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78화 (178/460)

178화. 불의 정화.

단호한 거절.

덕분에 허월의 표정은 멍청해지고 말았다.

“…….”

생선도 같이 먹자고 부르고 분위기도 좋아 그냥 잘될 줄 알았다가 크게 한 방 먹은 격이었다.

허월의 혈색이 안좋아지자, 천공단이 깔깔거렸다.

“단주, 잘 생각했네. 속이 다 시원하구만.”

금적자를 시작으로,

“하하하! 형님, 최고의 선택이십니다.”

“안 그래도 괘씸했는데 쌤통입니다! 도대체 천공단주를 뭐라 생각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진작에 좀 잘하지 그러셨어요. 다 때가 있는 법인데.”

신랄하게 조롱을 퍼부었다.

천공단은 아는 것이다.

금적자와 항마삼협은 지난 밤 직접 들었고, 다른 이들은 금적자 등을 통해 단주가 모산에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들은 터다.

그래서 더 신랄했다.

단주는 그저 잠시 떠보고 있는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는지, 싹수는 있는지 확인함이었다.

단주는 언제나 그랬다. 늘 점검했다. 점검은 모호할 때도 있었고, 낭인왕 때처럼 노골적일 때도 있었다.

거절로 인해 다급해진 건 허월을 위시한 모산이었다.

천공단의 조롱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상대의 진가와 의미를 깨닫고 나니, 어떻게든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차오르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자 그렇게 되었다.

이젠 대공자가 당장이라도 떠날까 봐 걱정되었다.

“대공자, 부디 마음 풀게. 내가 보는 눈이 없었네.”

그들이 화정을 취하려 시도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확신도 기약도 없다. 이대로면 몇 달이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때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면 그중 한 곳이 천화서고다. 그런데 눈앞에 있음이 아닌가.

“그렇습니까?”

“진심이네. 경솔했고 알아보지 못했네. 마음을 받아주게.”

“하하, 좋군요. 이제야 순서대로 가는군요.”

“어?”

허월이 놀랐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네. 이 노부가 순서를 지키지 못했네.”

대화가 바로 진전되자, 허월이 웃고 모산이 웃었다.

한편으론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거절의 이유가 터무니없이 단순하지 않는가. 그저 순서. 사과 한마디 없이 모산은 부탁과 요구부터 한 것이다.

떠올려보니 지난 밤에도 그랬다.

대공자는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겠노라 손을 내밀었다. 그걸 모산은 매몰차게 거절하고 실력행사까지 했으니, 떠올리는 것만으로 잠시 얼굴이 화끈거린다.

- 장문인. 그가 길을 찾거든 모산은 보답을 해야 할 듯하네.

- 네, 사형.

태상장로와 장문인이 전음을 나눴다.

보답은 손해가 아니다. 가치있는 일을 더 빛낼 뿐이다. 답례로 ‘오행기’가 어떠냐는 말이 나왔고, 허월도 동의했다.

그때 천공단주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장문인, 무엇을 찾고 계신지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네.”

더는 숨겨야 할 이유가 없다.

허월은 화정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

화정은 불의 정화.

이는 과거 오백 년 전의 기인 열폭존자(熱暴尊者)의 유산이다.

태우지 못할 것이 없고, 그 앞에서 녹아내리지 않는 것이 없는 양의 기운이다.

모산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추측뿐임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읽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찾아낸 지점에서 모산은 이곳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쯤에서 후공은 궁금해졌다.

“처음 지점은 어찌 찾아내셨습니까?”

“천지의 기운을 탐지해내는 진식이 모산에 있네.”

“오호! 드디어 해낸 것이로군요.”

후공은 환하게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대견한 것이다. 예전에 허월에게 들었던 모산이 도전하고 있는 여러 일들 중 하나가 진식을 통한 천지기운의 탐지였다. 이게 된다면 영물과 영초, 또는 기물의 좌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당시엔 잘해보라는 말로 지나쳤는데 결국 해낸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술법의 모산이 아니라 의지의 모산이었다.

하지만 장문인 허월의 표정이 이상하다.

뚱하니 의문에 차 있었다.

“대공자, 자네는 꼭 어째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구만.”

“크흠.”

후공이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을 때, 은앙개가 킥킥대며 방패로 나섰다.

“장문인, 그런가 보다 하세요. 우리 두목이 한 번씩 그래요. 다 아는 척하는 습관이 있어요. 어떨 땐 나이불문하고 반말도 하고 그러니까 적응하세요.”

“적응해야 하는 겐가?”

“하하, 그게 여러모로 좋답니다.”

후공이 ‘크흠!’ 하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어 장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 한데 이곳을 바로 찾아내지 못하신 걸 보면 탐지 진식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바로 아는군. 그렇네. 작용을 위해선 강력한 영기를 지닌 각각의 오행의 기운을 소모해야만 좌표를 얻을 수 있네.”

그런데 문제가 있다는 말이 이어졌다.

막상 찾아낸 것보다 준비하고 소모한 것이 더 값어치가 나가는 경우가 많고, 가끔 됐다 안 됐다 한다고 했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됐다 안 됐다라니, 역시 모자란 놈들답다. 그런 모자란 놈들이 그러다 화정이란 걸 찾아냈으니 얼마나 들뜨고 흥분했겠는가.

“장문인, 화정은 모산의 것이 될 겁니다.”

“하하, 고맙네. 며칠 정도 걸릴지 모르겠군. 자네의 능력이라면 열흘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네만.”

.

.

.

일다경(15분) 걸렸다.

그르르르르르릉.

동굴 안 석문이 열려간다.

“이, 이게…… 왜……?”

허월의 동공이 미친 듯 춤췄다.

오늘은 살펴보기만 하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세나, 라고 말하던 중이라 더 놀라버렸다.

모산의 장로들도 뛰어들어와 소란을 떨었다. 동굴에 들어간 건 분명 살펴본다는 의미였는데 그르르릉 소리가 나버리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왜 열리는 것입니까?”

“이리도 간단한 것이었단 말입니까?”

“방 장로, 그럴 리 없지 않소!”

그사이 후공의 시선은 석문 내부로 향했다.

텅빈 석실이었고, 또 하나의 석문이 정면으로 보인다.

“하나 더 있군요.”

모산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석실을 살피고 새롭게 나타난 석문을 열 방도를 찾았다. 하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막막해졌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강력한 진법이 석문을 두르고 있음이다. 문제는 진법의 흔적은 보이나 진법의 실체에 다가갈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후공은 찾아냈다.

자신의 의식은 깊고, 이 몸의 두뇌는 상상을 초월한다.

“잠시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모산이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후공은 석문과 그 주변에까지 부드럽게 기를 쏘아보냈다. 기운은 부딪히며 돌아와 그 반향으로 진법의 성질을 확인해주었다.

각각의 요소들. 생사진변(生死進變), 그리고 목금화수토의 오행(五行)이 지닌 특성 중에서 의미하는 바들. 어떤 건 색의 의미로, 어떤 건 동서남북 중 방위를 가리켜오고, 특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것들이 몰입 속에서 답을 찾아갔다.

획이 되어 간다. 글자가 되어 가고, 의미가 되어 간다. 이윽고 몰입에서 나와 석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첫 지점에 닿는 손가락에 찾아온 감각은 물에 잠기는 느낌. 그 상태로 방위에 따라 크게 글자를 써내려갔다. 정확한 지점, 정확한 위치여야 했다.

획이 그어지는 중에도 손가락은 물을 휘젓는 감각이 유지되었다. 그렇게 적어간 글자는,

화원(火願).

마지막 획을 마쳐갈 때, 손가락을 휘감던 감각이 옅어졌다가 이내 흩날리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르르르르르르릉.

두 번째 석문이 열려갔다.

“어……!”

“……??”

이쯤 되자 모산은 경악을 넘어 경외.

말을 잃었다. 글씨를 남겨야 한다는 것도, 그 글자가 왜 화원이 되는지도, 눈으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으니 경외가 되는 건 당연했다.

“장문인, 이제 된 듯합니다.”

석문 안쪽은 확연히 다른 풍경.

드넓은 석실이었고, 천장에는 야명주가 빛을 뿜고 있었다.

무엇보다 석실의 끝 지점에 암석이 있고, 그 위로 호롱불처럼 하나의 불꽃이 돌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대공자, 우리와 함께 들어가세.”

허월이 권했다.

허월과 모산은 더 이상 숨길 것도 경계할 것도 없었다. 신뢰는 당연했고, 심지어 존경하는 마음이 들 지경인 것이다. 또한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었다.

“저 혼자 말입니까? 조금 무섭군요.”

“하하하!”

허월과 장로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자의 말하는 재주는 신통한 것이다. 몇 마디 나눠 보니 이젠 알 것 같다.

그가 무서울 리가.

팔괘의 곤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자다.

대공자의 말뜻인즉 천공단도 함께 들어가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는 천공단에게 여러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어 하는 듯하다.

원래라면 거절이 당연한 일이나 거절할 수 없다. 그가 길을 안내했고, 그가 없었다면 이 문은 오랫동안 막막했으리라.

“천공단과 함께라면 자네의 무서움도 덜어질 것 같네만, 어떤가?”

“아무래도 든든하지요.”

“하하, 그렇게 하세.”

*

그르르르르릉.

육중한 석문이 봉인되듯 닫혔다.

동시에 천장에 박힌 야명주의 빛도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의 빛은 남았다.

커다란 암석 위에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모두가 숨죽인 채 그 불꽃을 바라봤다.

모산만큼이나 천공단도 예의를 갖추고 엄숙함을 유지했다. 천공단도 안다. 기연의 순간이며 모산에게 있어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자신들은 기연의 참관인.

모두 이런 참관은 처음이었다. 천공단이 되면서 처음인 것이 너무 많다. 천공단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표를 내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감격으로 젖어갔다.

그때 들려왔다.

[연자여, 반갑노라.]

근엄한 음성이 석실 내부를 휘돌았다.

[본좌는 열폭존자라 한다.]

모두 놀라며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 없다. 이는 산 자의 목소리가 아닌 터. 과거의 음성, 석실의 진식을 통해 남겨놓은 목소리일 뿐이다.

[그대 앞에 놓인 불꽃은 화정. 화정으로 시작된 불의 정화는 모든 것을 불태울지니 연자는 나서거라. 그 힘을 취하라.]

모산의 장문인 허월이 불꽃 앞에 섰다.

열폭존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손을 내밀어 취하라. 연자여, 불을 삼켜라. 화정이 널 인도할 것이다.]

허월이 정갈한 태도로 그 말을 따랐다.

불꽃을 향해 손을 뻗어 화정의 불꽃을 손으로 잡았다.

“아…….”

전혀 뜨겁지 않았기에 허월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곤 이내 화정의 불꽃을 입에 넣어 삼켰다. 상단전을 지나 중단전에 이르러 머물렀고, 그 지점에서 화정이 따스한 기운을 전신 경맥으로 흘려보냈다.

[연자여, 화정을 취하였는가. 그렇다면 이제 시작이다.]

‘이제 시작이라고?’

허월이 갸웃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축하의 말을 하려던 차에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후공만은 그 뜻을 이해했다.

‘기묘하게 흘러가는구나.’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석실의 문이 닫힌 순간 알아차렸다.

갇힌 것이다.

나갈 방도를 찾아 은밀히 기운을 쏘아보내며 진식을 읽어나갔으나 방법이 없었다. 시작이란 의미는 분명 나가는 방도까지 포함된 의미일 것이다.

‘열폭존자라……. 뭐하는 놈인가?’

강제로 돌파하는 것에는 분명 대비를 해놓았을 터.

그 순간 석실에 변화가 찾아왔다.

구구구구구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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