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나를 표적 삼아라.
군웅들은 연신 탄성을 토해냈다.
멈출 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대체 무엇을 본 건지, 또 보고 있는 건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았다. 아니 달렸다고 봐야 하는 걸까.
그래도 놀라운 사실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극한의 초상비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이는 허공답보가 틀림없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신형을 도약한 건 용두봉이었고, 제갈혜를 붙잡고 멈춰 선 지점은 송모봉 아래쪽의 절벽. 그 거리가 장장 삼백여 장(약 1킬로미터)이다.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어 모두 뜬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거늘, 여우는 그냥 내달려 버린 것이다.
놀라움이 어디 그뿐인가.
쏟아진 강궁들이 마치 투명한 벽에 꽂힌 듯 멈춰 고정되어 있다. 부딪힌 범위가 물결치듯 아지랑이로 번져가는 모습이 신비하기 짝이 없다.
이건 도대체 무슨 공법인가?
처음 떠오른 생각은 호신강기였다. 하지만 그런 류가 아님을 군웅들이 깨닫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호신강기였다면 강궁들은 몸에 부딪혔다가 튕겨져 나가 떨어져야 했다.
한데 지금은 덫에 걸린 듯, 늪에 빠진 듯 공간을 둔 채 멈춰 허우적대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의문이 따라온다.
여우가 누구냐는 의문이 폭발했다.
이런 무위라면 화공신타 아니냐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바로 반박당했다. 화공신타를 목격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체형도 다르고, 성숙노괴를 부숴버리고 배를 가른다던 화공신타가 누굴 구할 사람이냐면서 성질을 냈다.
하지만 알아본 사람들이 있다.
제갈세가는 알았다.
저 여우 가면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누가 저 가면을 마음에 들어했는지도, 강아지인지 여우인지 헷갈릴 정도여서 여우임이라는 글자까지 적힌 가면인데도 멋지다고 쓰고 나간 사람을 안다.
‘천화서고 대공자…….’
눈물은 멈추지 않지만, 이미 제갈세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바뀌었다.
.
.
.
그 사이, 후공의 시선은 하늘로 향했다.
학 위에 서 있는 노인을 무심히 바라봤다. 멸천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검령.’
후공은 나직이 불렀다.
우우우웅!
검령이 응답한다.
‘보여 봐라.’
검연으로 주인의 의식과 연결된 검령이다. 이미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능오침에 밀려 얌전히 있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회가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의 분노를 안다. 태연함 너머에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느껴져 검령도 화가 났다.
스르르릉.
예기를 발하며 빠져나와 허공을 빙글 돌아 검 끝을 하늘로 향했다.
이어 폭주.
맹렬히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한줄기 빛이 되어 쏘아져나갔다.
주인의 분노에 답한다.
주인과 함께하던 그 밤, 달을 베지는 못했지만 그때와는 다름을 보인다. 달처럼 멀지도 않아. 해내야 한다. 해낸다.
울음의 끝에 이미 닿았다.
학은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예상치도 못했지만, 알았다 해도 날갯짓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속도였다.
아랫배를 찢어버리고 나아가 등을 뚫고 나왔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엑!]
학의 울부짖음이 터졌을 때는 검령은 훨씬 더 위로 날아가 보이지도 않았다. 멸천존자, 석중비도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학이 절명하면서 그대로 함께 추락해갔다.
“무, 무슨…….”
당황한 마음을 붙잡고 무너지는 가운데 사방을 둘러봤다. 세 봉우리의 중심지에서 밑은 만장절애. 방향은 정해져 있다. 여이령과 종남이 있는 천주봉.
저곳까지 나는 닿을 수 있을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추락해가는 학을 디딤돌 삼아 딛고 신형을 솟구쳐 날렸다.
하지만 그는 후공이 아니다. 환명을 발현할 수도, 허공답보에도 이르지도 못했다. 뽑아올린 신형의 동력이 상실됨을 느낀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
죽음을 직감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정점에서 멈춰 추락만을 남겨둔 순간, 그는 이령을 바라봤다.
“멸처어어언!”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이령이 소리친다.
귀화, 여이령.
노파가 된 귀여웠던 소녀.
석중비는 웃음을 지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표정을 고쳐 보여줄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속절없이 추락해갔다.
여이령이 절벽 끝자락에서 내려다봤다. 입을 틀어막고 떠나가는 석중비를 망연자실 바라봤다.
그런 여이령을 후공이 보았다.
검령은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다가 의식 범위에 들어서자 검집으로 빨려들어갔다.
후공은 제갈혜를 안은 채 그대로 도약해 송모봉 위로 올라섰다.
화산파 장로 능량이 보여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반가움을 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능량과 매화검수들을 일견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제갈혜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바로 돌아서 천주봉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검령이 쏘아져 학을 찢어버리면서 이미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후공은 노파를 바라봤다.
거리는 멀다. 하지만 자령안에 끌려 당겨진 그녀의 얼굴은 바로 눈앞.
‘이령.’
주근깨가 많던 소녀.
종남파를 장악하기 위해 스스로를 태워 노파가 되었을 테지만, 분명 여이령이다.
적흑과 멸천을 보냈다지만 여이령의 존재감은 다르다.
그래서 끝은 아직이다.
여이령이 끝나야 비로소 끝난다.
치명적이고 위험한 공능. 노파가 되었다지만 아직 이령의 시간은 남아있다. 그 남은 시간 속 지나는 모든 길에 죽음을 드리울 수 있다.
이령도 바라본다.
악독하게 쏘아보는 눈길이 묻고 있다.
누구냐고.
궁금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다.
모두의 시선이 닿고 있다.
심지어 종남파도, 사마세가도, 섬궁각도 바라본다.
다른 사람은 상관없다.
오직, 이령.
그녀에게 알려야 한다.
누구를 찾아와야 하고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목표를 명확히 심어주어야 한다. 목표가 오직 한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심력을 비축한다. 섣부른 살상을 멈추고 전력을 다하도록, 목표물을 제거하기 전까진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도록…….
드러낸다.
후공은 여우가면을 벗었다.
얼굴이 드러난 순간, 이령의 안광이 새기려는 듯 빛난다.
그리고 일제히 울리는 군웅들의 탄성.
“아…….”
탄성이 모여 크게 굵게 여운이 산야를 울린다.
누군가는 알고 있음에도 놀랐지만, 대부분은 고작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의 모습인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가운데 후공은 목소리에 내력을 실었다.
“나는 천화서고 대공자.”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또렷하게 북교산을 휘돌았다. 끝도 없이 울려가는 음성에 군웅들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가운데 말을 이었다.
“나를 찾아와라. 이령.”
‘무, 무슨?’
여이령이 눈을 부릅떴다.
너무 놀라 동공이 흔들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내일 밤 청우산 소연봉. 약속하마. 함정은 없다. 나는 널 홀로 맞이할 것이다.”
“…….”
당연히 이령의 대답은 없다.
그녀로선 놀라서도, 확답을 할 사안도 아니다.
하지만 머리에 시간과 장소는 새겨졌다.
‘천화서고 대공자……. 내일 밤, 청우산 소연봉.’
무엇보다 궁금해진다.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난다.
소규가 돌아오지 않았다. 소규는 죽은 걸까? 천화서고 녀석에게? 그래서 소규를 통해서 알게 된 건가, 그럴지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령은 한참을 바라보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돌아서며 명을 내렸다.
“섬멸.”
때만 기다려왔던 종남과 사마세가, 섬궁각이다.
송모봉으로 향하려 곧바로 신형을 돌렸다. 이령도 그 무리 속에 묻혀 이내 자취를 감췄다.
후공도 몸을 돌렸다.
능량을 바라봤다.
능량이 갸웃했다가, 이내 들려온 음성에 말없이 고개를 연신 끄덕여댔다.
서로 간에 전음이 오갔다.
대응에 대한 논의였다.
논의라곤 해도 대부분 능량이 듣는 쪽이었지만, 그 방식이 옳아 능량은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이는 능량이 그러한 그릇임을 후공이 알고 있기에 가능한 상황이기도 했다.
능량이 매화검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화산은 종남파 등을 상대함에 있어 그들을 살상하지 않는다. 화산은 그들을 지킨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다치지 않는 것이 그들을 위한 길임도 명심하라.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분산한다. 철저히 점혈법으로 응수하고, 흩어져 기습하며 여의치 않으면 도주한다. 너희가 왜 매화검수인지 증명하라!”
백여명의 매화검수들이 예를 취한 후 일제히 송모봉을 내려갔다.
이어 능량이 용두봉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강호 영웅들께 화산의 능량이 한 말씀을 드리리다.”
천여 명에 이르는 군웅들이 바라보며 귀기울였다.
능량의 말이 이어졌다.
“영웅들 중 강호의 낭인왕에 견줄 수 있는 경지를 지닌 분들께 도움을 청할까 하오. 종남과 사마세가, 섬궁각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으니 화산의 이름으로 청하는 바입니다. 그 외 아직 경지가 미치지 못하는 분들은 즉시 북교산을 떠나 주실 것도 청합니다.”
능량은 자신이 용두봉으로 건너가겠다고 말하며 말을 맺고는 후공 쪽으로 돌아섰다. 씨익,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떤가. 잘했나?”
후공도 따라 미소지었다.
능량은 언제나 즐겁고 흥이 넘치는 녀석이다.
말도 전음으로 이야기한 대로 잘해주었기도 해서 흡족했다.
“화산파는 명불허전입니다.”
“흥! 누가 들으면 내가 주도한 줄 알겠군. 자네에게 물을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겠지. 용두봉으로 건너가세.”
“먼저 가십시오. 저는 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다렸다 가겠습니다.”
“오고 있는 사람?”
능량이 갸웃했다.
그러다 이내 일단의 무리가 다가옴을 감지했다.
“어? 아는 이들인가?”
“천공단과 너구리입니다.”
색관조가 태을진인을 찾으면서 종남파에 문제가 생긴 걸 인지한 후 먼저 종남파로 떠났던 천공단과 성숙노조였다. 곧바로 그들 모두가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후공은 예를 갖추는 천공단을 둘러보고, 성숙노조에겐 가볍게 목례로 맞았다.
“워어어, 면면 화려한 것 보게.”
능량이 천공단을 보며 놀라워하면서도 껄껄 웃었다.
반면 제갈혜는 너구리를 보며 눈이 커졌다.
“노조!”
화공신타에게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성숙노괴가 버젓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너구리가 갸웃했다.
“누구신지? 성숙노괴라면 죽은 걸로 아오만.”
목소리가 성숙노괴였기에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이야기가 길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당장 몇 마디로 나눌 수 없는 많은 일들.
하지만 그런 대화에 이번엔 능량이 놀라버렸다.
“아, 아니 잠깐만. 너구리가 성숙노괴라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당신들 대체 뭐야?”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후공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답을 주며 말을 이었다.
“몰려옵니다.”
종남, 사마세가, 섬궁각.
할 일이 많다.
멸천의 죽음도 확인해야 하고.
**
그 밤, 운양.
외곽의 허름한 객방.
이령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들 수 없는 밤이다.
혼자 남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행사도, 혈해시산도.
종남과 사마세가, 섬궁각은 각개격파당했다.
화산은 타격이랄 것도 없다.
취생존자, 소규는 소식이 없다.
멸천존자, 석중비의 아득히 멀어지는 모습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꿈은 현실이 되기 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 때문이다.
‘천화서고 대공자.’
어딘가,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자결시키고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하지만 이령은 참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내일을 위해 심력을 아낄 필요가 있다.
내일 천화서고 대공자를 상대하는 데 삶의 전부를 걸어야 하니까. 처절히 짓이겨주어야 하니까.
‘잠들어야 해.’
**
그 시각,
후공은 창문을 넘었다. 밤을 질주했다.
길 안내는 색관조.
목적지는 이령의 처소다.
내일을 말한 건 내일에 얽매이도록 유도해서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행동을 묶어 두려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령, 찾아올 것 없다.’
내가 지금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