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64화 (164/460)

164화. 능오침.

섬서 안강.

천공단 본단.

그 저녁.

단주로부터 설명을 들은 천공단은 안색이 무거워졌다.

유령곡의 핵심 인물은 셋.

셋에 불과하지만 고작이라고 말할 순 없다.

한 명 한 명이 십만대군이요 백만대군이다.

강호의 싸움은 머리 숫자가 의미 없다. 고절한 경지에 오른 인물 한 명이 문파 전부를 쓸어버릴 수도 있다.

“섭혼도 무섭고, 흡성대법도 너무 무서워. 마공은 그냥 다 무서운 것 같아. 냠냠냠.”

소천개가 부르르 떨면서도 소고기를 열심히 입에 처넣었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구워져 가는 중.

사안이 심각했기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기를 구워먹고 있던 중이다. 심각하단 이유로 고기 양이 많았다.

적응이 진즉 끝난 남궁연도 질세라 고기를 처넣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학 타고 다니는 놈은 또 무슨 재주를 부리는 놈이려나.”

미지에는 더 큰 두려움이 따라온다. 학까지 타고 다니니 더 그랬다.

“근데 남궁 형아.”

“어.”

“학 먹어 봤어?”

“아니.”

“학은 무슨 맛일까?”

“그깟 것, 큰 닭이겠지.”

“그런가. 이번에 일 끝나면 우리 학 잡아먹어.”

“좋네.”

“형님, 생포해서 천공단의 탈것으로 두고 한 번씩 타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고기 굽기 담당인 언교운이 대화에 참전했다.

바로 무산쌍웅과 항마삼협이 동조하고 나섰다.

“와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타고 다니면 끝장나겠는걸!”

“학에서 내리면 사람들 다 쳐다보고 시선 장난 아니겠구만. 처자들은 한 번만 태워달라고 줄을 서고 난리가 날 테지.”

“처자, 꽉 잡으라고! 속도가 장난 아니니까!”

“어머! 너무 무서워요~~~.”

“그때 슬쩍 안아주는 거야?”

너스레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천산의 설영조차 대체 뭔 소리를 하냐며 크큭거렸다.

“…….”

그 자리에서 호열자만 뚱해졌다.

아무리 보아도 천공단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이놈들 분명 방금까지 심각했는데, 어떻게 된 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학을 잡아먹고, 타고 다니고 있었다.

- 주군, 이것들이 이렇습니다.

- 흐음…… 그러고 보니 여태 학 고기를 안 먹어 봤네. 넌 먹어 봤냐?

- 네?

주군까지 왜 그러냐며 호열자가 바라보는 사이, 천공단의 대화는 이십 년 전 유령곡의 쇠락으로 흘러갔다.

금적자가 ‘내가 그때 말씀이야’로 시작해 떠들어대고, 누군가는 그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하고, 누구는 기어다니며 걷지도 못했을 때라면서 으스댔다. 그게 왜 으스댈 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에,

“근데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요.”

설영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시 무림맹주, 그러니까 후공이 유령곡을 남김없이 모두 멸절시켰다면 지금의 상황도 없었을 텐데, 왜 후공은 다 끝내지 않았던 걸까요?”

왜 여지를 남겨두었냐?

천공단은 뭔 소리를 하나 싶어 바라봤다가 관심을 거뒀다. 몇몇은 웃었고, 몇은 콧방귀를 뀌었다.

반응이 뜻밖이라 설영이 당황했다.

“왜…… 왜들 그래요?”

되묻는 말에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고기만 처먹어댔다. 그래도 친절한 사람은 꼭 있다.

“설 형.”

은앙개였다.

“어……?”

“천산의 후인은 왜 예쁘기만 해? 생각은 왜 안 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봐. 그럼 알 수 있을 거야.”

“으음……, 흐음…….”

설영이 예쁜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이내 떠올려보는지 눈동자를 위로 올리고는 이리저리 굴렸다.

호열자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이 말을 해줄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내가 뭐라고.’

천공단이 모두 입을 닫고 있다. 거기다 천공단주이자 동시에 호수에 비춘 모습도 멋진 화공신타도 내내 조용할 뿐이다. 곁에서 고기 굽는 담당인 언교운에게 고기 왜 이렇게 잘 굽냐며 한 번씩 칭찬만 하고 있으니 어쭙잖게 나설 수 없었다. 목 돌아가버려.

하긴, 천공단이 맞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답이다. 무엇보다 말로 들어서 아는 것보단 스스로 답을 찾는 것이 옳을지도.

씨를 말려야하지 않냐고?

그건 불가능해.

도망친 놈들도 있고, 아이들도 있다.

현실은 머릿속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건 마주해본 경험이 있다면 알게 되는 일이다. 또 조금만 오래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어.’

그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

그 밤, 후공은 저택을 천천히 거닐었다.

걸음 속에서 여이령을 떠올렸다.

- 가지 마!

두 팔을 벌리며 가로막는 여자아이. 주근깨가 많은 소녀. 고작 열 살. 울지 않고 있다면 귀여울 얼굴. 악에 받쳐 소리치는 모습.

- 이대로 가면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가지 마!

눈앞의 여이령.

그 곁, 그 너머로 보인다.

혼자가 아니다. 많다. 여이령 곁으로 또 다른 아이가, 그 뒤쪽, 그 뒤쪽에도 서른 명 가량의 아이들이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모두 유령곡 수뇌부의 자녀들.

다섯 살, 일곱 살, 네 살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얼굴들.

잊혀지지 않는 얼굴들.

그렇게 그들을 한 명씩 둘러보고, 다시 여이령을 보며 후공은 입을 열었다.

.....- 너희는 잘못이 없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잊을 수 없는 얼굴.

검은 면사 안쪽,

주근깨가 많은 소녀는 서른 살의 여인이 되어 달을 바라봤다. 후공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후공을 떠올렸다.

비록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 하나, 그녀의 마음에 후공은 아직 살아있다. 그때 그 모습은 떠올릴 때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후공은 떠 있었다. 지면에서 세 뼘 정도 떠오른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히 신선의 풍모. 은은한 자줏빛 안광 속에 그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천천히 너풀거린다.

밤하늘에는 세 줄기 빛이 유영한다. 한순간 찢어내듯 기이한 소리를 내며 휘젓고 다니다가 후공을 향해 날아들었다. 빛줄기는 후공의 검이었다. 처처척! 연속적으로 검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들려왔다.

- 너희는 잘못이 없다.

자상한 목소리.

- 유령곡에 의해 죽어간 이가 수천 명. 하지만 너희가 한 일이 아니다. 너희가 용서를 구할 이유는 없다.

다른 인연으로 만났다면 반가웠을 사람, 그랬으면 좋았을 어른.

-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라.

후공의 목소리가 생생해.

여이령은 웃었다.

‘하지만 후공……. 난 이 길을 택했어. 지켜봐 줘. 내가 어떻게 하는지.’

*섬서성 남서.

사마세가.

“그대들은 누구인가?”

여이령과 취생존자는 문 앞에서 가로막혔다.

여이령이 미소를 머금었다.

“사마가주를 만나러 왔어요.”

“가주님을?”

검수가 갸웃하며 미간을 좁히며 노려봤다.

바라보는 눈이 마주쳤다. 순간, 여이령의 검은 눈동자 테두리로 피처럼 붉은 선이 휘돌았다. 쩌어엉!

“부탁드려요.”

검수의 표정은 부드럽게 변했다.

바로 예를 갖췄다.

“물론입니다.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안내를 받아 세가로 들어섰다.

나아가며 세가의 여러 사람들과 마주쳤다. 이령은 그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모두가 깊게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답례했다.

똑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그 모습은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이기에 이처럼 환대를 받는단 말인가. 여러 검수들과 총관, 장로들이 궁금히 여기며 다가왔다.

그렇게 다가왔다가 같아졌다.

누구 할 것 없다. 머리를 조아리며 그녀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시녀들과 일꾼들도 흘깃거렸다가 눈이 마주치면서는 환하게 웃었다. 우릴 찾아주셨어. 날 바라봐주셨어.

“하하하하하!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하리다.”

장로 중 하나가 앞장섰다.

모두가 부러운 듯 장로 사마연을 바라보다가 제각기 자신의 위치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윽고 여이령과 취생존자는 사마가주를 비롯한 일곱 장로와 둘러앉았다.

사마가주와 일곱 장로의 표정은 세상 밝다.

말은 없다. 그저 모두가 여이령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싱글벙글거릴 뿐이었다.

이령이 흡족히 여기며 입을 열었다.

“사마가주.”

“네.”

“천룡대전에서 사마세가가 치욕을 겪었다던데,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

“사황천의 잔재가 함정을 팠습니다. 정녕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이어졌더군요. 그 시작은…….”

역용자의 등장부터 그 내막이 서서히 밝혀지던 상황, 서문세가의 안주인이었던 엄부인이 사황천의 혈주요희였음과 풍열이라 불리는 곤충의 위력,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 전대 사마가주가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 등이 설명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빛났다.

처음부터 끝까지다.

마치 별처럼.

‘천화서고 대공자.’

그가 찾아냈고, 추적했으며, 풍열을 무력화했다.

모두를 구했다. 그가 없었다면 여기 앉은 장로들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라……. 흥미로운 자로군요.”

이령으로서도 흥미로운 자가 아닐 수 없다. 여태 대강의 사정만 들었다. 그래서 신성 중 하나겠거니 했는데, 자세한 상황을 듣고 나니 천화서고의 천재는 도리어 화공신타보다 더 놀라운 자였다.

“귀화, 그자를 수하로 거둔다면 큰 힘이 될 듯하오. 그는 천재이기도 하지 않소이까.”

당연히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취생존자가 욕심을 보였다.

“맞아요. 그는 탐나는 사람이에요.”

이령은 시선을 사마가주에게로 돌렸다.

“가주, 사마세가의 정예는 몇이나 되나요?”

“이백여 명입니다.”

“추리고 추려서?”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는군요.”

“본 세가가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구입니까?”

정예를 물었다는 건 의도가 뻔하다. 사마가주가 두 눈에 전의를 붙태웠다. 그건 일곱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죽인다.

“화산파예요.”

“화산파라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왜 싸워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저 승부의 향방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태도였다.

“물론이에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종남파가 도울 테니까요.”

“종남파가 말입니까?”

이령이 미소로 답하자, 사마가주와 장로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화산파는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으하하하하, 제아무리 화산파라도 종남과 본 세가가 연합한다면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외다!”

“으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사마세가는 죽음으로 화산파를 멸할 것이오!”

그 모습을 둘러보는 취생존자의 입가에 음침한 웃음이 걸렸다.

“흐흐흐흐……. 귀화, 그대는 정녕 경이로움이외다.”

“당신의 흡성대법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아니오. 나의 재주가 크다 해도 그대와는 견줄 수 없소이다.”

말뿐이 아니다.

상대는 삼십 대의 여인에 불과함에도, 검붉은 머리의 노인 취생존자의 눈빛에는 경외감이 맺혀 있었다.

이령이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곤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진정한 경외.

진정한 경이로움.

‘후공, 보았나요? 난 아버지와는 달라요. 지난 세대를 뛰어넘었어요.’

**

어두운 방 안.

좌정한 가운데 후공은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손에 빛이 맺혀간다.

정확히는 다섯 손가락이다.

손가락의 길이만큼 하얀 빛이 떠오르며 형체화되었다.

두께는 바늘 정도로 가늘다.

‘능오침.’

그것은 다섯 개의 침.

혈관을 타고 흘러 심장에 박힌다.

당장 먼 거리로 발출할 수는 없지만, 괜찮다.

능오침이 떠오른 것이면 충분하다.

그때,

스르르르릉.

방 안의 한쪽, 어둠 속에서 천천히 검을 뽑아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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