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77화 (177/460)

177화. 기꺼이.

‘기고만장하긴.’

모산파 장문인 허월은 내심 비웃음을 머금었다.

천공단주가 뛰어난 자란 건 알겠다. 증명해 보였고,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어림없다.

무려 팔괘금쇄진이다. 모산의 공진(攻陣) 중에서도 최상급에 해당한다. 심지어 이 진형을 펼치는 이는 장문인인 자신과 팔장로다.

아홉 명 대 다섯 명.

숫적으로도 이미 우위지만, 보이는 바가 전부가 아니다.

팔괘금쇄진이 개진되면 아홉은 만이 되고, 어느 땐 십만이 된다. 끝없이 기운이 증폭된다.

어디 기운뿐인가. 태극과 팔괘가 어우러져 나타나는 변화는 천지간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변화를 품고 있다.

건곤감리(乾坤坎離), 진태간손(震兌艮巽)의 팔괘.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은 태극.

건곤은 하늘과 땅이요, 감리는 물과 불의 기운. 건곤의 위치에 따라 물과 불의 기운이 요동친다. 곤과 진. 땅과 번개가 교차하게 되면 벼락이 친다.

그 지점에 들어서면 뇌전의 충격에 휩싸인다. 거기에서 벗어나려 신형을 움직이려 한다면 간(산)이 개입한다. 산의 무거운 기운에 짓눌려 상대의 움직임은 둔화된다.

반대로 팔괘를 이루고 있는 모산은 손(바람)의 영향이 전체 진법에 작용하면서 누구 할 것 없이 표홀해져 한줄기 바람이 된다.

거기에 순간순간 변화를 가미하는 건 자신.

음양의 조화 속 태극이다.

팔괘는 음의 기운을 따라 겨울 하늘이 되었다가 양의 기운으로 여름의 바람이 되기도 한다.

핵심이 되는 위치는 앞쪽에 자리한 건과 곤.

특히 곤(땅)의 의미가 막중하다. 굳건히 지탱해 주었을 때 진태간손 자연만물의 변화가 비로소 안정적으로 이루어진다.

걱정은 없다.

곤에 위치한 건 모산의 태상장로.

모산의 최고수. 의심의 여지없이 강한 분이시다. 뒷모습만 보고 있어도 끝없는 지평선 대지처럼 든든함이 말로 할 수 없다.

그렇게 허월이 사형이자 태상장로의 듬직한 어깨를 바라보고 있던 순간,

콰앙!

격타음이 터졌고, 사형이 없어져버렸다.

‘사형?’

어디 가신 건가? 쿵, 소리와 함께 찾았다. 우측 석벽이다. 순간 이동인가? 왜? 왜 석벽에 처박혀 계신 건가? 돌가루와 함께 사형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산의 최고수가 어째서…….’

태극에 선 허월은 넋이 나갔다. 팔괘에서 방금 막 칠괘가 된 장로들도 멍하니 곤의 자리를 바라봤다.

곤(땅)의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서 있다.

기존의 곤을 날려버린 자.

천화서고 대공자가 뒷짐을 진 채 빙긋 웃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인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제가 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태극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칠괘는 경악하며 혼란에 빠졌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한 것이다.

또한 상대는 팔괘금쇄진을 정확히 꿰뚫었다. 핵심이 되는 곤을 날려버리고는 즉시 그 공간을 점유했다.

천화서고가 이 정도였단 말인가?

“대, 대체…… 어떻게……?”

“장문인, 어떻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그럼?”

“하하, 위기감이 없군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금적자와 항마삼협이 뛰어들었다.

지탱하는 곤이 없이 팔괘금쇄진의 묘용은 미미.

태극과 칠괘는 짓밟혔다.

*

“하아…….”

대자로 뻗은 채 허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화구 위로 달과 별이 보인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것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까지 얻어맞은 게 얼마만인가.

어찌 팔괘금쇄진이 이리도 쉽게 무력화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허월은 팔괘금쇄진의 요결을 떠올렸다.

‘태극은 음양의 합이요, 양의는 곧 음양이로다. 음양의 네 가지 형상이 사상. 사상을 여덟 괘의 형상으로 구분한 것이 팔괘이니, 그 위에서 탄생한 팔괘금쇄진은 세상을 뒤덮는 힘으로 위용을 드러낼지니. 분명히…… 그런다고 했는데…… 시…….’

생각할수록 시무룩해져 허월은 생각을 관뒀다.

장로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이제 어찌하면 좋습니까?”

다들 널브러진 채 한탄을 터뜨렸다.

허월이라고 답이 있는 건 아니다.

이 지경을 만들어놓고 천공단주는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상하다.

장로들의 말이 이어진다.

“놈들이 내일 올 것 같습니까?”

“올 겁니다. 괘씸하다며 꼭 와서 낚시를 해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도대체 왜 여기에서 낚시를 하겠다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장로들이 분을 토해냈다.

하지만 허월은 이상하다.

장로들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장로들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천공단주는 보물에 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완벽히 제압하고도, 생사여탈권을 쥐고서도.

물어온다면 이를 악물고 버틸 생각이었는데, 밤이 깊었다며 훌쩍 떠났다.

천화서고 대공자…….

이상한 사람이다.

*

다음 날 정오.

둥둥둥둥둥둥둥둥둥!

천변회도진의 경고음이 크게 울렸다.

‘왔다!’

‘낚시하러 왔다!’

‘사람이 많아!’

모산의 지도부는 분화구 위를 바라봤다.

총 열넷. 생각보다 숫자가 많아서 놀랐다. 햇빛을 등진 채 음영진 그림자의 형태로 내려다보고 있어서일까. 기분상 더 많아보였다.

어제는 9대 5였는데, 오늘은 9대 14.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모산이었다.

*

모산의 어깨는 곧 펴졌다.

천공단의 면면을 확인하고 인사를 나눈 뒤였다. 무엇보다 그 면면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제갈군사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하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어……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천공단과 함께 있네요.”

제갈혜가 웃어 보였다.

진심으로 밝은 모습이어서, 모산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근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제갈군사는 무림맹주 후공의 손녀나 다름없는 이. 또한 귀곡선생에게 사사해, 선생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재. 그녀가 천공단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천공단을 바라보는 모산의 시선은 달라졌다.

비단 그녀뿐이 아니다.

남궁세가와 진주언가의 대공자. 명문가의 후계들이 천공단이라며 소개를 해왔다. 거기에 더해 천산신녀의 제자와 개방 방주의 두 제자까지.

무산쌍웅과 낭인왕의 험악한 인상이 크게 신경쓰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보았다.

“…….”

“…….”

“……?”

바로 없는 취급당했다. 외면당했다. 천공단이 바삐 낚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짜였냐?

“우와와! 사형, 여기 좀 봐. 이거 용암이지?”

“야이, 거지새끼야! 용암 처음 보냐?”

“봤나 봄?”

“처음이지, 멍청아.”

“꺼져.”

“근데 되게 신기하다.”

두 거지가 가장자리 쪽 갈라진 바닥 틈새로 부글거리는 용암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그 지점에서 좌측 끝단에 있는 연못에서는 낚시대가 드리워져간다.

“언니, 연못 물이 엄청 뜨거워요. 물고기가 있다면 이미 익어 있을 것 같아요.”

“하하, 그럴지도. 근데 의외로 수심이 깊나 보다. 물고기가 전혀 보이지 않아.”

설영과 제갈혜도 낚시를 준비했다.

한련초를 미끼로 매달았다.

모산은 한데 모여 그 광경을 한쪽 귀퉁이에서 바라봤다. 형형히 안광을 빛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연못 물은 뜨겁다. 물고기가 있을 리 없다. 곧 실망하고 떠날 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미끼를 물었어!”

“와아, 이것 봐!”

“엄청 통통해!”

“잘생긴 것 좀 봐!”

“카야악, 저도요!”

많았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족족 팔뚝만 한 화리가 잡혀 올라왔다. 검붉은 비늘이 매끄럽고 굵어 여간 실한 것이 아니었다. 익어있지도 않아 힘 좋게 팔딱거렸기에, 지켜보는 모산의 눈동자는 칙칙해졌다.

‘왜…….’

‘어째서…….’

천공단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준비해온 장작을 피우는 한편, 열양화리를 손질했다.

손질은 무산쌍웅이 맡았다.

언제나 손질은 무산쌍웅이다. 약왕문에서 멧돼지를 잡았을 때도 그랬고, 소요파의 목령자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돼지를 구워먹고 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자연스럽게 나섰다.

그냥 썰어가려다 열양화리의 비늘과 외피가 상상 외로 단단함을 알고는 비수에 검기를 일으켜 비늘이며 내장을 제거해나갔다.

“쌍웅께선 왜 이렇게 잘하십니까? 원래 생선 장수였습니까?”

“몰랐냐?”

“하하하!”

남궁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무산쌍웅이 내장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백옥같은 작은 구슬 형태였다.

“남궁아, 이것 좀 봐라.”

“오! 내단인가요?”

“그래 보이지?”

그 대화를 듣고 다들 모여들어 내단을 구경했다. 잡은 열양화리가 서른 마리가 넘어갔는데 그중 절반에서 내단이 나왔다. 내단은 연못에 깨끗이 씻어 한곳에 모아두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열양화리가 구워졌다.

천상의 맛이다, 꿀맛이다, 꿀이 아니라 물고기라며 타박하는 말이 흘러나왔고, 하하호호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광경을 모산이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채 칙칙하게 바라봤다. 장로 중 몇은 침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얼마나 맛있을지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고소한 향이 분화구 안에 진동하고 있었다.

여태 벽곡단만 먹고 있었던 터라 더 그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벽곡단을 챙겨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산 아저씨들, 이리로 와요. 우리랑 같이 먹어요.”

소천개가 손짓하며 불렀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다. 모산은 시선을 외면했다.

즉각 천공단의 비난이 쏟아졌다.

“쫌 오라면 오라고!”

“안 올 거면 침을 삼키질 말든가! 다 들려!”

“양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새색시야? 아주 염병들을 하네, 진짜.”

천공단의 화법에 면역이 없는 모산은 기분이 상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이었다. 그렇다고 화를 내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얼굴만 그랬다. 이미 어제 처맞았으니까.

결국 후공이 나섰다.

“남궁 형, 언 형.”

“네, 두목.”

“두 분이 모셔 오십시오.”

“네.”

몇 번 실랑이가 있었지만, 못 이기는 척 모산이 함께 둘러앉았다. 처음엔 떨떠름한 태도였다가 한 점 먹어보곤 눈이 돌아갔다.

“하하, 열양화리라는 것이 이렇게 맛이 좋았소이까?”

“세상에나. 여태 살면서 이런 맛은 처음입니다.”

“허허허, 씹는 맛 다음에 사르르 녹아 고소함이 감도는 것이 일품입니다그려.”

벽곡단만 먹다 먹어서도 그렇고, 실로 맛이 좋아서 모산의 손길은 멈출 줄을 몰랐다. 천공단이 한심하게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아까까지 꽁해 있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모산은 왜 그래요?”

“뭘 말이냐?”

소천개의 말에 장문인 허월이 반문했다.

“보물을 찾고 있다면서요? 근데 왜 굴러온 복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거예요?”

“응?”

“약왕문은 달랐거든요. 해답을 찾으려고 형아를 초빙해서 해결했거든요. 잘됐어요. 아주.”

“아…….”

거기까지만 들었지만 허월과 모산은 알아들었다.

굳이 어렵게 초대할 것도 없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이미 곁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천변회도진을 순식간에 돌파한 이.

팔괘금쇄진을 한눈에 파악하고 파훼한 이가 눈앞에 있다.

더불어 지난 밤.

완벽히 자신들을 제압하고도, 생사여탈권을 쥐고서도 보물에 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굴러온 복.

천화서고 대공자.

‘그렇구나.’

부탁해도 될까.

허월의 시선이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닿았다.

“대공자, 부탁해도 되겠나?”

후공은 마주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기꺼이.’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동굴이 있음은 어제 이미 확인했다.

보물은 무엇일까?

궁금하긴 하다. 취할 생각은 없으나 천공단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로는 충분할 것이다.

“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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