
은앙개의 말에 남궁연과 언교운이 따라서 주문을 넣었다.
뒤이어 주문이 쏟아졌다.
노루에 곰에 호랑이에 늑대, 거북이까지 골고루 많이도 나왔다. 낙지와 고등어에서는 다들 터져나가 깔깔대며 웃어댔는데, 후공도 그만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그 한편에선,
- 주군, 지금 유령곡 놈들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호열자가 전음을 보냈다.
얼마 전 객잔에서 여우의 손속에 기절한 이후 천공단과 함께하고 있던 터. 얼굴은 물론 추남이었다.
- 후후.
너구리 가면 속에서 성숙노괴가 웃었다.
무슨 뜻인지 왜 모르겠는가.
호열자의 말인즉 천공단 이놈들 왜 이렇게 태평하냐는, 긴장감 어디 갔냐는 말인 것이다.
공감된다.
하지만 성숙노괴는 천공단에게도 공감했다.
천공단이 별종들인 건 맞지만, 최근 천공단주와 함께 다녀보니 단주는 더 별종인 것이다. 태평하고 긴장감 없기로는 천공단주가 월등했다. 따를 자 없다. 윗물이 그런 식이면 아랫물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 주군, 천공단 놈들 주구장창 떠드는 말이 뭔 줄 아십니까?
- 뭐냐?
- 오늘은 뭘 먹느냐입니다. 그걸로 하루 종일 싸웁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걸로 토라지고 살벌해지기도 하고 제정신이 아닙니다. 지금 가면 이야기는 그래도 낫네요.
- 후후, 미친놈들 같으니.
답은 그리했지만 성숙노괴는 안다.
면모를 보았다.
그날 만연봉의 밤.
아우를 보내는 길에 조용히 다가와 술을 건네주고 간 이들이 천공단이었다.
자리를 비켜주어 보진 못했지만 그들 모두가, 곁에 있어 주었던 천공단주와 함께 있는 듯했다. 위로가 되었다.
- 단주부터가 미친 자가 아니냐.
문제라면 이 별종들의 미친 짓이 점점 마음에 든다는 점이다만.
뒷말은 마음으로만 말했다.
- 그렇긴 합니다. 대공자가 화공신타였다니요. 제가 말씀드렸죠? 제 모가지 돌려놓은 것요.
- 난 죽어봤다만.
- 아…… 그러셨죠.
신형을 날리며 호열자가 머리를 긁적였기에, 너구리인 채로 성숙노괴는 껄껄 웃고 말았다.
그러다 너구리는 여우 쪽으로 위치를 옮겨 전음을 발했다.
- 대공자.
- 너구리님 오셨습니까.
- 어…… 여우님.
- 말씀하십시오.
- 다름이 아니라, 섭혼에 대해서는 대비책이 있나?
- 대비책이라니요?
여우가 뚱했기에 너구리도 뚱해졌다.
- 응?
- 노조께서 다 해치우는 것 아니었습니까?
- 내가?
- 네.
- 그런 거였어?
- 여태 딱히 한 일도 없잖습니까.
- …….
- 왜 멀어집니까. 어디 가세요. 노조? 노조오오오?
너구리는 다시 호열자 곁으로 가버렸다.
책임감만 무거워진 채다.
여우 가면 속 후공은 피식 웃었다.
‘대비책이라…….’
대비책이야 많다.
가장 좋은 방법을 꼽자면 속도.
섭혼은 곧 최면의 공법.
공법의 주가 되는 운용은 안법이며, 거기에 음성과 표정, 몸짓까지 더해져 깊이를 더한다.
그러니 바라보기 전에 날려버리면 그만이었다.
또 입을 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면,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로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차선책은 섭혼의 눈길을 그저 바라봄으로 무력화시킴이다.
정종의 심법이 그렇다.
바다와 같기에,
바다 속에 오염물 한 방울처럼, 사이한 술법은 정종의 깊음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그저 마주하는 순간 흩어질 뿐이다.
하지만 아직 깊지 않다면, 아직 바다가 아니라면 정종의 심법을 익혔다 해도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심연이 되지 않고는 오염된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다.
호열자에게 ‘정지’라는 말을 하여 멈춰 세운 건 은외법으로 설정해둔 점혈이 그 시점에 발동한 것뿐이지만, 섭혼의 대가는 실제로 ‘정지’를 이뤄낼 수 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만인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후공은 그런 자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유령곡의 섭릉존자(攝凌尊者).
하지만 섭릉은 이십 년 전 죽었다. 자신의 손으로 끝냈기 때문에 섭릉을 다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났다.
유령곡의 이름으로,
섭혼의 능력으로.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섭릉의 후인이 성장했음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때는 아이었는데, 그 아이가 자랐나 보다.
‘너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냐.’
후공은 알고 있었다.
고작 열 살.
지금의 소천개보다 어린 나이의 여자아이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들 중 하나.
잊혀지지 않는 얼굴들 중 하나.
- 가지 마.
여자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가로막았다.
울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만 쏟아내며 소리쳤다.
-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여이령.
주근깨가 많은 소녀.
울지 않고 있다면 귀여울 얼굴.
다른 인연으로 만났다면 눈물을 닦아주었을, 위로의 말을 던져주었을 아이.
아버지의 이름은 여운추.
아버지의 별호는 섭릉존자.
- 이대로 가면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가지 마!
죽이라고 했다.
뜻대로 살지 않을 것 뻔하지 않느냐고.
언젠가는 죽이러 찾아갈 것 알지 않냐고.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이 왔다.
주근깨가 많은 소녀.
귀여운 소녀.
넌 너의 길을,
난 나의 길을 갈 뿐.
후회는 없다.
다시 돌아간다해도 마찬가지.
“두목, 이제 일식경이면 도착입니다.”
남궁연이 때를 알려왔다.
*별실 안.
한 여자와 두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술상이 놓인 가운데, 여인이 전음을 발했다.
- 이제 화공신타가 중요해졌어요. 하지만 그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난감하군요.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려 여인의 외모는 볼 수 없었다.
- 동감이오, 귀화(鬼火). 그대의 능력으로도 알아내지 못한 자가 있을 줄은 몰랐소.
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색이 특이했다. 반은 검고 반은 붉었는데, 검붉음이 섞여 있었다.
다른 노인이 뒤를 이었다.
- 하지만 찾아낼 수 있을 거요. 화공신타는 소란스러운 자이니.
- 허허, 그건 그렇소.
- 호호, 멸천존자 그대의 말을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는군요.
화공신타의 소란스러움은 확실하다.
단 한 번의 등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강호에 과시했다.
최근 회자되던 인물은 천화서고 대공자였는데, 그조차 화공신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철선인은…….
여인이 전음을 발하다 멈췄다.
두 노인도 미간을 찡그렸다. 세 사람의 시선은 문 쪽으로 향했다. 별실 바깥 복도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것이다.
이내 고함이 터져나오더니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쾅!
나타난 건 중년 사내였다.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사내는 손에 칼을 쥐고 쏘아보며 둘러보다가 면사 여인 쪽에서 시선이 멈췄다.
“너!”
“저 말인가요?”
여인이 갸웃해 보였다. 음성은 젊어 보였고, 또 차분했다.
“그래, 면사를 걷어봐!”
“왜 그래야하죠?”
“하하하! 고년 제법 성깔이 있구나.”
중년 사내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칼로 여인의 목을 겨누었다.
“이유? 내가 말했으니까.”
“저는 누구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당신은 없어요.”
“널 죽이고 확인할까?”
“당신은 예의가 없군요. 좋아요. 원한다면.”
여인이 면사를 걷었다.
여인과 중년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쩌어엉!
중년 사내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내가 당신이 찾는 사람인가요?”
“아니.”
여인이 손짓했다.
“가까이 와 봐요. 할 말이 있어요.”
중년 사내가 칼을 칼집에 넣은 뒤 여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여인이 사내의 귀에 속삭였다.
사내의 얼굴이 점차 변했다. 표정이 돌아왔다. 밝아졌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일으켰다.
바로 포권을 취했다.
“본인이 크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구광이 용서를 구하외다.”
“괜찮아요.”
“그럼.”
중년 사내는 방을 빠져나간 다음, 호들갑스럽게 달려온 주루의 주인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쿠야, 손님들! 죄송합니다. 저도 얼굴만 겨우 아는 사람인데, 지금 자기 부인을 찾겠다고 들쑤시고 다니지 뭐겠습니까. 예전에 표국쪽 일도 해서 제법 칼솜씨가 있어 무서워서 제대로 만류도 못 했습니다. 제가 사과의 의미로 술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호호, 그럴 수 있나요. 아무 일 없었으니 되었어요.”
“아이쿠야, 마음이 바다십니다요. 그럼 대신 고급 술을 갖다 바치겠습니다. 당연히 값은 무료입니다.”
뜻하지 않은 소란은 정리되었다.
여인이 아까하려다 멈춘 말을 꺼냈다.
- 철선인은 죽었을 테죠. 그의 충직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 그대 말이 맞소. 그는 시간을 어기는 자가 아니니.
- 그래요. 전서매가 날아올 시간을 훨씬 넘겼죠.
전서매는 하루 한차례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에서 두 시진(약 4시간)이 지났음에도 전서매의 소식은 없어, 결국 그들은 임시 거처를 새롭게 찾아야 했다.
문제는 철선인의 성실함이다.
그렇기에 철선인의 죽음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 상황은 셋 중 하나. 첫째는 철선인과 선우진의 동귀어진, 둘째는 천금서고의 배신, 셋째는 제삼자의 개입이죠.
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중 제삼자의 개입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둘째도 가능성은 적다.
천금서고는 유령곡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
음양노괴를 잃은 천금서고가 아닌가. 배신의 대가가 크다는 걸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을 터.
그럼 남은 건 첫 번째였다.
하지만 첫 번째도 가능성은 낮다. 두 번째 이유와 겹치고, 철선인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론은 공청석유는 ‘모르게 되었다’였다.
그럼에도 귀화가 이 뻔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하나.
강조하고 있음이다.
귀화의 전음이 다시 흘렀다.
- 하지만 상황은 의미 없죠. 반드시 화공신타를 찾아야 해요.
수많은 이들이 성숙노괴가 죽어가는 건 지켜봤다. 하지만 성숙노괴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청석유에 대한 실마리는 화공신타가 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성숙노괴의 숨이 한줌이라도 붙어 있다면 굳이 배를 가를 이유는 없는 것이다.
-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성대한 행사도 차질이 없어야겠죠.
- 허허, 물론이오.
- 귀화, 후공을 향한 복수는 성대할 것이오.
멸천존자와 취생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루를 떠난 중년 사내, 구광.
그는 더 이상 아내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할 일이 생겼다.
머뭇거리지 않고 상가에서 기름을 한 통 샀다.
집으로 돌아와 화섭자를 찾았다.
“흐으으응~~ 흐으응~~~.”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 안에서 머리 위로 기름을 부었다. 금세 발밑까지 기름으로 흥건해졌다.
이어 화섭자.
치익, 소리와 함께 불길을 낸 후 몸에 붙였다.
화르르 온 몸이 타올랐다.
불길 속에 구광은 껄껄 웃었다.
“어~~ 시원하다. 어어어~~ 시원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연신 소리냈다.
그의 얼굴도 나른함에 젖어갔다.
머리가 타고, 피부가 익어가고, 집이 타들어갔다.
그 가운데 구광은 그녀를 떠올렸다.
주루의 별실에서 보았던,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면사를 걷은 순간 세상이 멈췄다.
그녀는 하늘의 선녀와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 …… 시원할 것 같지 않아?
‘그녀 말대로야. 어떻게 이렇게 시원할 수 있지.’
매혹적인 목소리.
주근깨조차 귀여워.
그 때문에 더 아름다워.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화르르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