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74화 (174/460)

174화. 천공단주, 어디 갔어?

이제 곧 도착.

천공단의 처소가 가까워지자 제갈혜는 괜스레 긴장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홍조가 올라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천화서고 대공자를 떠올리면 저절로 그날 그 순간이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날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두근거렸던 날이고, 여우가 날아오는 걸 보고 멍해졌던 날이며, 잡혀 품에 안겨서는 안도감에 또 두근거린 날이기도 했다.

붙들려 안겨 그대로 더 나아가 그의 손이 절벽에 파고들면서 튀어오르던 돌가루까지 생생히 기억나므로, 천화서고 대공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만으로 긴장하게 되고 만다.

그 모습이 표가 났나 보다.

“괜찮은 거냐?”

남궁연이 물어왔다.

혜는 동생 소예의 절친, 어릴 때부터 봐온 남궁연에게 혜는 또다른 여동생이나 다름없었다.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괜찮은 것 같네.”

“근데 어디로 가는지는 정말 듣지 못했어요?”

“전혀. 멀리 간다는 이야기뿐이었어.”

혜가 바라본다.

그 표정이 말하는 의미는 명확했다. 왜 물어보지 않았냐, 궁금하지도 않았냐는 의미였기에 남궁연이 피식 웃었다.

“궁금할 리가. 나야 멀든 가깝든 두목이 가자면 가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응?”

“분명 예정에 없던 일이잖아요. 그래서 전…… 왜인지 대공자의 멀리 간다는 결정이 저 때문인 것 같아요.”

새로운 곳, 여러 장소를 여행하는 건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언젠가 백부가 해준 말이기도 하다.

의제인 아버지를 잃었을 때를 이야기하며 백부는 그런 생각을 했다고 했다.

기억을 흐리게 하는 방법이라며,

낯선 장소, 여러 곳을 다니다 보면 시간이 오래 지난 것처럼 마음이 왜곡된다고 했다.

그래서 백부는 잊지 않으려 아무 곳도 안 갔다고 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는 어려 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 떠올려보면서 펑펑 울었다.

그래서 제갈혜는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죽음과 맞닿아가던 순간 놀랐던 기억을 오래된 추억이 되게 하려는 대공자의 배려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연의 시선이 느껴져 제갈혜가 바라봤다.

“왜요?”

“어디 아픈 건 아니지?”

“…….”

제갈혜가 입을 쓰게 다셨다.

“제가 망상이 좀 심했죠?”

“어…….”

곁에서 걷던 설영이 키킥대며 웃었다.

설영의 생각도 같았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혜 언니를 위해 어딜 갈 사람은 아닌 것이다. 여태 지켜본 바가 그렇다. 천공단주는 느긋한 사람. 그러다가 무언가를 할 때는 분명하고 큰 목적이 있었다.

어딜 간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망상일 리가.’

그 대화를 후공이 들었다.

망상이 아니다. 혜의 말이 맞다.

예정에 없던 일.

이 결정은 순전히 제갈혜를 위한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새로운 곳, 여러 장소를 거쳐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이 만들어, 놀랐던 혜의 기억을 오래된 추억이 되게 하고 싶은 확실한 목적.

북해빙궁으로 간다.

*

그 밤.

연회가 열렸다.

다 같이 모였기에 연회였고, 작별의 연회이기도 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성숙노괴와 호열자가 떠나는 것이다.

“그냥 가지 말고 우리랑 같이 있어요.”

“맞아. 이제 만난 건데.”

그새 정이 들었나 보다.

소천개와 은앙개가 아쉬워했다.

은앙개가 술잔을 채워주는 중에 성숙노괴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

“왜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성숙노괴는 천공단주를 바라봤다.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어지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어. 현기증 나.”

괜한 말은 아니다. 성숙노괴로서는 솔직한 감정이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곤 천화서고 대공자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닌 것에 불과한데,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도 그랬고, 돌이켜봐도 그렇다.

아우의 일.

공청석유. 하오문을 만나고 또 천금서고 선우진. 그리고 너구리가 되었다가 북교산에서는 맞아 죽기까지 했다. 그것조차 끝이 아니어서 도대체 막연하여 이 일은 언제 끝나는 건가 싶어질 때, 한순간 끝나 버렸다.

그리 되면 현기증이 날 수밖에 없다.

아니면 늙은 걸지도.

더불어 이쯤 되면 장강의 뒷물결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음에도 그러려니 하게 되고 만다.

“호열자 아저씨도 함께 떠날 거예요?”

“당연하지. 실이 가는데 바늘이 안 갈 수가.”

소천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두 사람이 연인?”

“죽여버린다.”

그 말에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웃지 않는 건 호열자뿐.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다. 그저 기분이 묘해지는 탓이었다.

천공단 놈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놈들인데, 정이 간다. 솔직히 헤어지기 아쉽다.

“한잔 받으십시오.”

“…….”

천화서고 대공자가 술을 권해왔다.

호열자는 말은 없이 고개만 까닥하고 술을 받았다.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아직 대하기 어렵고, 서열에 대한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로 바라보자면 ‘고맙네’라고 답해야 마땅한데, 주군이 대공자를 거의 친구처럼 대하는 걸 생각하면 ‘고맙습니다.’가 되어야 한다.

또 호수에 비친 모습이 멋진 화공신타라고 생각하면 ‘영광입니다.’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잔을 받아야 했다.

‘젠장, 복잡해…….’

강렬한 인상이라면 역시 화공신타.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의 모가지를 돌려버렸고, 입만 열면 죽여버린다고 윽박질렀다. 그러면서도 마승과 염라수의 손에서 수많은 이들을 구했고, 주군을 도왔다.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사람들이 자신을 모르는 것이 서운하다고 했다. 많이 유명해지고 싶다면서 소문 좀 내달라던 화공신타의 모습은 떠올려볼 때마다 기도 안 찬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라면,

‘멋진 사람’이다.

생각이 정리되었기에 호열자는 술병을 들었다.

“대공자, 제 술도 한 잔 받아주십시오.”

천화서고 대공자가 바라보며 갸웃한다.

그러곤 잔을 내밀며 말한다.

“영광입니다.”

호열자가 일순 멍해졌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대공자가 꺼낸 것이다.

“제가…… 영광입니다.”

“어허, 제가 영광이라니까 그러십니다.”

“그건 좀…….”

“뭐 그럼 같이 영광인 걸로 하죠.”

대공자의 말투가 뭔가 얼렁뚱땅이라 지금은 또 화공신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탓에,

“저기 대공자……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편히 말씀해 보세요.”

“그거 한 번만 다시 해주십시오.”

“그거? 그것이 무엇일까요?”

“정지.”

“하하하, 난 또. 술이나 드십시오.”

대공자가 웃는 바람에 호열자도 실실거리며 머리만 긁적였다.

“정지가 뭐죠?”

제갈혜가 소곤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남궁연도 알 리 없다. 다른 이들도.

“정지가 뭐야?”

“뭘 정지시킨다는 거야?”

술자리에 답도 없는 의문이 떠돌았다. 그러자 항마삼협 중 이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두를 일깨웠다.

“모두 술잔이 정지하고 있잖아! 정지해선 안 되지. 술독 열 개를 전부 비우기 전까진 말씀이야!”

맞아! 그래야 하지, 라면서 다시 요란하게 술잔이 오갔다.

아무도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 와중 한쪽에서는 정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색관조가 명했다.

[정지.]

[…….]

주인이 화공신타가 되어 호열자를 멈춰세운 그 밤의 모든 걸 본 색관조가 금섬에게 ‘정지’를 시전했기에, 금섬이 앞다리 하나를 든 채 굳어버렸다.

눈동자만 또르르 위로 굴렸다.

**

닷새 후.

화산파 장로 능량은 다시 안강으로 향했다.

천공단을 찾았다.

하지만 능량을 맞이한 건 낯선 청년이었다.

마당을 빗질하고 있던 청년은 문을 열고 들어선 도사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누구신데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십니까?”

“그러는 넌 누구냐?”

능량도 험악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청년이 눈을 빛내며 빗자루를 내동댕이쳤다.

“저는 여기 청소하는 사람인데요.”

“이놈 박력있는 것 좀 봐.”

“그니까 누구시냐고요.”

“화산에서 왔어. 야, 인간적으로 눈 좀 깔아라. 내가 나이도 많잖아.”

“……네.”

화산이 나오자, 청년은 바로 눈을 깔았다.

능량은 그게 또 불만이었다. 쩝, 소리를 내고는 물었다.

“천공단주가 어디로 갔는지 이야기해 봐. 설마 떠난 건 아니겠지?”

“떠났는데요.”

“뭐?”

“언제? 어디로?”

“나흘 정도 됐어요.

“나흘?”

“네.”

“어디로 갔는데?”

“전 청소하는 사람인데요.”

“알아. 아까 이야기했잖아. 천화서고로 갔나?”

“그건 아닌 것 같던데요.”

“넌 청소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알아?”

“느낌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 느낌으로 어딘지 생각해봐.”

“멀리 간다고만…….”

“멀리 어디?”

“전 청소하는 사람인데요.”

이쯤이면 누구라도 폭발하고 만다.

“야이 개…….”

“화산파 도사 아니시죠? 옷에 매화, 마을에서 새로 달았죠?”

“너 진짜 누구냐? 너도 천공단이야?”

하오문이다.

천공단의 친구 하오문.

친구가 멀리 떠난다고 하여 하오문이 저택을 관리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딱히 비밀 같은 건 아니지만, 청년은 화산파 장로 능량과 조금 놀고 싶어졌다.

“아닌데요.”

“넌 청소하는 사람이지?”

“그쪽은 화산파 아니시죠?”

“어.”

능량은 이제 귀찮아졌다.

화산파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샌가 와 있다.

몸을 돌려 울상을 지었다.

“저기…… 사숙, 전부 들으셨죠?”

“그래.”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까지는 분명 한 사람뿐이었고 눈을 뗀 적이 없는데,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이다.

선풍도골,

가히 신선의 풍모를 지닌 노인이었다.

청년의 눈은 하염없이 커져갔다.

‘설마…… 화산의 검선인가? 검선을 내가 보고 있는 거야?’

너무 당황스러워 몸이 덜덜 떨려올 지경이었다.

검선의 시선이 그런 청년에게 닿았다.

무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나직히 들려오는 목소리.

“천화서고 대공자는 어디로 간 것이냐?”

“저, 저는…… 청소하는…… 사람인데요.”

몰라서 다행이고,

그다지 비밀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알았다면 있는 대로 다 말하고 말았을 것이다.

“소속은?”

“…… 하, 하오문.”

검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공단주는 흥미로운 아이로구나. 하오문과도 친밀할 줄이야.”

검선이 능량을 바라봤다.

“능량, 그만 돌아가자.”

능량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사숙의 말에서 뒷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내용이라면,

‘돌아가자. 가서 맞자.’였다.

능량이 비굴하게 웃었다.

“사숙, 오랜만에 바깥에 나왔는데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저녁도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열두 대.”

“네?”

“스물네 대.”

“아니 왜 타작 수 계산이 그렇게 되요?”

“마흔여덟 대.”

“시ㅂ…….”

“무한대.”

**

이십여 일 후.

천공단은 하북을 넘어 더 북서쪽으로 나아갔다.

멈춘 건 회광산 부근.

주루의 삼 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은 곳에서도 멀리 회광산이 잘 보였다.

화산 폭발이 멈춘 산.

쉬고 있는 분화구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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