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75화 (175/460)

175화. 열양화리.

회광산은 휴화산이다.

분화구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후공으로선 거의 삼십 년 만이었다.

그때 당시 의제인 제갈청과 현재 천하십객 중 세 녀석과 함께 이곳에서 낚시를 했었다.

열천어였다. 잉어종으로 일명 열양화리. 특이하게도 수온이 높아야 살 수 있어서, 분화구 안에 형성되어 있는 연못에서 볼 수 있었다.

열천어는 고소한 맛이 일품으로, 소금만 살짝 뿌려 구워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또한 열천어는 연한이 이십 년이 넘어가면서는 내단을 품게 된다.

그 내단을 복용할 경우 내력이 증진됨은 물론이고 열양의 기운이 보충되어 한기를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물론 천공단에게 큰 내력 증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희대의 영수(靈水)인 공청석유를 복용했으니 그 하위 개념에 속하는 열천어의 효능은 크지 않을 터.

상관없다. 여길 찾은 목적은 맛과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기 위함일 뿐. 이런 세상과 이런 맛이 다 있다는 감탄 속에 지난 일 따윈 까마득히 잊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요 녀석들, 멋진 추억을 남겨주마.’

석양이 저물어가는 시간.

그렇게 후공이 객잔의 창 너머로 회광산의 분화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거지들에 미녀에 늙은이에 젊은 놈들까지, 아주 웃기는 놈들이 모여있네.”

서너 탁자 건너편이었다.

세 명의 중년 검객 쪽에서 시비를 걸어왔다.

제법 검을 다루는 태가 났다. 눈빛이 살아있고 기도가 잘 정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쪽은 천공단.

천공단이 돌아보고는 웃었다.

“강호 동도들까리 사이좋게 지냅시다.”

언교운은 넉살좋게 말했지만,

“조용히 밥이나 처먹고 가라.”

“너희들 왜 갑자기 죽으려고 안달이냐.”

“한마디만 더 해. 콱 묻어버릴 테니까.”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은 기분이 상했다.

특히 무산쌍웅이 더 그랬다. 늘 자신들의 인상이 험악한 것에 자부심이 넘쳐나는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얼굴을 보고도 시비를 걸어온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순전히 제갈혜와 설영의 빼어난 미모 때문에 발생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튼 마음이 상했다.

검객 중 하나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남자새끼들이란. 여자들과 함께 있으면 허세를 못 부려 안달이지.”

거기까지였다.

“형님.”

무산쌍웅이 허락을 구했기에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낚시대와 한련초, 그리고 장작, 소금이면 되겠습니다.”

식사도 끝나가는 시점.

내일의 준비물을 알려주었다.

한련초는 열양화리의 미끼. 열양화리는 한련초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드니 반드시 필요했다.

“네.”

무산쌍웅이 알아들었다.

일어나 세 검객에게 손짓했다.

“너희들 따라 나와.”

코웃음치며 따라 나간 세 검객의 곡소리가 이내 울려퍼졌다. 이어 짜악, 짜악, 뺨을 내갈기는 소리와 함께 쌍웅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그러곤 함께 장보러 갔다.

*

그 밤.

객방의 지붕 위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가 오갔다.

천공단 내 젊은 세대들이었다.

“형아는 도대체 여길 어떻게 알았을까?”

“멍청아, 두목 말 안 들었냐. 책에서 읽었다잖아. 책이 그렇게 대단한 거여.”

은앙개의 핀잔에 소천개가 반박했다.

“형아는 싸움도 잘하는걸. 다 패고 다니잖아.”

“그것도 책을 읽어서겠지. 절세비급을 얻어버린 거지.”

“그런가. 그래도 난 형아가 불쌍해. 어릴 때부터 얼마나 혹독한 삶을 산 거냐고. 나도 나름 못된 사부 밑에서 혹독한 시절을 보냈는데 형아는 더한 듯.”

“소천개야, 너 몇 살이었지?”

언교운이 물었다.

“12살.”

“흐음……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소천개가 멍청하니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긴 해도 의미하는 바는 크다. 12살이란 나이를 감안할 때 소천개의 재능과 행운은 놀라운 것이다.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능력, 상황판단, 신법, 그리고 나날이 쌓여가는 강호의 경험과 기연까지.

기연이라면 사부가 개방 방주라는 것과, 이어 천공단주를 만났다는 것이다. 개방 내에서, 아니 이 강호에서 어디까지 오를지 모를 일.

“근데 혜 누나는 알려진 바랑 많이 다르네. 무림맹 제갈 군사는 빙화, 원래 얼음꽃이라고 들었거든.”

근데 그냥 예쁜 꽃이야, 라며 얼음 어디 갔냐고 소천개가 물었다.

제갈혜가 빙긋 웃었다.

“그러게. 녹아버렸으려나.”

아니다. 녹은 건 아니다.

원래부터 누군가에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아버지와 백부, 그리고 가까운 이들은 다르게 불렀다. 푼수 같다고. 푼수같이 웃는다고.

그만큼 지금 제갈혜가 천공단을 가깝게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하긴 두목 곁에 있으면 얼음 따윈 녹아버리지.”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녹았잖아요.”

“언 공자는 원래 녹을 것이 없지 않았나요?”

“저도 있었는데요?”

“아냐, 넌 없었어.”

“아니 왜 형님까지……. 저 있었다니까요.”

남궁연과 언교운, 설영이 쓸데없는 걸로 다툰다.

이들의 말대로다. 제갈혜도 동감했다.

천공단주와 함께 있으니 굳이 얼음꽃이 될 일이 없었다. 푼수같이 웃는다면서 어딜 봐서 빙화라는 건지 한심하게 바라보던 백부처럼, 천공단주는 가끔 뚱하니 바라본다. 그러면 얼어있을 수 없다.

여우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안강에서는 공청석유까지 건네주었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나 조건이 없었다. 이유나 원하는 걸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이, 남아돌아서였다.

말도 안 된다.

더불어 천공단 전부가 공청석유를 금섬을 통해 복용했다는 사실도 듣게 되면서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

마치 다 가진 것 같은 사람.

분명히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한 서생의 모습인데 묘하다.

‘마치 백부 같아.’

여유있는 모습이 그렇고, 강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난 형아가 무림맹주 같은 느낌이야. 얼마 전 종남파 장문인이 큰절하려는 거 겨우 말렸잖아.”

“동감. 나에게 두목은 이미 맹주다.”

“그럼 우리 천공단이 무림맹이 되는 거야?”

떠드는 소리.

제갈혜는 조용히 웃음만 머금었다.

‘그래, 천공단주가 백부는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그럴 순 없는 거니까.

그런데 왜?

자꾸 묘해진다.

왜 이곳에 온 걸까. 또 북해빙궁으로 간다고 한 걸까.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대화를 나눠서일까.

아니면,

- 북해의 현음신녀가 북해 빙어가 그렇게 맛이 좋다며 꼭 와달라고 했거든.

- 어디로 가시든 반년 뒤에는 저도 백부님이 계신 곳에 갈 거예요.

- 아…… 귀찮구만.

예전에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일까.

웃음이 난다.

‘말도 안 돼.’

*

그 밤.

그 시간 후공은 회광산을 오르고 있었다.

금적자와 항마삼협만 대동했다.

예전과 같이 연못은 그대로인지, 열양화리는 충분한지 사전 탐사 차원이었다. 낚시대와 화련초까지 준비를 다 해두었는데 열양화리가 없다면 낭패인 것이다.

다들 기대하고 있을테니까.

“단주, 내가 원래 낚시의 대가일세. 알려지지 않은 별호가 동정용왕이지.”

금적자가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동정용왕은 대대로 장강수로채의 우두머리.

항마삼협이 콧방귀를 뀌었다.

“선생, 언제부터 장강수로채를 접수하셨습니까?”

“꽤 됐어.”

“잡혀서 강제로 고깃배 타신 건 아니시고요?”

“그, 그걸 어떻게?”

금적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뭡니까. 그 반응은?”

“어릴 때 실제로 잡혀갔었어.”

“진짜입니까?”

“어. 밥도 잘 주고, 돈도 많이 벌었지.”

“헐.”

“믿는 건 아니지?”

“하하, 그걸 누가 믿습니까.”

후공은 개소리를 흘려들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던 한순간,

지이이잉!

울림이 들려 걸음을 멈췄다.

귀로 들려온 건 아니었다. 신체가 감지했고, 의식이 울림을 들었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던 금적자와 항마삼협이 돌아봤다.

천공단주가 굳은 채 갸웃하고 있는 것이다.

“단주, 왜 그러나?”

“형님, 뭐 안 좋은 거라도 밟으셨습니까?”

“그런 거면 제 옷에 닦으십시오.”

후공은 주위를 둘러봤다. 의식을 확장해 훑었다.

진법이 펼쳐져 있다.

이 지점부터 시작이다. 진법은 기운의 조화와 흐름. 그 흐름을 따라 두루 살폈다.

서 있는 곳은 산의 중간 지점.

이대로 생각없이 나아가면 분화구까지 다가갈 수 없다.

진법에 의해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끝도 없게 된다. 내리막길을 걸어도 오르막 같고, 한참을 걸어도 다시 그 자리.

일명 회도진(回道陣).

후공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가. 꽤 거창하다.

“먼저 온 낚시꾼이 있나 봅니다.”

*

분화구 아래쪽.

노인들의 시선이 분화구 입구 쪽으로 향했다.

두웅, 두웅, 두우우웅.

옅게 울리는 종소리. 진법의 알림이 울린다. 침입자가 있다고. 아니, 침입자가 아닐 수도 있다. 화산의 용암을 구경하려는 이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마음 쓰인다.

대낮이면 모를까, 지금은 밤이 깊었다.

“평범한 이는 아닐 테고…….”

도사 차림의 청수한 노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가슴팍에 팔괘가 수놓아져 있었다.

“장문인, 내가 가보겠네.”

다른 노인의 말에 장문인이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사형, 그러실 것 없습니다. 천변회도진을 뚫고 올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네만.”

모르는 바는 아니다.

모산의 진법이다. 그중에서도 천변회도진은 특별하다. 그 자리를 끝없이 맴돌게 하는 여러 회도진 중에서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구도 뚫지 못한다.

엄청난 기인이나 천재라 해도 걸음을 떼고, 또 방향을 잡고 이동해서 분화구까지 도달하려면 닷새는 걸릴 것이다.

보통은 그 전에 마음을 접고 산을 내려가게 되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누군지 확인해 보려는 건 그만큼 이곳에서의 일이 모산파에 중요하기 때문이고, 신중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웅, 두웅, 두우우웅.

옅은 종소리는 여전히 이어진다.

아직까지 진법의 영역 안에 있다는 의미였다.

“장문인 말씀이 옳습니다. 제풀에 지쳐 돌아가거나, 두려움을 품고 물러날 겁니다.”

성 장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염려의 말을 꺼냈던 진 장로도 수긍했다.

그렇다. 염려할 건 없다.

만약 누군가 진법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이곳에는 모산파의 장문인과 팔장로가 있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천변회도진의 위용은 압도적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웅, 두웅, 두웅, 두웅, 두웅!

이내 상황이 급변했다.

알려오는 진법의 종소리가 커지고 간격이 빨라졌다.

모산파 장문인의 눈이 커졌다.

“무, 무슨?”

그건 팔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종소리가 커지고 울림의 간격이 빨라진다는 의미는 그만큼 가까워져 있음을 알려오는 신호다. 종소리를 통해 천변회도진은 침입자의 위치도 가늠하게 설계된 터.

그런데,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아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게 사람이라고?”

종소리는 빠른 속도로 커져 간다.

듣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

돌고 돌지 않는다. 거침없이 직진해 올라오고 있다.

“이, 이건…… 천변회도진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그렇겠지요?”

장문인이 더듬거렸다.

그래야했다. 진법의 문제여야 한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면 곤란해진다.

거의 괴물인 것이다.

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

급기야 종소리는 귀청을 때릴 정도로 커져 경고를 전해온다.

거의 다 왔다. 곧 나타난다.

장문인과 팔장로는 넋이 나간 채 고개를 들어 분화구 입구 쪽을 바라봤다.

한순간, 종소리가 뚝 멈췄다.

진법을 모두 통과했다는 의미.

찾아온 정적.

큰 울림이었던 탓에 고요함이 깊다.

아니나 다를까,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화구 입구 정상에서 다섯 개의 인영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산의 장문인이 크게 목소리를 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내력이 실린 중후한 음성이 분화구를 타고 울려간다.

위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저희는 낚시하러 왔습니다만.”

천공단주가 순순히 목적을 밝혔다.

자리 있냐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