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66화 (166/460)

166화.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1)

이십 년 전이다.

모두 떠났다. 무림맹주 후공의 말대로다.

-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라.

다들 자신의 삶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여이령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남았다.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다가왔다. 주저앉아 있는데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이령은 올려다봤다.

또래의 사내아이들이었다.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맑아 여이령은 관심이 생겼다.

소년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인사나 나누자. 난 석중비.”

“…….”

여이령은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름을 되뇌었다.

‘석중비. 석중비.’

모습도 살폈다.

석중비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비웃음처럼 보이지 않고 자신감으로 보였다. 그의 목에는 화상 자국이 있었다.

석중비가 말을 이었다.

“난 열두 살.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괜찮아.”

웃을 기분이 아니었는데 그 말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어 곁의 다른 소년이 입을 열었다.

“난 소규라고 해.”

‘소규, 소규. 눈물점이 있네.’

여이령은 이름을 외우며 소년의 눈 밑으로 이어진 다섯 개의 점을 빤히 바라봤다.

소규는 시선을 보고 뭘 바라보는지 알아차렸다.

“이거? 눈물점이야.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눈물점인데,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도 알아. 행운이 따른다고 들었어.”

여이령이 대신 말을 받았다.

소규는 갸웃했다. 표정이 웃는 듯 우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네.”

틀렸다.

눈물점이 있는 사람에게 행운이 따른다는 말은 없다. 그래도 뭐 상관없겠지.

“그래서, 여이령.”

소규가 똑바로 응시했다.

여이령도 소규를 바라봤다. 여이령은 소규의 눈이 불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규가 말을 이었다.

“우리와 함께하자.”

“그래, 좋아.”

“나에겐 오라버니라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왜?”

“내가 너보다 어리니까.”

소규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어른스러움이 묻어났기에 여이령은 소규도 오라버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석중비든 소규든 누구도 오라버니라고 부를 생각은 없다. 여이령이 몸을 일으켰다.

“나의 길은 하나야.”

“알고 있어.”

석중비가 나른하게 답했다.

반면 소규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너무 비장하잖아. 그 길이란 것이 후공을 죽이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불가능해.”

“물론이야. 내가 말했잖아.”

“후회하게 될 거라고?”

석중비와 소규가 동시에 물었다. 둘은 여이령의 외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었다.

“그래, 후회하게 만들거야. 그에게 절망을 안겨줄 거야. 절망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테니. 나는 나를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어. 나를 태워 이뤄낼 거야.”

그러면서 여이령이 바라봤다.

그것이 너희는 어떠냐는 물음이었기에,

“난 벌써 타들어가고 있어.”

“오래 살 것 뭐 있나. 한순간 빛나는 것이면 괜찮은 삶이지.”

여이령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별호는 귀화(鬼火)로 할게.”

“음, 그럼 난…….”

“나는…….”

석중비와 소교가 생각하느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 모습에서 비로소 나이가 보였다. 열 살 가량의 귀여운 남자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각오는 달랐다.

세 아이는 타오르겠다고 약속했다.

생기를 태워서라도 한순간만 빛나겠노라고.

이십 년 전의 이야기다.

**

종남파의 대연무장.

천여명이 훌쩍 넘는 이들이 도열했다.

종남의 제자, 사마세가의 정예, 섬궁각의 궁수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행사는 위대할 것이고, 장엄할 것이다! 그가 살아있지 않더라도 절망을 안겨줄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절망을 선물할 것이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종남산을 휘돌았다.

그 모습을 여이령이 검은 면사 속에서 보았다. 면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너무 활짝 웃고 있었으니까.

외침은 계속 된다.

“행사는 위대할 것이고, 장엄할 것이다! 그가 살아있지 않더라도 절망을 안겨줄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그래, 위대하고 장엄할 거야.

그저 아쉬운 건 그가 보지 못한다는 것뿐.

“…… 이후 화산은 멸문에 이를 것이다! 종남은, 사마가는, 섬궁각은 화산을 쓸어버린다. 팔이 떨어져도, 다리가 잘려나가도, 기어서라도! 죽음조차 우리를 막지 못하리라!”

죽음조차.

‘멋져.’

그 말에는 더 활짝 웃게 된다.

천하에 누가 있어 이런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구대문파 중 하나인 종남파를 오직 ‘섭혼’만으로 장악했다.

또한 사마세가를, 또한 강궁을 다루는 섬궁각까지 수하로 거두었다.

‘기대돼.’

결전의 날은 참혹할 것이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모든 걸 태우는 귀화의 불꽃이 세상을 덮을 것이다!”

외침을 듣던 중 여이령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학이 날아들고 있었다.

학의 등에 타고 있는 건 멸천존자 외 두 사람. 반가운 얼굴이다. 중년 남자와 젊고 아름다운 여인.

‘되었구나. 소중한 보물이 손아귀에 들어왔어.’

준비는 끝난 셈이다.

*잠시 후,

여이령은 중년 남자만 따로 불렀다.

멸천존자와 함께 학을 타고 온 그 중년인이었다.

“수고하셨어요.”

“허허, 수고라는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고마워요.”

“귀화께서 기뻐하시니 저도 기쁠 따름입니다.”

중년 남자가 송구스러워하면서도 미소를 머금었다.

여이령도 미소지었다.

“그런데 궁금하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왜 그대는 울고 있나요?”

“하하하하하, 모르겠습니다.”

중년 남자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눈물은 그의 두 뺨에 하염없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눈물이 쉬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녀를 마주하고 있으니 그저 눈물이 흐른다.

“귀화께선 마음 쓰지 마십시오.”

“울지 말아요. 다 잘될 테니.”

“하하하, 물론입니다. 이번 행사는 완벽합니다.”

“당신은 혹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요?”

“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년 남자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 빈자리는 금세 새로운 눈물로 채워져 물들었다.

“누구인가요?”

“하하하, 이상합니다. 아기들, 얼굴이 똑같이 생긴 아기들입니다.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납니다. 하하하하, 왜인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주륵.

최근 쌍둥이를 낳은 무림맹 섬서지부장 구양수가 눈물을 쏟아냈다. 급기야 꺼억꺼억 울먹였다.

“하하하,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래요. 상관없어요. 중요한 시기란 걸 잊어선 안 돼요. 화산파에 연락하는 건 어떻게 되었나요?”

화산파는 제때 도착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이령은 구양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죽일까?’

무림맹 섬서지부장.

이제 그의 쓰임새는 다했다.

잘해주었고, 유용했다. 그여서 해낼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아기 생각에 울어서야 원.

‘죽일까? 죽으라고 할까?’

물론 자신을 마주보고 있지 않을 때면 괜찮다.

아니, 아직은 놔두자.

여이령은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아니야. 스스로 죽어야 한다면 그 장소는…….’

그들 앞이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들 앞이면 좋겠어.

제대로 미쳐버릴 테니까.

그들이 영원이 잊지 못할테니까.

*방 안.

여이령은 거울 앞에서 면사를 걷었다.

얼굴을 비추며 미소를 머금었다.

“타버렸네. 괜찮아. 그래서 더 예뻐 보여.”

거울 속 여인의 모습은 달랐다.

여이령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여인은 노파였다.

결코 삼십 세의 주근깨 많은 여인이 아니다. 그저 같은 것이라곤 주근깨가 있던 위치뿐이었다. 대신 저승꽃이라 불리기도 하는 검버섯이 얼굴 가득 피어 있었다.

“귀화, 괜찮소?”

뒤에서 멸천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이령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비춰보며 답했다.

“이럴 줄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아서 놀라워요.”

이십 년 전 어린 소녀는,

이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노파가 되었다.

종남파를 장악함에 있어 그녀는 대가를 지불했다. 하지만 괜찮다. 알고 있었으니까.

이십 년 전 귀화가 되기로 한 시점에 이미 이 모습은 예견된 일.

섭혼의 능을 발휘함은 무한이 아니다.

심력은 한계치가 있고, 그것을 넘으려면 자신의 생기를 태워야 한다.

그래도 해냈으니 됐다.

거울 속 자신의 노파가 된 모습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어릴 때 꿈꿔왔던 모습이 지금 거울 속에 있으니까, 되었다.

‘그래.’

아버지를 능가해,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간 것이니…… 되었어.

“남은 시한은?”

멸천존자가 물었다.

“길면 5년.”

답하고는 이령은 고개를 저었다.

“근데 너무 길군요. 그렇게까지 살고 싶진 않아요. 조금 더 나를 불태워야겠죠.”

멸천존자가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한순간 빛날 수 있다면 된 거지.”

“그래요. 이제 출발할 때군요.”

멸천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망을 안겨줄 시간이 되었다.

후공은 비록 지금 세상에 없지만, 볼 수는 있을지도.

원래 하늘나라라는 건 그런 거잖아.

‘후공, 당신의 강호가…… 당신의 소중한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왔어.’

취생존자는 끝내고 나면 바로 합류할 것이다.

부상당한 태을진인 따위.

늦지 않겠지. 또한,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함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이니까.

*“헉, 헉, 헉…….”

숨이 턱까지 찼다. 심장은 터져나갈 것 같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한낮의 태양이 내려쬐는 빛이 어깨에 닿는 것조차 무게가 느껴질 만큼 태을진인은 한계였다.

금두꺼비가 외상을 치료해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것이다. 문제는 머리다. 그래, 그녀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녀에게 돌아가야 해. 그녀에게 돌아가야 해.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그만큼 강렬해, 머리가 싸우고 몸이 싸운다.

그래서 천근만근이다.

아직도 의문이다.

어떻게 그녀가 종남의 안법인 태청명안이 극성에 달한 자신을 혼돈에 빠뜨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수천 년 기틀 속 자리 잡은 정종심법의 심연을 흔들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녀가 전 강호를 휘젓는다면……?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외침이 들려온다.

태을진인은 신형을 멈추고 돌아봤다.

흡성의 공능을 지닌 자.

말하는 새의 목소리에 속았지만 이내 속임수라는 걸 깨닫고 뒤쫓아온 것이리라. 어디까지 갔음인가. 꽤 늦었다.

“후우….”

태을진인은 그 자리에서 진기를 가다듬었다.

한줌의 토납에 내심을 가다듬었다.

이제 도망갈 수도, 도망칠 것도 없다.

스르릉.

검을 뽑아들었다.

“태을! 너는 꼴사납게 어디까지 도망칠 셈이냐아아!”

목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그래, 종남제일검으로 최후를 맞자. 또한 놈과 함께 떠나자.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심하세요.

하지만 이번엔 속삭임.

‘전음?’

태을진인이 놀라 눈이 커졌다.

전음에 실린 음성은 부드럽고 편안했다.

동시에 어깨가 짚혔다.

‘누, 누구?’

전음을 발한 자?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가.

돌아보기도 전에 흐릿한 신형 하나가 앞으로 이동해 모습을 드러냈다.

“……?”

태을진인의 눈은 더 커졌다.

새를 보고, 두꺼비를 보았는데…….

나타난 건, 여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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