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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167화 (167/460)

167화.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2)

여우가면 안에서 후공은 태을을 응시했다.

‘종남제일검.’

당연하게도 후공은 태을을 잘 알고 있었다.

검에 미쳐 사는 놈이다.

대부분 종남산에 파묻혀 지낸다.

그런 태을이 어쩌다 종남을 나설 때면 그곳은 무림맹일 때가 많았다. 자신을 만나러 왔다. 이유는 두 가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깨달음을 얻은 것에 대해 묻거나, 비무를 해달라는 청이었다.

자리를 비워 만나지 못하면 돌아올 때까지 태을은 몇 날 며칠이고 기다렸다. 한 번은 두 달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고 했다. 후공은 맹으로 복귀해 그런 보고를 종종 받곤 했다.

그때마다 후공은 태을이 미친놈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을이 눈앞에 있다.

종남제일검이란 놈이 낭패하고 꼴사나운 모습이다.

그래서,

웃음이 난다.

또 그래서,

‘……다행이다.’

낭패한 모습이어서,

꼴사납고, 망가진 모습이어서,

이렇게 볼 수 있어 다행이고 좋다. 멋지다.

태을,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종남은 아직 무사하다는 뜻이겠지. 넌 도망치는 자가 아니니까. 종남이 화를 입었다면 넌 도망칠 리 만무하니까. 태을이 종남이고, 종남이 태을이니까.

섭혼에 장악된 종남의 제자들이 칼을 들고 덤벼오면 태을로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행이다.

“그대가 천화서고 대공자인가?”

태을이 물었다.

하늘 위, 떠나갔던 새가 다시 보인다. 그 등에 올라타 있는 금두꺼비까지. 그러니까 여우는 이들의 주인, 천화서고 대공자일 터.

“네.”

“감당할 수 있겠나. 상대는 흡성의 공능을 지닌 자일세.”

“내력을 빨아들이나 보군요.”

“그렇네.”

“너무 무섭군요.”

여우가 고개를 좌로 기울였다. 턱을 쓰다듬는다. 말을 잇는다.

“괜히 구하러 왔나 봅니다. 영웅 흉내 내다 죽게 생겼습니다.”

‘……아니,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태을은 멍해졌다.

이런 자였다고?

정녕 생각지도 못했다.

이 여유와 넘치는 자신감은 뭔가.

말의 어감을 모를까. 사람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모를까. 심각하다 싶을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모습. 잠깐이지만 태을은 현 상황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자인가.’

최근 천화서고 천재의 명성이 강호를 진동하고 있다는 건 들었지만 그저 후기지수 중 독보적인 존재쯤이겠거니 여겼거늘, 그런 수준이 아닌 듯하다.

새가 이미 알고 있기도 했다.

새는 상대를 유인할 때, 섭혼과 흡성을 언급하여 상대를 속였노라 했다. 새가 아는 걸 새의 주인이 모를까.

그런데도 구하러 왔다고 말한다.

천연덕스럽게 자신감을 드러낸다.

자신에게 던진 첫마디도 ‘안심하라’였다.

죽게 생겼다면서 자신의 앞에서 지켜주는 방패처럼 서 있다.

여러 의문이 한꺼번에 솟아났다. 무공 수준은? 어떻게 대처하려는 것인가? 또 섭혼과 흡성은 어떻게 이미 인지하고 있게 된 건가? 나를 알고 있는 건가? 만난 적이 없거늘. 하지만 왜인지 그런 느낌이 드는 태을이었다.

알고 있다.

많은 일이 있었을 뿐이다.

환혼, 그전의 무림맹주, 그리고 천화서고.

그리고 매번 태을이 비무를 청해도 귀찮다고 꺼지라고 했던 후공이 여우 가면을 쓰고 그 앞에 있다. 이제 안심하라고, 내가 왔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태을이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괜찮겠나?”

‘염려 마라. 가면이 많을 뿐이야.’

여우가면, 그 이전의 가면까지.

가면이 수백 개여도 후공은 그저 후공일 뿐이다.

두 개의 가면 너머, 그 안에서 후공이 말했다.

“이제 옵니다. 뒤로 멀찍이 물러나 계십시오. 여차하면 함께 도망쳐야 하니까요.”

웃기지도 않는 말을 하며 돌아섰다.

하지만 왜인가.

태을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떻게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일어났다.

우습게도 여우의 뒷모습이 든든해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 있다.’

취생존자는 감지했다.

태을은 움직임을 멈췄고, 누군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흐릿하게 대화가 들려왔다. 강호의 친구인가? 구대문파의 고수 중 하나일까? 뭐 아무려면 어떤가. 상관없다. 아무 문제 없다. 누구든, 몇이든.

‘나는…….’

눈을 찡긋했다.

눈 아래 눈물점이 꿈틀거렸다.

-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눈물점인데,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 나도 알아. 행운이 따른다고 들었어.

‘행운이 따르는 사람이니까.’

취생존자가 되었으니까.

무엇이든 어떤 기운이든 흡수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저 타올라 한순간 빛나겠다고 다짐했으니까, 그 한순간만큼은 나는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고요한 한 번의 호흡.

취생존자는 신형을 솟구쳤다.

솟구친 가운데 보았다. 오십여 장 너머 태을진인과 그 앞쪽으로 여우 한 마리가 보인다.

동시에 여우의 시선이 꽂히듯 날아든다.

여우가면에 글자가 있다. 무슨 글자인가?

보려 한 순간,

‘?’

취생존자는 미간을 좁혔다. 여우가 없어졌다. 사라져버렸다. 어디로? 그런 의문도 잠시,

‘무, 무슨?’

갑자기 여우가 보였다.

바로 눈앞.

여우의 얼굴이 닿을 듯 바로 앞에 커다랗게 나타났다.

여우임.

가면의 글자가 선명하다. 하지만 음미할 겨를 따위 없다. 깊은 심연 같은 무심한 여우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순간,

스아아악!

광휘를 두른 검이 목을 쓸어온다.

피할 겨를은 없다. 너무 빠르다. 검이 목에 닿았다.

카앙!

목에 닿는 순간, 강철에 부딪힌 듯 검령은 튕겨 나갔다. 튕기는 충격에 의해, 후공은 검령을 쥔 채 신형을 뒤집어 선회해야 했다.

‘재밌군.’

한 번의 검격이나 많은 것이 오갔다.

후공은 요결을 이해했다.

놈은 호신강기를 둘렀고, 충돌 순간 흡(吸)결을 동시에 선보였다. 찰나 속에서 검령이 달라붙을 뻔했다. 하지만 반탄해 내는 허운은 언제나 적절하다.

좋다. 어느 정도인지 보자.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후공은 다시 쏘아져갔다.

이번에는 검령에 강기를 둘렀다. 우우우웅! 투박하고 못생긴 검령이 더욱 강렬해진 광휘 속에서 울었다. 검연이 시작되었고 연결되었기에, 검령은 주인이 무엇을 하려는지 안다.

분절칠십이검식.

수천수만 번 주인이 모든 생애에 펼쳐왔던 검식을 발현한다. 분쇄한다. 천변이 만변이 되며 빛이 되고 순간을 오간다.

스아아악!

그림자가 되어 오가는 주인의 의식에 동화되어 주인의 길을 따라 원하는 대로 검령은 휘돌고 베고 파고들었다.

카앙! 카아앙! 캉!

“흐읍! 흡!”

취생존자는 짧은 신음과 함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당혹을 금할 길이 없었다. 미친 검로. 검격이 다리를 휘감고, 순간 그림자가 휘돈다 싶을 때 등이 베인다.

그 와중 쏘아낸 자신의 지풍은 모두 검면에 튕겨나가, 여우의 움직임을 결코 머뭇거리게조차 할 수 없다.

호신강기로 전신을 두름을 극대화하지 않았다면 몇 번이나 죽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검강을 두른 것도 놀라운데, 검강을 두른 채로 이 정도의 속도라니. 찔리고 베인 건 아니나, 두드려 맞은 듯 내부 진기가 몇 번이고 진탕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흡결이 통하지 않는다. 단지 빨라서인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자는…….

카아앙!

열두 번의 검격.

그 마지막 일격을 취생존자가 장력으로 마주 받아내면서 주르륵 삼 장여를 밀려났다.

여우는 그제야 검공을 멈췄다.

차분한 신색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모습.

그렇게 격돌 속 누구는 당혹하고, 누구는 평온했다.

하지만 다른 한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내 지켜본 태을이었다.

‘저 나이에 화의 극에 이르렀다고?’

대공자의 무위 수준은 화경의 끝. 그 극단에 선 자의 무위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아니 그 이상의 경지일지도 모르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

보았기에 태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곁에 있던 대공자가 사라져버릴 때부터 놀랐던 그는 현란한 검광에 취했고, 변화에 대응하는 여유로움에 빠져들었다.

가히 일방적인 공세.

대공자가 보인 자신감은 실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염려가 끝난 건 아니다.

적이 두른 호신강기는 절대적인 방어벽이고, 아직 흡성의 위력은 드러나지 않았다. 맞닿은 채로 잡히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작 후공의 생각은 달랐다.

‘형편없군.’

실망을 금치 못했다. 검공은 그저 살펴보려 했을 뿐.

축적된 내공력으로 강기를 두름은 상식을 초월하나, 응수나 대응이 대단치 않다.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이다.

흡성으로 갖춘 방대한 공력을 믿고 있다고 보기에도 연륜이 보이지 않는다. 겨우 이 정도의 활용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 연륜이 없다.

그건 실재인 듯하다.

모습이 그렇다. 언뜻 노인으로 보이나 피부에 삶의 깊이가 없다. 주름의 층은 삶의 연륜이 켜켜이 쌓인 것이 아니다. 자령안이 알려온다. 주름은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급격한 노화.

피부결, 귓불, 급격히 한순간에 타버려 원치 않게 찾아온 늙음일 뿐이다.

그럴 때가 있다. 심력을 과도하게 소모하거나, 기운이 어지러운 가운데 휘말리면 신체는 급격히 노화를 맞이한다. 극심한 정신적 충격만으로 하루아침에 백발이 되고, 피부가 생기를 잃기도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몸, 범항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그렇게 된 건가.

핵심인물은 셋.

여이령, 멸천존자, 적흑.

멸천과 눈앞의 적흑도 모두 같은 또래였던 것인가.

‘타버린 것인가.’

마공은 빠른 속성을 지녔으나 필연적으로 안정기를 거쳐야 한다. 자연의 섭리를 벗어남에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거부하고 질주한다면 자신의 생기를 내어주고, 정신마저 넘겨주어야 한다. 늙기도 하고 미쳐버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마공은 결코 빠른 길이라고 볼 수 없다.

처억.

검령을 검집에 보냈다.

우우웅! 검령이 서운한 듯 울었지만, 검무는 여기까지.

“…….”

가면 속 무심한 시선.

그 시선에 취생존자는 주춤 한걸음 물러났다.

가면 속 시선.

정종의 심법, 그 완벽한 질서가 자신을 응시한다.

시선뿐인데, 마음이 말해온다.

‘…… 도망쳐. 죽는다.’

무심함 속에 살기는 없는데 왜 죽음이 떠오르는가.

기혈조차 움츠러든다.

영혼까지 떨려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내력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자신의 내공은 혼돈 속의 힘. 한데 여우가 질서를 강요한다.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인데 마음의 혼란을 붙잡으려 한다.

도대체 이자는 누군가?

이미 검격 속에 많은 것을 증명한 자.

통하지 않아.

흡성대법의 흡결이 반탄된다. 또 기운을 끊어버린다. 검이 몸에 닿는 순간, 혹은 상대의 손이 자신의 몸 어느 부위든 닿는 순간 붙들리게 되어 있다.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태워 극대화한 흡성대법.

한데 여우의 정교함은 말로 할 수 없다. 반탄과 차단이 자유자재다. 드러난 피부는 분명 청년이거늘 이 연륜은 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알고 있다.

죽는다.

여우는 검을 거두고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다.

아마도 처음부터 준비한 것을 이제 펼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먼저 가.’

취생존자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다.

그날도 그랬다.

취생존자가 되기로 한 날.

- 그런 의미에서 내 별호는 귀화(鬼火)로 할게.

- 음, 그럼 난 멸천존자.

- 나는 취생존자. 내가 제일 낫군.

여우가 바람이 된다.

유유히 다가오는 그의 우수에 머물고 있는 다섯 개의 빛.

죽음을 선사하겠지.

무서워.

소규가 후공을 맞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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