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69화 (169/460)

169화.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삶은 역설적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불행한 날은 유달리 화창하고, 밤잠을 설치며 내일을 기다리면 비가 온다.

참으로 인생은 우습다.

우스운 일이 너무 많다.

천하제일인은 자결했고, 천하제일인이 아끼던 소녀는 최후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상한 복수가 진행되고 있다.

어떤 현자는 원수가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 복수를 이루었다며 만족했다고 하던데, 지금 유령곡의 행사는 저승을 향해 도발하고 있는 격이다.

하지만 더 우스운 건 따로 있다.

“너희는 어찌하여 이리도 악독할 수 있느냐!”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다. 닿지 않는다.

가려고 해도 너무 높이 하늘에 떠 있어 갈 수가 없다.

그저 볼 수 있을 뿐이다.

북교산 용두봉.

제갈세가 가주는 하늘 위 학의 등에 타고 있는 조카 혜의 모습이 보여서 미칠 것 같았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꼴이 우스워 피를 토하듯 외쳤다.

악독하다고 소리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무 소용도 없다. 알고 있다. 도리어 상대가 바라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건 송모봉에 자리한 화산파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화산의 장로 능량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토해내는 것뿐이었다. 그와 함께한 백여 명의 매화검수라고 다를 건 없다.

분명 무림맹 섬서 지부장 구양수는 종남파를 도와야 한다고, 위험하다고 했거늘 이곳에서 보고 들은 건 당혹스러움 그 자체다.

- 종남은 오늘 화산파의 사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리라! 종남의 칼이 화산을 응징하리라!

- 사마세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섬궁각은 화산의 돌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섬멸하리!

종남파 장문인의 외침을 들었고, 사마가주와 섬궁각주가 외친다. 이백여 섬궁각 궁수의 강궁이 송모봉에 선 자신들에게 향해 있다.

그리고 제갈세가 가주의 절규와 하늘에 떠 있는 학, 그 위에 무림맹 군사 제갈혜다.

‘거짓말…….’

능량은, 화산은, 저절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같은 상황, 진짜 거짓말이었으면 좋을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상상 이상의 섭혼 공능자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고, 유령곡임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도 또렷이 떠오른다.

제갈혜는 내던져질 것이고, 그녀의 찢어질 듯한 비명은 종남파 등이 화산을 공격해오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최선은 이 자리에서 몸을 빼내는 것이다. 자각이 없는 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은 우습다. 역설적이게도 자각이 없는 그들이기 때문에 화산은 그들을 남겨두고 갈 수 없다.

그리고,

능량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갈혜…….’

어찌할 방도가 없어도 그녀를 두고 갈 수 없다.

후공을 기억해서도 그렇고, 혜가 안타까워서도 그렇다.

제갈세가의 절규, 화산의 탄식.

최근 쌍둥이를 낳아 좋아했던 무림맹 섬서 지부장 구양수의 웃음 띤 얼굴에 쏟아져내리는 눈물.

그 너머 북교산에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는 소식이 번지고 번져, 홀리듯 올라왔다가 제대로 해괴한 일이라 멍해져버린 강호인들까지.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선회하는 학을 바라봤다.

...하지만 괜찮다.

정작 제갈혜는 별 생각이 없었다.

학이 선회하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릿결이 휘날려갔지만, 그녀는 평소의 차가운 아름다움을 흘리며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학에 올라타 있는 건 두 사람.

멸천존자와 제갈혜.

당연하게도 멸천존자는 제갈혜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갈혜, 조금은 감정에 솔직해져도 괜찮을 것 같다만.”

“…….”

“후후후,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말이야.”

“…….”

대답은 없다.

대신 제갈혜의 입가에 옅게 미소가 떠올랐다.

멸천존자가 갸웃할 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해지고 싶지 않아.”

“배려인가. 지켜보는 이들의 널 향한 마지막 기억을 위해서?”

“틀렸어.”

“응?”

“솔직해지자면 지금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어야 하거든.”

제갈혜가 멸천을 돌아봤다. 멸천존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런 죽음도 괜찮다 싶거든. 멋져. 근사해. 학을 타고 하늘을 날아보고, 추락. 내 죽음이 평범하지 않아서 좋아. 흠이라면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것이 유일한 흠이야. 기쁨을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 그저 미소만 지어야 하니까.”

그러면서 환히 웃어 보였기에 멸천존자의 얼굴은 구겨졌다.

“괴상한 년이었네.”

“너만 할까. 석중비.”

이미 내막은 들었다. 제갈혜가 알아차린 건 아니다. 멸천존자, 아니 석중비가 들려주었다. 알고 있어야 제갈혜가 더 비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갈혜는 상대가 노인이 아니라는 것도, 이십 년 전에 백부 앞에 있던 꼬마 아이라는 것도, 또 이것이 복수이자, 그때 백부가 아량을 베풀어 살려준 것에 대해 후회하게 해주려는 것에서 비롯된 일임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제갈혜를 비참하게 할 수 없었다.

도리어 같잖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몰랐다면 두려웠을 상황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

제갈혜가 물었다.

생략되었지만, 석중비는 알아들었다.

“크크, 아이들? 나라면 다 죽였지. 후환을 남겨둘 리 없잖아.”

“멋지네.”

“뭐?”

명백한 비웃음에 석중비가 검을 빼 제갈혜의 목에 겨누었다.

그 모습에 아래에서 바라보던 이들이 일제히 탄식하니, 그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제갈혜의 목에 핏방울이 맺혔다.

그럼에도 제갈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소는 더 짙어졌다.

“넌 전혀 성장하지 않았구나. 얼굴은 노인이 되었지만 어른인양 흉내만 내고 있어. 열 살, 열두 살, 그때에서 멈춰 있으니 재밌네.”

“다시 지껄여봐라. 목을 날려버릴 테니.”

“여기서?”

“그래.”

“피 튀어.”

안 그래도 학이 하얀데, 라며 제갈혜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도리어 석중비가 질려버렸다. 꾸며낸 미소라면 혀를 차 줄 텐데, 제갈혜의 미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제갈혜가 말을 이었다.

“넌 복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복수라는 건 누군가를 사랑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야. 증오든 분노든. 누구를 절절히 아껴본 사람은 아이들을 죽이지 않아. 그런 말을 하지 않아.”

“…….”

“백부에게 복수한다고?”

“…….”

“어디에 있는데?”

제갈혜가 웃는다.

석중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갈혜가 말을 이었다.

“백부가 원망스러워? 너희를 죽이지 않아서?”

“…….”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나야말로…….”

석중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갈혜가 울고 있다.

“백부가 원망스러워.”

표정은 그대로인 채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이 눈물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석중비는 화가 났다. 후공이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맞아. 인정할게. 이건 복수가 아니야. 물론 처음에는 복수인 줄 알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지. 유령곡이 나아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었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려 후공은 죽음을 선사했어야 했다는 걸.

알았는데도 고집을 부렸다.

복수라고 스스로 믿으려 애써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믿게 되었는데 이 순간 마음에 쩍쩍 균열이 가고 있기에, 석중비는 검을 거둬들였다.

제갈혜의 목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학 위 들려진 제갈혜의 모습에 함성이 터져나왔다. 종남파와 사마세가, 섬궁각은 환호성을, 제갈세가와 화산파, 그리고 강호인들은 안타까운 절규와 고함을 내질렀다.

석중비가 제갈혜의 목을 조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갈혜…… 이제 작별할 시간이다. 네가 부럽군. 너는 이제 곧 후공을 만날 수 있을 테니. 키키킥, 안부 전해 줘.”

제갈혜도 마주 웃었다.

그 순간, 석중비가 제갈혜를 던졌다.

구름 부근에서 세 개의 봉우리의 중심,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제갈혜는 거친 바람 속에서 천천히 맴돌며 떨어져갔다.

학이 점점 멀어져간다.

누군가의 고함, 누군가의 환호, 누군가의 피맺힌 절규, 크게 들렸다가 잦아들어간다.

‘무서워…….’

눈물이 터져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 이런 죽음도 괜찮다 싶거든. 멋져. 근사해. 학을 타고 하늘을 날아보고, 추락. 내 죽음이 평범하지 않아서 좋아.

거짓말이다.

근사할 리 없다.

그리고 거짓말쟁이 백부.

지켜주겠다고,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나타나지 않은 바보 멍청이 뚱뚱보.

무공을 펼치는 모습은 본 적도 없어서 경공은 펼칠 수는 있는 건가 싶었다가, 검성의 마화 때 처음 봤다. 눈부신 신위, 쫓아가는 세 자루의 검. 벽에 걸린 검은 장식품 같았는데, 미친 소리를 내며 백부를 따라 날아갔었다.

그럴 수 있었잖아.

떠나지 않았다면 날아올 수 있었잖아.

약속을 지킬 수 있었잖아.

그 순간, 보였다.

“……?”

뭔가가 날아온다.

‘여우? ……거짓말.’

이미 죽은 건가. 헛것이 보인다. 여우가 날아올 리 없잖아.

하지만 틀림없었기에, 알아보았기에 제갈혜는 커다랗게 뜬 눈을 하고 왈칵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날아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디디며 다가온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치 허공에 징검다리가 있는 것처럼 딛고, 딛고 순식간에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이내,

잡혔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온 여우가 몸을 낚아챘다.

그 속도 그대로 품에 안긴 채로 제갈혜가 강풍을 느낀 순간 절벽에 가까워졌고, 여우의 한쪽 손이 절벽에 파고들었다.

콰앙!

암벽이 패이고 돌가루가 튀어올랐다.

그렇게 멈춰 제갈혜가 바라봤다.

여우, 천화서고 대공자. 틀림없다.

자신이 어릴 적 만들었던 ‘여우임’이란 글자가 적힌 여우가면을 쓰고 가면 안에서 바라본다.

“대공자…… 어떻게…….”

하지만 후공이다.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또 천화서고 대공자이기도 했기에,

“제갈 소저, 날개도 없으면서 왜 뛰어내린 겁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제갈혜는 다시 눈물이 터지고 웃음이 터졌다.

‘또야.’

백부와 같다. 이 사람 진짜 이상해. 이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백부의 말투라면 ‘날개 있는 줄.’이라고 말했을지도. 그래도 비슷하다.

“당신도…… 없지 않나요?”

“저는 생겼습니다. 여우가 되면서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주 신기합니다.”

‘거짓말. 말도 안 돼.’

그때 여우가 고개를 돌렸다.

제갈혜도 시선을 따라갔다가 보았다. 이백여 개의 강궁이 쏟아져오고 있다.

그녀가 놀라 눈이 커질 때 천화서고 대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흔들릴 겁니다. 그래도 염려 마세요.”

슈슈슈슈슈슈슈슈슉.

강궁은 이제 지척.

‘환명.’

투명한 둥그런 덫 환명이 일제히 떠올랐다.

쏟아지는 강궁 앞으로, 후공의 등 뒤로 감싸듯, 제갈혜에겐 결코 닿지 않게, 전신을 촘촘히 가릴 수 있게, 열두 개의 환명이 떠올랐다.

도중에 복용한 원신단으로 6성의 무위 속 그저 의식만으로 발현된 환명이었으며 투명한 터라서, 후공과 제갈혜를 방패처럼 가로막은 채 강궁은 환명의 늪에 닿는 순간,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건 마치 강궁이 몸 앞에서 스스로 정지한 것처럼 보여, 지켜보는 모두가 탄성을 터뜨렸다.

누구할 것 없었다.

제갈혜도 허공에 멈춘 강궁들을 보았다.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천화서고 대공자를 바라봤다.

가면 속 눈빛이 마주본다.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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