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화극 (2)
쿠르르르르, 쿠웅!
콰앙!
무너지고 터져나가는 상황.
천공단주의 지시.
그 말을 따라 천공단과 모산의 수뇌부는 빠르게 벗어나기 시작했다. 암벽에 이르러 신형을 던져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수월하지는 않았다. 지축이 요동치면서 암벽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탓이었다.
쿠르르르르르…….
손을 내뻗는 지점의 암석이 떨어져나가거나, 발을 딛은 지점이 무너지고 푹 꺼지기도 했다. 아찔한 상황을 몇 번이고 맞이하였다.
그때마다 서로 도왔다.
비명과 당황한 목소리가 돕는 손길에 의해 매번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금적자는 제일 뒤쪽에서 오르며 모두를 살폈다. 그는 모두를 이끌라는 천공단주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다.
진행은 더뎠지만 낙오자는 없었다.
그렇게 천공단과 모산이 분화구 위로 올랐다. 모두가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잠깐 사이에 아래쪽 광경은 크게 달라져있었다. 매 순간 심각해져 갔다.
지반이 갈라지고 무너져가면서 용암이 범람하고 있었다. 암벽의 부서짐은 더욱 가속되고, 열양화리를 낚아 올렸던 연못도 용암의 붉은 물결에 뒤덮였다.
용암의 범람이 무릎 높이가 되어 동굴로도 밀려들려 했기에 모두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근심의 말이든 희망의 말이든, 어느 쪽 이야기든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럴 때가 있다.
희망의 말을 하면 꼭 반대로 될 것 같고, 근심의 말을 하면 말대로 될 것 같은 때. 지금이 그랬다.
또 어설픈 위로는 안 하니만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말들은 그저 스스로 마음 편하자고 하는 말임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먼저 인내심을 잃은 건 모산이었다.
- 장문인,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 동감이외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장 대공자를 구하러 가야 합니다.
- 이런 추세라면 기둥의 억제력이 화산 폭발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산의 장로들이 앞다퉈 전음을 보냈다.
기둥의 억제력에 관한 말들.
장문인 허월이 내심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인들 어찌 모르겠는가.
신비한 공능을 지닌 기둥 탓에 화산의 막대한 분출이 억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정 높이에서 솟구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둥을 제어하는 이는 천화서고 대공자.
뼛속까지 스며드는 열기를 버티며 머물고 있다.
분명 대공자가 손을 떼게 되면 기둥의 제어력은 상실되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빠져나갈 때까지 대공자는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터.
하지만 언제까지 그래야 하나?
대공자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후의 대응책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 어떻게 하면 좋은가. 몇 날 며칠이고 저대로 대공자를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허월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모산은 친구를 버려두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어려울 것 없다. 화산 폭발보다 더 빠르게 벗어나면 그만이다. 버티고 있느라 탈진했을 수도 있는 대공자를 안고 신속히 빠져나온다.
그렇게 허월이 의기를 드러내려 할 때였다.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산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도록.”
금적자였다.
금적자가 모산의 전음을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산 지도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걸 보면 짐작하게 된다.
허월이 돌아보며 미간을 좁혔다.
곧바로 항변하려 했지만 그보다 항마삼협의 코웃음이 빨랐다.
“천공단이 가만히 있는데 모산이 나서겠다고?”
“모산이 감히 형님의 명을 어기겠다고?”
“누가 보면 모산이 천공단인 줄 알겠군.”
심지어 이열은 살기까지 띠고 바라볼 정도였다.
허월이 큰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자는 게요!”
“그래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허월이 천공단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지는 않을 터. 천공단에서 모산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의사를 표해주시오!”
곧바로 여기저기서 천공단이 화답했다.
스릉!
스릉, 스르릉!
남궁연과 언교운이 모산을 향해 검을 뽑아들었고, 낭인왕이 도를 빼들고 허월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태도는 명확했다.
당장이라도 모산을 공격할 태세.
어떤 목소리보다 더 큰 답변이었기에 모산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허월과 장로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천공단을 바라봤다.
대공자의 곤란함은 모산을 돕다가 생긴 일.
모산은 대공자 덕분에 화정을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천공단이 책임에 대해 추궁하며 자신들의 등을 떠밀어도 모자랄 판인데, 도리어 못 가게 가로막고 있는 형국.
도대체 천공단은 뭐하는 자들인가.
천공단은 모산이 위험한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려 애써 모진 태도를 보이고 있음이니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장문인, 이해하려 애쓸 필요 없습니다. 두목이 하는 일들은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닙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남궁연이 태연히 답했다.
처음 따라다녔을 때부터 이해되지 않은 것투성이었던 남궁연이다. 그러다 결국 이해하려는 걸 포기하자 도리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할 길은 멀었지만, 두목의 말을 따르는 것이 가장 이롭고 현명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건 천공단 모두가 같았다.
천공단은 아는 것이다.
단주가 보여온 것들.
답이 없는 길에서 단주는 답을 찾았고, 길을 열어왔다. 막막해 보여도, 또 막힌 것처럼 보여도 단주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빠르고 명확한 길임을 보아온 터.
‘마음은 알겠지만…….’
답답해진 허월의 시선이 구원을 바라듯 제갈혜를 바라봤다.
“제갈군사도 그리 생각하는 게요?”
제갈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겪고 느낀 바라면 천공단 못지않은 제갈혜다.
어떤 면에서 체감한 바는 더 크다.
“장문인, 만약 대공자에게 수단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나서는 건 그것이 누구라도 걸림돌이 될 뿐이에요.”
‘수단이 없다면?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허월은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불길한 말인지라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공자는 길을 찾아낼 거예요.”
제갈혜가 그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걸 끝으로 모두가 입을 닫았다.
하지만 색관조는 아니었다.
[주인님…….]
분화구 위를 선회하며 정신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색관조는 알 수 있었다. 주인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색관조는 주인이 꼼짝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이제…… 나오셔야 하잖아요. 왜 가만히 계세요…….]
더 늦으면…….
더 시간이 지나면…….
[그윽.]
가보자, 라고 금섬이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색관조가 날개를 펼쳐 분화구 아래로 향했다. 뒤쪽에서 소천개와 은앙개 그리고 언교운 등이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색관조는 듣지 못한 척했다.
날갯짓 두어 번.
색관조에겐 그것이면 충분했다. 어느샌가 용암의 불꽃과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를 뚫고 동굴 앞에 이르렀다.
하지만 동굴로 진입할 순 없었다.
“멈춰라.”
동굴 안쪽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
주인의 목소리였다.
[주, 주인님?]
[그윽?]
“돌아가거라. 잠시 후에 보자.”
[…….]
색관조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머뭇거렸다.
‘웃기는 녀석 같으니.’
색관조도 알지만 후공도 안다. 천향으로 이어져 있기에 후공도 색관조의 망설임을 읽을 수 있었다.
한 번씩 느끼는 것이지만 이 시끄러운 수하는 가끔 사람처럼 굴어 웃음이 난다.
“들어라.”
[……?]
“시간이 없다. 잠시 후 큰 폭발이 있을 것이다. 분화구 부근에 있는 건 위험하니 더 멀리 물러나있어야 한다고 모두에게 전해라.”
[주인님은요?]
“네가 나의 시간을 쓰고 있지 않다면 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겠지.”
[어…… 그런 거예요?]
“그래.”
색관조가 알아들었다.
주인의 목소리가 태평했기에 마음이 크게 놓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튼소리를 할 주인이 아니다. 바로 날갯짓하며 분화구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색관조가 멀어져가는 것을 인지하며 후공은 기둥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두의 안전이 확보된 상황.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기둥이 원하는 바,
열폭존자가 바라던 바는 이제 시작이다.
이미 기둥에 글귀가 떠오르고 있다.
- 연자여. 화정의 안내를 받은 자여. 화극(火極)에 이를 자여! 그대가 이 글귀를 보고 있다면 그대는 화극에 이르리.
예상대로 허월이 먼저 취했던 화정은 화극이란 것을 위한 교량 역할이었다.
기둥에 떠오른 글귀가 이내 날아가듯 지워졌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 화극은 불의 정점. 끝없는 불길이며 불의 정화 중의 정화. 그대는 영원한 불꽃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다시금 흩날리는 글귀들.
신비하기 짝이 없는 광경.
하지만 후공에겐 쓸데없는 멋짐이었다.
‘느려!’
하지만 그런 마음 한편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기경팔맥을 맴돌고 있는 삼악의 기운이 화극을 먼저 감지하고는 반기듯 크게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악과 화극의 상성이 좋다는 의미다. 화극이 그만큼 순수한 기운이란 뜻이기도 했다.
- 연자여, 이제 시작해보자. 화극을 받아들이는 요결은…….
주루륵, 기둥에 요결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빼곡하게 일곱 줄가량의 요결.
한눈에 담은 후공은 요결을 분석했다. 무학의 이치에 통달한 천하제일인의 인지다. 요결은 빠르게 더해지고 변형되었다.
‘수정…… 삭제…… 수정…… 수정…….’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부분은 걷어내고, 미진한 부분은 수정했다. 요결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글귀가 떠올랐다.
- 연자여, 이제 화극이 장심을 타고 흘러들 것이다. 큰 충격이 전해질 것이나, 놀랄 건 없다. 요결을 따라 운기한다면 버티는 건 어렵지 않다.
날아가듯 글귀가 지워진 후 장심을 통해 열기가 밀려들었다. 충격은 없었다. 수정한 요결로 그저 따스하고 안온할 뿐이었다. 스며든 열기를 삼악의 기운이 달려들며 반겼다.
콰앙! 쾅! 콰앙!
화극과 삼악이 만나면서 내부에서 기운이 폭발했다.
화극으로 인해 삼악의 기운은 마치 양분을 받아들인 것처럼 증대되면서 기세가 폭증했다.
마치 독양충의 먹이인 풍열이나 육각망의 먹이인 공청석유를 받아들였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기에 후공은 크게 기뻐했다.
‘모자란 녀석들이 이런 도움을 줄 줄이야.’
화극이 삼악에 잡아먹힌 건 아니었다. 양분으로서 작용하는 한편으로 독립적인 기운으로 존재했다.
- 연자여, 이제 화극을 운용할 요결이다. 화극의 성취 단계는 구주(九周)…….
이내 운용 요결이 빼곡하게 기둥에 떠올랐다.
후공은 방대한 분량의 요결을 훑어가면서 다시금 분석하기 시작했다.
‘구주일 필요가 없다. 삼주면 충분하겠군. 아니 그 전에…….’
그 시점에 문제가 생겼다.
기둥에 내재된 화극을 받아들이면서 기둥의 억제력이 소실되었다. 그 탓에 딛고 있는 지반이 무너져내리고 용암이 순간 허리 높이까지 솟구쳐올랐다.
‘환명!’
기둥의 역할은 끝. 더 이상 기둥을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에, 환명을 위쪽에 띄운 후 거의 천장 높이까지 솟구쳐 신형을 디뎠다. 발밑으로 용암이 삼킬 듯 솟구쳤다가 낮아졌다.
당장 밖으로 나가는 건 무리였다. 동굴 입구 쪽으로 용암이 홍수처럼 범람하며 밀려들고 있었다.
출렁이며 덤벼드는 용암을 일곱 개의 환명으로 방어했다. 찰랑이는 용암은 환명을 뚫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환명만으로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환명의 유지 시간이 그렇고, 용암이 차오르는 속도를 볼 때도 임시방편일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까지 차오를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불의 정화 중의 정화인 화극으로 돌파한다.
즉시 구주의 요결을 삼주로 축약해나갔다.
축약된 일주에만 이르면 화신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수정, 수정, 수정, 수정, 수정, 삭제, 수정……, 수정, 수정, 수정, 삭제…… 수정…… 수정……, 수정……, 수정…….’
그렇게 새롭게 정립된 화극의 요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음인가. 용암의 물결이 환명을 부서뜨리면서 몸을 덮쳐왔다.
용암이 눈앞으로 뻗어오며 집어삼킨 순간,
‘화극 일주! 화신(火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