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71화 (171/460)

171화. 그 말이 약속.

새벽녘.

침상 위 노파가 잠들어 있다.

노파의 모습이지만, 실상은 이령.

그녀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옅게 앓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이령을,

후공이 내려다봤다.

아마도 꿈을 꾸나 보다.

좋지 않은 꿈일 테지.

깊은 좌절을 맛본 날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이령…… 너에게 더 이상의 연민은 없다.’

더 이상은 아이가 아니므로, 실제 노파는 아니라 해도 서른 살의 나이이기에,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가지 마’라고 눈물 흘리며 외치던 소녀와 지금 눈앞의 여인은 이미 다른 사람이다. 세월이, 잘못된 다짐이, 괴상한 습관이 쌓이고 쌓여 괴물이 되었다.

이해의 범주를 아득히 넘었다. 너무도 많은 이가 죽었다.

팟.

후공은 혈도를 점했다.

먼저는 수혈(睡穴)을 짚어 더 깊이 잠들게 한 후, 이어 마혈로 신체를 마비시켰다. 거기에 은외법으로 수혈 아래 수혈을 중첩. 마지막 사혈(死穴)까지 점혈했다.

이령을 죽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일식경(약 30분).

죽음은 은외법으로 잠시 유예되었다. 단지 유예다. 죽음을 피할 길 따위는 없다. 그저 그 사이 몇 마디 들어야 할 답변이 있을 뿐.

‘…….’

깨우려다 후공은 몸을 돌렸다.

이령을 등 뒤에 둔 채 객방의 창가로 걸어가 밤의 풍경을 스치듯 눈에 담아갔다.

특정하지 않고 풍경을 막연히 바라보는 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좋다. 거기엔 기분 여하를 떠나 저절로 옅은 미소를 띠게 하는 기묘한 마력이 있다.

하지만 이 밤의 풍경은 그렇지 않다.

마음은 잦아드는 한편으로 의문이 떠오를 뿐이다. 이령과 함께 있어서도 그렇지만, 이 풍경 안에는 은밀함이 숨어 있는 것이다.

‘누구인가.’

밤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는 한 사람.

은신이 매우 뛰어난 자가 어둠에 녹아들어 있다. 이곳에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령을 찾아온 건 자신만은 아닌 모양이다.

또 다른 동료인가? 네 번째 아이인가?

‘그도 아니면…….’

번뜩 스치듯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것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후공은 은신한 이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있다.

궁금해졌지만, 먼저는 이령이다.

‘넌 잠시 기다려라.’

하나에서 둘이 되어 의문의 인물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령을 깨울 때였다.

다가가 해혈했다. 수혈이 풀리면서 이령이 움찔한다. 하지만 깨어나진 않는다. 수혈은 강제 수면. 몽롱함이 바로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나직이 불렀다.

“일어나라.”

반응이 곧바로 나타났다.

이령이 눈을 부릅뜨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놀라 튕겨지듯 상체를 일으키려는 의지와 달리 신체는 마비되어 억제되어 있기에 나타난 반동이었다.

“허어어업!”

대신 깊게 숨을 거칠게 들이쉬며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

이령으로선 경악할 수밖에 없다.

한순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 내려다보는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의 얼굴은,

“너, 너는…….”

천화서고 대공자다.

충격 그 자체.

그녀는 머리가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다.

어떻게 여길? 청우산의 약속은?

아, 내가 속았구나.

그런 자각이 빠르게 따라왔다.

하지만 어떻게 날 찾은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으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고, 모든 걸 무너뜨린 자. 이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시야에 들면 벗어날 수 없는 건가.

그래서,

“당신은…… 누구인가요?”

물을 수밖에 없다.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후공은 물음을 이해했다. 천화서고의 천재임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름을 묻고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이령, 답해봐라.”

“……?”

“나는 이 대답만 들으면 된다. 너희 셋 말고 유령곡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이가 또 있느냐?”

“그건…… 몰라요.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애매한 대답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확실하길 바랐던 후공에겐 최악의 답변이었다.

“그보다 대공자…….”

미간을 좁히고 있던 후공이 이령을 바라봤다. 이령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동자 테두리에 핏빛이 회전했다.

이령이 섭혼을 운용, 발현했다.

‘넌 끝이야.’

이령은 내심 미소 지었다.

놀란 것도 맞지만, 경악만 하고 있을 사람일 리 없잖은가.

대공자, 너의 실수다.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는 너의 자신감이 화근이다. 너의 놀라운 신위는 인정해. 바라보면서 전율이 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자만감은 언제나 일을 그르친다.

찾아온 틈을 노리지 않을 이유는 없다.

마주친 서로의 눈길은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령은 모른다.

상대가 나쁘다.

섭혼은 의식의 영역. 의식을 다룸에 있어 천화서고 대공자의 수행은 이십 년이 아니다. 그 너머 정종심법이 심오하게 깃들어 있다.

정종의 심법은 결코 현혹됨이 없다.

거기에 자령안이다. 안광만으로 영혼을 뒤흔들어 떨게 한다.

무엇보다, 틈을 보인 것이 아니다. 기회를 열어준 것이 아니다. 그저 뭘 한다 해도 상관이 없었을 뿐이다.

“으으으으으으으으…….”

후공의 자령안에 이령의 눈동자가 미칠 듯 흔들렸다. 눈이 타들어가는 듯하고,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며 신음을 발했다. 그러던 한순간 이령의 머리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쩌어어엉!

“하아아아아아아…….”

이령이 숨을 몰아쉬고는 시선을 떨궜다.

장악당했다.

역 섭혼.

자령안에 허운의 반탄을 실어 튕겨낸 탓에 이령의 내면 의식은 종소리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내 이령이 빙긋 수줍게 미소 짓고 있다.

이제 주인은 후공.

후공은 다시 물었다.

“들어보자. 너희 셋 말고 유령곡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이가 또 있느냐?”

“그건…… 몰라요.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돌아온 답이 달라지지 않았다.

후공은 질문을 바꿨다.

“너희 말고 다른 아이들은?”

30명 가량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중에 이번 사태를 촉발한 건 셋.

단 세 아이가 스스로를 태워 강호를 뒤흔들었으니 확인이 필요했다.

“그들은…… 관심이 없어요.”

“너의 입장에서?”

“아니요. 그들이 우리에게, 그들이 유령곡에…….”

“그런가.”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답은 그나마 흡족하다.

더 묻고 싶은 건 없다. 이 대답이면 되었다. 더 나눌 이야기도 없다.

그때 이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후공을 아시나요?”

이령이 혼이 나간 얼굴로 물어온다.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이령이 말을 이었다.

“후공은…… 후회할까요?”

“…….”

“지금 내 모습을 그가 본다면 살려둔 걸…… 후회할까요?”

그 말과 함께 이령이 눈물을 흘렸다.

미소 지은 채 젖은 눈으로 바라본다.

후공은 가만히 바라만 봤다.

주근깨가 많던 소녀가 노파가 되어 물어온다.

후공은 자신에게 물어온 것이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대답해주었다.

“……?”

이령이 한순간 멍해져 눈을 깜박여댔다.

그러다가 빙긋 웃었다.

“당신은 마치…… 후공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눈물은 여전히 하염없이 흐른다.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구나.”

“나도 알아요.”

“듣고 있다.”

“후공…….”

후공은 이령의 시선을 그대로 받았다.

이령의 미소가 짙어졌다.

“다시 볼 수 있어 좋았어요.”

“그래.”

“그리고 당신…… 천화서고 대공자도.”

“그래.”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령이 무엇을 알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랬으면 하는 소망이 흘러나온 걸 수도 있고, 혹은 무의식이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의미없다.

“잠이…… 와요. 눈이…… 무거워요.”

이령이 눈을 감았다가 뜨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잘되지 않아 힘겨워한다.

수혈 아래 은외법으로 중첩해둔 수혈이 먼저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잠들게 된다. 영원히.

“편히 잠들어라. 이령.”

“그래요, 아무래도…… 자야겠어요.”

수혈에 잠들고 나면, 그 후에는 사혈이 작용.

잠든 가운데 죽음에 이른다.

이 순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아량.

“깨어나면…… 볼 수 있겠죠.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 또 봐요.”

언젠가…….

여운처럼 흐릿하게 이령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

잊혀지지 않는 이름.

후공은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숨결까지는 있어주려 했다.

어느 순간 호흡이 사라졌다.

확인을 마친 후 비로소 입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이내 창가에 한 인영이 올라섰다.

후공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풍경 속에 은신해 있던 이다. 흑의를 걸친 삼십 대 정도의 사내.

이령이 잠들 시점에 가까이 다가왔다.

적의는 보이지 않았기에, 아마도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령은…… 죽었습니까?”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흑의 사내가 갸웃했다.

“대공자, 그대는 누구냐고 묻지 않는군요.”

“상관없어서 그렇습니다.”

서른 명의 아이들 중 하나가 아닐까.

“혹시 나도 당신 손에 죽는 겁니까?”

“누구냐보단 왜 왔는지가 중요해서 그렇습니다.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싶군요.”

흑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가 창가에서 내려섰다.

“그럼 들려 드려야겠군요.”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십 년 전.

후공을 앞에 둔 서른 명의 아이들 중 하나라고 했다.

후공으로선 짐작하던 바였고, 또 다행이었다.

여이령, 석중비, 소규.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따로 움직였다.

유령곡의 이름을 지우고, 복수를 꿈꾸는 대신 평범한 삶의 길을 택했다.

-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라.

“……후공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택했습니다.”

다행이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공을 익힌 건 스스로를 지키는 의미라는 말도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세 아이가 그들에게 찾아온다.

함께하자고.

거부했으나, 그 뒤 불안해졌다고 한다.

이령과 석중비 등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유령곡의 후인들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에게까지 후폭풍이 올까 두려워졌다는 말이 이어진다.

“……저도 북교산에 있었습니다. 전부 보았고, 이령을 몰래 따라붙었습니다. 이령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이령 곁에 있으면 대공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를 만나야 할 이유라도?”

“약속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제게 말인가요?”

“네.”

후공은 갸웃해보였다.

“그대들까지 쓸려나가지 않길 바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제가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거늘, 제가 하는 약속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흑의 사내가 바라본다.

그러곤 이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그가 전부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호를 한바탕 휘저은 이 혼란을 누가 잠재웠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는 보았다.

더불어 강호에 퍼진 높은 신망 또한 알고 있음이다.

이령을 끝낸 것도 그.

“약속해주십시오.”

“…….”

후공도 이해했다.

이 아이는 그들을 쓸어버릴 사람으로 ‘천화서고 대공자’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확인해보자. 진심을.

“장소.”

흑의인이 고개를 들었다.

음성이 이어진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흑의인은 현명해져야 하는 순간임을 직감했다.

이건 시험. 마지막 시험. 망설여선 안 된다.

“남해의 승명에 있습니다.”

후공은 비로소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말한 건 자신들 전부를 내보인 셈이다.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있노라고.

“승명이라……. 언제 한번 찾아가면 술 한잔 얻어먹을 수 있는 겁니까.”

그 말이 약속이었기에,

흑의 사내,

이십 년 전의 아이, 임유가 환히 웃었다.

“감사합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