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핵심인물은 셋.
섬서 남동.
안효현 외곽.
적의 거처를 거의 눈앞에 두고 멈췄다.
동태 파악을 위해 색관조가 먼저 날아갔다가 돌아왔다.
[주인님, 어떡해요. 아무도 없어요. 텅텅 비었어요.]
그런가.
우연일 수는 없다.
문제가 발생했음을 상대가 인지했다는 뜻이다.
보고를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이쪽의 대응이 신속했고, 또한 철선인과 선우진의 죽음을 보거나 들은 자는 없다.
도리어 보고가 없어서 인지했다고 봐야 한다.
전서매가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아서일지도.
‘꽤나 예민하게 구는군.’
입꼬리를 올리며 후공은 낮게 말했다.
“천공단.”
천공단의 시선이 모였다.
명을 내렸다.
“탐문.”
천공단도 색관조의 말을 이미 들었다.
천공단의 신형이 분분히 솟구쳐 흩어졌다.
후공은 너구리와 호열자와 함께 적의 거처로 향했다.
광운장.
장원의 입구에 커다랗게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
담을 넘어 뜨락에 내려섰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적막함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한낮의 절정에 걸맞지 않는 고요함이어서 꿈속인 듯 현실감이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천향삼주를 운용, 허공을 타점했다.
운용 심결은 향의 취합.
타점한 순간 그 지점에서 폭죽이 터졌다. 폭죽이 터지듯 백여 개의 천향의 선이 사방으로 길게 뻗어나갔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지만 후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천향의 선은 장원의 지붕에 닿고, 땅에 닿고, 각 처소에 닿았다. 닿고 또 부딪혀 굴절하면서 곳곳을 훑어내듯 선들이 저택을 샅샅이 훑어갔다.
닿고 지나면서 향은 채향되고, 닿고 지나는 와중에 천향의 주인은 향의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나무향, 잎사귀, 저택의 재질에 따른 각각의 향.
그리고,
흙 내음, 부패해 가는 시체, 혈향, 각각 냄새가 다른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의 체취. 동물 특유의 냄새, 학이겠지. 그 외 미약하고 이젠 옅어져가는 여러 향.
볼 수는 없지만 보인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하다.
머문 향의 동선과 중첩을 통해 보았다.
유령곡의 인원은 스무 명 가량.
광운장은 점령 당했다.
가솔들은 모두 죽었다. 그것도 대부분이 초기에 당했다. 그들의 사체는 좌측 담 벽 쪽에 묻혀 있다.
몇 명은 살려두었다. 가주, 그리고 주로 시녀나 하인들 쪽이다. 음식을 조리하고 잡일을 하는 동선.
그들 한 명 한 명은 기쁘게 일했을 것이다.
섭혼이 그렇다.
심지어 기쁘게 죽으라는 암시가 걸리면 웃으면서 죽는다. 고통 따위 느끼지도 못한다. 그저 그 행위가 기쁠 뿐.
“대공자, 멀뚱하니 서서 뭐하고 있나?”
장원을 샅샅이 훑고 돌아온 너구리가 손을 내밀었다.
학의 깃털이었다.
“이것 보게.”
“노조, 빠르게 찾아내셨군요. 너구리가 되셔서 그런가 봅니다.”
“흥! 내가 빠른 게 아니라 자네가 느린 거네. 원래 여우는 날래다는데, 멍 때리고 있는 자네 모습을 보니 여우가 아니라 곰 같군.”
후공은 손가락으로 뺨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가면의 뺨 부위에 있는 ‘여우임’이라는 글자였다.
“흥!”
다시 콧방귀를 뀌는 성숙노괴에게서 깃털을 받아들었다.
천향삼주로 깃털의 진향을 흡수했다.
천향은 인지했다.
“이 가문은 유령곡이 위장해둔 거처였나 보군.”
위장이 아니다. 평범한 이들이었고, 다 죽었다.
진실은 달랐지만 후공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을 살펴보죠.”
“그러세.”
장주의 방, 그리고 집무실, 여인의 처소 등을 살폈다.
여인의 처소에서는 장주의 딸로 추정되는 향 외에 새로운 인물의 체취를 감지했다.
집무실에서의 향도 오래된 것과 새것들이 있었다. 그중 새로운 향에는 각각 다른 세 사람의 향취가 남아 있었다.
핵심인물은 셋이다.
그중 하나가 여인의 처소에 있던 새로운 향과 동일하다.
여인의 방을 썼다는 점에서, 셋 중 한 명은 여자.
생각해 보자.
철선인이 말했던 인물은 멸천존자.
이놈이 학을 타는 놈일까.
아니면,
후공은 집무실을 자령안으로 훑었다.
천장과 벽, 책장과 의자, 그리고 바닥, 바닥의 머리카락.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집어들었다.
특이하게도 검고 붉음이 섞여 있었다.
머리카락 색이 검붉은 놈이다.
이곳은 장주의 집무실.
일반인들이 검붉게 염색을 하고 다니진 않는다.
그러므로 유령곡의 인물이다.
그리고,
‘검붉음이라……. 쉽지 않군.’
모발의 향을 채향했다.
이놈이 학을 타는 놈일까?
오랫동안 학과 함께했다면 학의 냄새는 몸에 밴다.
씻어낸다고 향은 씻겨나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학의 냄새는 없다.
그럼 ‘멸천존자’란 놈이 학을 타는 놈이겠다.
얼굴은 보았다.
북교산 용두봉에서 화공신타로서 성숙노괴를 죽일 때 놈을 보았고, 놈도 이쪽을 보았다.
두 번째 인물은 검붉은 머리카락.
별호를 모르니 임시로 ‘적흑’이라 이름 붙였다.
세 번째 인물은 장주 딸의 방을 사용한 여인.
어쩔 수 없이 여이령이 떠오른다.
섭혼의 대가.
섭릉존자의 딸.
아닐 수도 있지만, 여인은 여이령으로 이름 붙이자.
그렇게 핵심 인물은,
멸천존자, 적흑, 그리고 여이령.
먼저 찾는다면 빠르게 끝낼 수 있다.
“그건 뭔가?”
성숙노괴가 물어왔다.
“놈들 중 머리카락 색이 특이한 놈이 있나 봅니다.”
“흐음, 특이한 마공을 익힌 놈들 중에 신체의 특질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네. 그 영향으로 보이는군.”
알고 있다.
그 영향에 따라 백발이 되기도, 은발이 되기도 한다.
이놈은 검붉음이다.
굳이 머리색을 물들이고 다니는 강호인은 드물다. 간혹 있지만 멋을 부리는 자들은 보잘것없다.
“흠, 이 특질은 무엇인지 모르겠군.”
“흡성의 계열로 보이는군요.”
“응?”
성숙노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흡성이라니?”
흡성이라면 상대의 내력을 흡수함을 의미한다.
선우진은 흡음, 여인의 음기를 취해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반면 흡성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내력을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내력을 지닌 자라면 그 내공을 모두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흡성대법을 펼치는 자라고?”
섭혼에 이어 흡성대법이라면, 대응함에 있어 이보다 난해할 수 없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떠올려봐도 당장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성숙노괴였다.
하지만 그보다 당장은 의아함이 컸다.
툭 던지듯 태연히 말해서인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것인가? 근거는?
그렇게 물었다.
여우가면 속에서 후공은 코를 찡긋했다.
이미 경험해 봤다고, 마주해 보았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책에서.”
“뭐야?”
성숙노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책이 많습니다. 천화서고에.”
“그런 게 막 적혀 있다고? 그럼 자네 무공도?”
“책에서.”
“독학이야?”
후공은 웃음을 참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뭐…….”
“재수없구만.”
“평소 책을 많이 보셔야 합…….”
“됐네. 천재놈들 짜증 나는구만. 나도 어릴 땐 신동 소리 듣고 자랐는데, 어떻게 된 게 주변이 죄다 빛나는 천재들인지.”
그랬을 것이다.
아우가 귀곡자다.
또한 성숙노괴가 뛰어난 자가 아니라면 이런 경지에 오를 수도 없다. 엄청난 재능이다.
하지만 최근에 만난 이들이 천금서고의 선우진이고, 제갈세가의 제갈혜이며, 또 천화서고의 천재다.
이쯤이면 스스로 자신이 평범하다 싶어져버린다.
천공단이 돌아온 기척이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 탐문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형님, 이곳이 확실합니다. 밤에 학을 봤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외 특이한 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가주며 몇몇 일꾼이나 시녀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도리어 왜 묻냐는 식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다들 온화하여, 여태 별다른 사건 사고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유령곡에 속한 가문인 듯합니다. 이틀 전만 해도 가주를 보았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항마삼협의 보고. 다른 이들도 대동소이하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에 특별할 건 없었다.
이미 알아낸 바를 채웠을 뿐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음을 꾸며내기 위해 가주는 마지막까지는 살려두었나 보다 하는 정도다.
가주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라는 지시를 받았을 테니까.
그리하여 섭혼 속에서 그는 불평 없이, 진심으로, 기쁘게 지냈을 것이다.
이쯤 되니 후공은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굳이 보여주어야 하나 싶었으나, 아무래도 섭혼의 무서움을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말만으로도 천공단은 모두 믿을 테지만 강렬한 느낌은 받지 못할 것이다.
직접 두 눈으로 보면 경각심도 높아질 터.
이 장원이 어떻게 장악된 건지, 보면 깨달을 것이다.
“남궁 형, 언 형, 그리고 낭인왕.”
“네, 두목.”
“네, 형님.”
“저쪽의 담장 밑을 파 보십시오.”
“네.”
세 사람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파라면 판다.
아무것도 안 나와서 헛수고여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천공단이다.
이윽고,
“으헉!”
“뭐, 뭐야!”
“다, 다 죽었어. 그럼 이건…….”
파내던 이나, 뭐가 나오나 지켜보던 이들이나 모두 경악했다. 시체는 거의 오십여 구가 넘었다. 포개지고 쌓여 엉킨 광경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후공이 천공단을 모자란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틀림없지만, 실제로 모자란 건 아니다.
보는 순간, 알았다.
한 가문의 몰살.
그 와중에도 위쪽에 있는 시체의 부패 정도는 다르다.
아직 생생하다.
따로 물어보지 않더라도 태연히 평소처럼 행동했다는 가주와 시녀들임을 알 수 있다. 가문의 대부분이 죽은 상황에서, 가주가 이틀 전까지 산보를 다녔단다.
‘섭혼의 힘이야.’
섭혼의 무서움이 땅속에서 드러났기에, 경각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유령곡은 이 거처를 버리고 옮겼다.
그럼 이제 새로운 거처라는 곳에서도 이곳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천공단과 너구리 등이 경악 속에 빠져 있는 사이,
후공은 색관조를 불렀다.
“네가 수고해 주어야겠다.”
[주인님, 수고요?]
색관조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 일 시키는 것이냐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만했지만, 후공이 오해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님, 그때 보셨잖아요. 공청석유 흡수한 후로는 힘이 넘쳐나요. 막 주체가 안 돼요.]
“그래, 그럼 싸돌아다니다 와라.”
[까르르르르. 엄청나게 돌아다녀버릴 거예요.]
“이 두 개의 향을 기억해라. 이것은 학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 같이 있을 수도 있고,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둘 다 무서운 자들이니 최대한 경계해라.”
여인의 체취는 옅다. 모발도 찾지 못했다.
상관없다. 멸천과 적흑 둘 중 하나를 찾는다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돌아올 곳은 안강.
천공단의 거점으로 마련해 둔 저택으로 돌아오라 말했다.
[까르르르. 반드시 찾아내겠어요.]
“하하, 그럴 테지.”
색관조가 날아올랐다.
부록처럼 금섬의 ‘그윽’ 소리도 멀어져 갔다.
찾아낼 것이다. 또 찾아야 한다.
그리고 섬멸해주마.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한 건가?”
“깜짝이야.”
너구리가 뚱하니 바라봤다.
“안 놀랐잖나.”
“놀랐습니다만.”
“흥! 자넨 어디까지 알아낸 건가?”
“가면서 이야기하죠.”
“어디로 가는데?”
“천공단 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