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기물.
변화는 석실의 중앙이었다.
구구구구구구궁…….
석실이 흔들린다. 이어 바닥이 뚫리면서 원형의 기둥이 솟구쳐올랐다.
쿠웅!
기둥은 키 높이쯤에서 멈췄다. 둘레가 제법이었다. 사람이 두 팔로 감싸안아야 할 정도로 육중했다. 색상은 잿빛이었고, 표면은 매끄러웠다.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한 조각 문양조차 보이지 않는다. 열폭존자의 목소리도 이어나오지 않는 상황.
“이, 이건 또 무슨 조화입니까?”
누군가가 더듬거린 걸 시작으로 석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모산과 천공단 가릴 것이 없었다. 허월도 당혹스러운 안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후공도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의미는 달랐다.
‘기묘하구나. 고열(高熱)을 품고 있다니…….’
의식을 퍼뜨려 살핀 결과였다.
원형의 기둥은 불덩이였다. 열이 주변으로 방사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석실의 온도는 그대로요, 뜨거운 기운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의식이 말해온다.
엄청난 고열을 품고 있다고. 그러니 기묘하다. 방사되지 않는 열체. 가히 기물이라 할 만했다.
“모두 멈추십시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모산과 천공단이 기둥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기에 소리쳐 멈춰 세웠다. 천공단은 즉시 뒤로 물러났지만, 모산은 멈추었을 뿐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공자,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아직입니다. 모산이 허락한다면 제가 먼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허락이란 말은 당치 않네. 내가 부탁함세.”
허월이 도리어 청해 왔다.
장로들도 이견은 없었다. 이 석실에 들어오기까지 대공자는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찾지 못한 길을 찾은 이. 누군가 살펴야 한다면 그건 대공자였다.
후공이 원형 기둥 앞에 섰다.
기둥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닿았다. 역시나였다. 순간 엄청난 고열이 손을 태워간다.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일고, 동시에 강한 반발. 슬쩍 손을 떼어 반발을 흘리고 다시금 지그시 손을 가져갔다.
‘크흠, 굉장하구만.’
후공은 뚱하니 인상을 찡그렸다. 용암에 손을 집어넣는다면 이러할까. 통증이 극심하다. 살이 타들어가고, 뼈까지 녹아내리는 느낌.
분명 그러한데, 기묘하다. 살이 타는 연기도 없고, 타는 냄새도 없다. 손은 멀쩡했다.
이내 손을 뗀 후 손바닥을 살폈다. 어느 한곳 짓무름조차 없었다.
이 열기는 무엇인가? 환각인가?
사람의 감각은 쉽게 속는다.
눈은 환영에 속고, 귀는 환청에 속는다.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진법마다 환(幻)의 묘용을 가미한다.
이 기둥 자체가 진법 덩어리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확인해보자.
손을 다시 가져갔다. 반발, 그리고 타는 통증.
그 상태에서 의식의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의식을 객관화한 후, 감각에 왜곡이 오는지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정녕 기물이로구나.’
왜곡은 없다. 이 열기와 고통은 실재.
손을 거두고 석실을 빙 둘러봤다.
열폭존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바랐지만 여전히 고요할 뿐이다.
‘말을 안 하네.’
설명을 하다 말고 입을 닫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후공은 열폭에 대한 기대를 접고 허월을 바라봤다.
“장문인.”
“듣고 있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뭘 먼저 듣고 싶냐는 물음임을 이해한 허월이 바로 답했다.
“매를 먼저 맞는 것이 낫지. 나쁜 소식부터 듣겠네.”
“갇혔습니다.”
“응?”
“이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도무지 찾아낼 수 없군요.”
나가려면 밖에서 열거나 부숴야 한다.
후공은 갇혔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부수고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물의 신비함을 접하고 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곳을 설계한 열폭존자는 매우 뛰어난 자. 기물이 그렇고, 과거의 음성을 남긴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뚫고 나가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 경우 예측하기 힘든 위험이 닥쳐올 가능성이 높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허월이 놀라 눈이 커졌다. 놀란 건 다들 마찬가지라 일순 소란이 일었다.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면 콧방귀를 뀌었을 테지만, 말한 이가 천화서고 대공자다. 무게감이 말로 할 수 없다.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내 좋은 소식이 남아있음을 생각해낸 허월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대공자. 좋은 소식은 뭔가?”
“우리 가운데 화정을 취한 자가 있다는 점입니다.”
“응?”
후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기둥이 나타난 건 화정을 지닌 자가 거쳐야 할 관문으로 보입니다. 시험의 의미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열폭존자가 이제 시작이라고 하였으니 이 기둥을 통해 화정이 증폭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기둥은 기물입니다. 마치 용암과 같이 고열을 품고 있는 불덩이입니다.”
“이 기둥이 말인가?”
허월이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만이 아니다. 당연했다. 열기가 전혀 없는 것이다. 모산의 태상장로가 너털거렸다.
“허허, 대공자! 이 와중에 농담을 다 하고, 그대의 배포는 알아줘야겠군.”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모두 본 것이다. 방금 전 대공자가 손을 기둥에 가져가댔고,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다. 살짝 언짢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니 농담이었다.
“대공자, 고열이라니, 농담은 넣어두고 제대로 이야기해 보게.”
태상장로가 연신 너털대면서 성큼 한 걸음 나아갔다. 그가 기둥에 오른손을 가져다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발작적으로 비명을 터뜨림과 동시에 반발력에 의해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가떨어진 뒤에도 오른손을 움켜쥐고 지렁이처럼 미칠 듯이 꿈틀거렸다.
“으아아아악, 시발…… 내 손이…… 내 손이 타들어가아아아아아아!”
지켜보는 모두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손은 멀쩡한 것이다. 하지만 근엄하기 짝이 없는 태상장로가 욕까지 하며 연기를 할 리 만무하니 거짓일 리 없었다.
팔괘금쇄진에서 곤에 자리에 있다가 날아가 처박힌 그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스스로 꾸며댈 리가.
“그니까 단주가 말을 하면 그냥 믿으라고 좀!”
금적자가 태상장로에게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도 단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기반성을, 남을 꾸짖으면서 하는 금적자였다.
어쨌든 고열은 증명.
왜 대공자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고 허월이 입을 열었다.
“화정을 취한 나는 다를 것이라는 건가?”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모두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장문인 손에 달려있는 듯합니다.”
“어…….”
얼떨떨해하는 허월에게 후공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염려 마십시오. 잘 해내실 겁니다. 일단 목소리를 기다려보죠.”
“그러지.”
일다경 후.
열폭존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연자여, 보았는가. 큰 변고가 없다면 그대 눈앞에 원형의 기둥이 솟아나 있으리라. 이는 열주라 한다.]
“왜 이제 왔어요? 잠깐 어디 다녀온 거예요?”
“멍청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거야?”
은앙개의 대답에 소천개가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이런 기연의 현장 처음인 탓이다.
열폭존자의 음성이 이어졌다.
[연자여, 그대는…… 없다.]
왜인지 말이 중도에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기둥은 용암과 같다. 아니 용암보다…… 하다. 그대는…… 한가. 그대는 결코…… 벗어날…… 없다. 하하하하하, 낙담할 건 없도다. 유일한 길…… 화정을 지닌 자…… 버티면 된다. 좌우 장심을 가져가라. 화정을 얻었기……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유효한 시간은 반시진(1시간). 그대는…… 이다. 석실의 문은 열릴…… 다. 하지만 버티지…… 영원히 나갈 수 없다.]
목소리에 생략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수백 년 세월의 영향일 터.
그럼에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대공자가 미리 이야기해준 내용과 거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허월의 어깨는 한없이 무거워졌다.
나갈 수 없다니. 대공자가 길이 없다고 했고, 열폭존자가 다시 확인해주었으니, 해결할 수 있는 건 화정을 취한 자신뿐이었다.
[연자여, 화정을…… 하라. 기경팔맥에 순환한 화정이…… 지켜줄 것이다. 열주…… 얻으라. 불의 정화 속에서…… 태우지 못할 것이……. 그대는…… 것이다. 화정은…… 인도할 것이다. 위대한 길로…… 지켜보겠노라.]
허월이 즉시 좌정했다.
받아들인 화정을 내면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운기행공을 통해 천천히 기경팔맥으로 순환시켰다.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흐른다.
운기를 마친 후 일어났을 때, 허월은 모두의 시선에서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응원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실제 그러했다.
다 같이 듣지 않았던가. 화정을 지닌 자만이 버틸 수 있고, 반시진을 버텨야 한다는 것.
‘해낸다. 반드시.’
나는 모산의 장문인이다.
어떤 고통이 몰아친다 해도 버티리라.
허월이 각오를 다졌다.
모두가 환호하는 결과를 마음에 떠올렸다.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대공자의 목소리도 마음에 새겼다.
열주에 양손을 뻗었다.
닿기도 전에 손이 빨려들듯 달라붙었다.
‘화정의 작용인가? 한데 이건…….’
허월이 갸웃했다가 미소지었다.
전혀 뜨겁지 않다. 따뜻한 정도. 딱 대고 있기 좋은 온도였다.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하하, 반시진이 무언가. 고작 이 정도면 열흘도 가능…….’
허월은 생각을 멈췄다. 미간도 꿈틀.
열기가 급격히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손을 태워버리고, 뼈를 녹여버리는 열기까지 치솟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손을 댄 채 미친 듯 몸부림쳤다.
그 광경에 모두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
“…….”
“…….”
허월의 찢어질 듯한 비명과 몸부림은 계속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피부로 와닿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으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소, 손을 뗄 수가……. 사, 살려줘어어어어! 으가가가가가가!”
‘손이 안 떨어진다고?’
게다가 급기야 비명이 구조요청이 되자 모산의 두 장로가 허월에게 다가가 떼어내려 했다. 그러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갸!”
붙잡는 것만으로 열기가 이어졌다. 손도 붙어버렸다. 덕분에 붙잡은 채 두 장로도 몸부림쳤다. 이제 몸부림은 셋. 비명도 셋.
그 광경에 뭐하는 짓이냐며 비웃은 금적자와 낭인왕이 떼러갔다가 몸부림이 다섯, 비명도 다섯이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살려주게에에 단주우우우우우우!”
“으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형니이이이이이이이임!”
석실은 이미 아수라장.
다가가 붙잡으면 붙어버리고 몸부림치니 다들 발만 동동 굴리는 상황.
결국 후공이 나섰다.
성큼 나아가 허월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접착되듯 달라붙는다. 극한의 열기도 전해져 왔다.
그럼 어떤가.
천천히 당겨 허월을 열주에서 떼어냈다.
그제야 비명이 그쳤고, 허월을 포함한 다섯이 기진맥진한 채 바닥에 허물어졌다. 큰 화상을 당한 것처럼 몸부림은 여전했다.
그 광경을 후공이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한심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에휴, 모자란 놈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당장은 안 될 듯하고, 이곳에서 며칠은 지나야 할 듯싶다.
*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