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68화 (168/460)

168화.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3)

오른손에 맺힌 다섯 개의 빛.

무엇이라 부르는 걸까?

능오침.

후공의 절예.

이를 소규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느낄 순 있다. 느껴진다. 자신의 몸을 두른 두터운 호신강기의 벽을 뚫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다가온다. 마치 봄 같다.

봄바람처럼 경쾌함이 물씬 풍겨난다.

죽음을 선사할 거면서 이렇게 산뜻해도 되는 건가.

소규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다.

별것 아닌 취급 받는 기분, 나를 마주해오며 이리도 자신만만하다고? 언짢다.

‘아직이야.’

벌써부터 기뻐하지 마라.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끝은 가봐야 아는 거니까. 내가…….

‘너의 봄을 짓밟아주지.’

이제껏 소규가 내공을 흡수한 사람의 숫자는 백구십여 명. 한 사람을 십 년씩만 잡아도 그의 몸 안에는 천구백 년의 내력이 담겨 있는 셈이다.

할 수 있다. 해낸다.

‘내가 겨울이 되어 찢어주마!’

닥쳐오는 여우를 향해 강대한 내력을 발출했다.

파아앙!

핑그르르, 포악스럽게 밀려드는 장력을 여우가 비껴내며 휘돌았다.

여우는 영리하다. 여우가 상대의 내공력의 방대함을 모를까. 이미 검강의 공세를 통해 확인했다. 승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대의 강점을 인정하는 것. 방대한 내공을 내공으로 맞설 이유는 없다.

그저 봄이 될 뿐이다.

살랑살랑 바람결처럼 날아들어 뒤덮는다.

그리고 단 일격이면 그만이다.

파앙! 파아아앙!

겨울의 파상공세가 혹독하게 이어진다. 연거푸 내뻗는 장력이 허공을 가르며 파공음이 터지고 주위의 공간은 일그러지고 뭉개지듯 아지랑이가 맴돌았다.

그렇게 사방이 난폭한 기운으로 넘실거린다. 하지만 겨울은 봄을 어찌하지 못한다. 허운이 풍익이 되면 깃털처럼 그 부근에서 너풀거릴 뿐이다.

애초에 겨울은 봄을 잡을 수 없다.

언제까지나 겨울은 봄의 뒤에 머물 뿐이다.

그저 겨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봄의 기운에 뒤덮이는 것.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아……!”

지켜보는 태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대공자가 검강을 발현할 때도 놀랐지만, 신법은 더한 것이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떠오르고 만다. 눈이 즐겁다고. 그로선 걱정이 아니라 그저 감탄만 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

대공자의 표홀한 신형은 꽃이다. 꽃의 흩날림이어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으며, 또 한순간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또 모든 곳에 피어난다.

‘천화서고의 천재는 어찌 저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건가.’

신법의 묘는 여태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는 것이다.

종남에도, 화산도, 무당에서도.

후공이라면 가능할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바로 떨쳐냈다.

아니다. 후공의 방식은 다르다. 저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요란하지 않다. 후공은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다.

그저 마주하고 무너뜨린다. 상대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른 채 주저앉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 생각 끝에 태을은 스스로 기함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와 누굴 비교하고 있는 것인가. 대공자의 무위에 놀라긴 놀랐나 보다. 후공을 떠올리다니.

그 사이 봄날 같은 여우의 신형은 겨울을 뒤덮어갔다.

어느 순간 겨울은 눈치챈다. 알아차린다.

어디에나 봄이 있다는 걸.

소규의 기분이 그랬다.

잡을 수 없어. 닿지 않아.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지도.

겨울의 상실감은 반대로 봄의 만개. 봄이 겨울을 덮치면 본시 겨울은 흔적조차 남지 않는 법.

봄은 겨울을 수도 없이 압도적으로 날려버린 경험이 있다. 그리 될 걸 알고 있다.

여우의 봄도 그러하다.

이십 년 전의 겨울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겨울은,

‘강대하지만 어설프지.’

순식간에 오십여 초가 지나가는 시점, 후공은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장력 속에서 비로소 틈을 보았다.

겨울의 어깨를 우수로 짚었다.

즉시 호신강기가 거칠게 반발해온다. 일시 손을 떼어 저항을 가라앉힌 후 다시 짚었다. 능오침을 침투시켰다. 스며들 듯 빨려들어갔다. 바로 신형을 튕겨 물러나면서 칠 장여 정도 거리를 벌렸다.

‘……?’

소규는 뒤쫓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선 채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 끝낸 것처럼 물러나는가?

당연한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능오침의 침투 과정은 단계를 밟았으나, 당하는 입장에선 그저 손을 타탁 두드리는 것에 불과한 터.

그러다 소규는 느꼈다.

또 보았다.

‘뭔가 들어섰다.’

내부에 다섯 개의 기운이 출렁, 이어 그것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했다. 여우의 오른손에 맺혀 있던 다섯 개의 빛이 어느샌가 사라져 있다.

예상하고 예감한 대로 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흐른다. 혈관을 타고 역류해간다. 심장으로 빠르게 돌진해간다.

“어, 어떻게……?”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후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일이 설명할 것도 없고 이미 끝난 일이다. 셋을 헤아리는 정도의 순간이 지나면 그만이다.

- 셋.

소규는 서둘러 기운을 끌어와 심장을 둘러쌓다.

물론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외부의 강기를 뚫었던 다섯 줄기의 빛이거늘 내부 따위겠는가.

- 둘.

소규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어차피 죽게 된다면, 멍하니 선 채로 죽음을 기다릴 이유는 없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발작하듯 외치며 여우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혼신의 힘을 담아 최후의 일격을 여우에게 가한다.

하지만 여우는 미동도 없이 바라볼 뿐이다.

바로 눈앞까지 왔음에도, 짓쳐든 거리가 고작 네 뼘 정도임에도, 장력이 내려쳐지는 순간임에도 때가 되었기에,

- 하나.

능오침이 심장을 파고들기에.

“크으으윽!”

소규의 손은 뻗어나가지 못했다. 심장을 움켜쥐고 바로 앞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쿨럭, 쿨럭. 크어억…….”

삽시간에 창백해져 선혈을 토해냈다.

허물어져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며 소규가 올려다봤다. 그 시선을 후공이 내려다봤다.

“이야기할 시간은 있다. 들어보자. 행사, 후공을 향한 복수를 준비한다지?”

“너…… 너는 누구?”

서로가 질문했다. 각기 궁금증이 다르다.

후공은 섭혼으로 장악한 종남파를 통해 무엇을 할지가 궁금했고, 소규는 질문 속에서 눈앞의 여우가 철선인과 선우진을 처리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규로서는 ‘누구냐?’였다.

‘행사’ 그리고 ‘후공을 향한 복수’라는 말의 정확성에서 직감했다. 철선인은 잡혔고, 금제의 발동 전까지 어느 정도까지는 실토했음이다.

화공신타의 소행이라고 생각했건만 뜻밖에도 생소한 여우의 짓인 듯하다. 그것도 젊은 여우.

정파는 왜 그러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가. 타오르지도 않고, 스스로를 파멸시키지도 않고 이런 괴물을 배출해낼 수 있는 걸까.

엉뚱하게도 그런 의문을 떠올릴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떠벌려봐라.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자랑……스럽게?”

“그래.”

소규는 피 묻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웃음이 날 수밖에. 맞다. 지금 유일하게 자랑할 거리라면 그것뿐이긴 하다.

“재밌는…… 일이지. 하지만 너와는…… 상관없어. 이건 후공과…… 우리와의 문제거든.”

“후공이 안정시킨 강호를 망가뜨린다?”

“잘 아네. 쿨럭…….”

소규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피에 물들고 번진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후공이 지키려 한 것을…… 부숴버리는 행사, 후공이…… 소중히 여긴 보물을…… 처형하는 행사. 크크크, 다시 북교산…… 그 보물이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어. 처형식은…… 준비가 끝났지. 아마도 지금쯤…….”

순간, 후공의 안광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그 모습에 소규가 의아해했다.

‘……?’

그 무엇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더할 나위 없이 평정을 유지하던 여우가 분노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걸 다 부숴버릴 것처럼 눈빛이 점점 더 광휘를 발해가고 있었다.

“보물은 누구냐?”

처형식. 보물.

후공은 보물이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지만 확인해야 했다.

“크크크……. 아쉬워……. 나도 보고 싶었는데……. 오랫동안 기다려왔거든…….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후공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 그 여인……. 후공이 손녀처럼 여기는…….”

그리고 이름이 나왔다.

순간,

퍼석!

소규의 머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후공의 신형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태을진인이 놀라 바라봤을 때는 이미 순식간에 까마득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태을진인은 놀라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맷자락을 휘둘러 머리를 날려버린 것을 제대로 못 봐서가 아니다. 신법의 쾌속함 때문도 아니다.

그도 이제야 안 것이다. 이 일이 후공에 대한 복수에서 시작된 일임과, 그 보물에 대한 것을.

보물. 여인의 이름은,

‘무림맹 군사…… 제갈혜.’

군사라는 칭호도 후공의 죽음 이후 과거형이 되었지만 아직 많은 이들은 그녀를 군사라 불렀고, 태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놀람과 함께 의문도 따라온다.

자신도 분노가 일고 또 마땅히 분노할 일인 건 틀림없지만, 천화서고 대공자가 보인 반응은 말로 할 수 없이 극렬한 것이다.

‘……?’

***

북교산의 천주봉.

여이령은 그곳에 있었다.

평소 착용하던 검은 면사는 없다. 타올라서, 태워버려 노파가 된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괜찮다.

종남파를 장악한 후에는 그 대가로 노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다. 더 이상 어떤 남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외모가 되었지만, 그깟 남자의 관심 따위. 괜찮다.

지금 이곳은 꿈꿔온 것들이 현실이 되어 펼쳐져 있다.

그것이면 돼. 충분해.

‘너무 좋아.’

그저 너무 좋다.

여이령 자신의 곁에는 종남파와 사마세가, 그리고 섬궁각이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꿈꿔오고 그려보았던 광경이다.

그리고 저 너머 송모봉.

화산파의 도사들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쌍둥이를 낳은 무림맹 섬서지부장이 수고해준 결과물이다. 이 또한 마음에서 그려왔던 광경.

다음은 용두봉.

화공신타가 성숙노괴를 죽였던 저 봉우리에는 천여 명에 달하는 강호인들이 몰려 있다.

모두 생각해온 광경이다.

그래서 좋다. 생각하던 바가 현실이 되었기에, 늘 꿈꿔왔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기에 더 바랄 것이 없다.

처음부터 머리에 떠올렸던 장소는 북교산이었다.

종남파와 화산파의 중간 지점.

그들의 처절한 혈투.

북교산에 녹림산채가 있다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이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행사란 그런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화공신타가 북교산에서 모두를 쫓아냈을 때는 어그러지는 느낌에 화를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괜찮다. 결국은 이뤄냈으니까.

지금은 꿈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까.

천주봉, 송모봉, 용두봉.

서로가 멀리 삼각 형태로 바라보게 되는 세 개의 봉우리.

‘후공, 기대해요.’

잠시 후면 북교산은 핏물로 흘러 넘칠 테니까.

그리고 그 전의 행사.

여이령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학이 날고 있다.

멸천존자, 원래는 석중비.

그리고 그와 함께 학에 타고 있는 건 후공의 보물.

‘모두의 절망이 되고, 당신의 절망이 될 거야.’

저절로 웃음이 난다.

‘절망 속으로 내던져지는 기분을 만끽하렴. 제갈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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