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82화 (182/460)

182화. 화신의 위용.

쿠구궁!

화산이 폭발했다.

분화구 위로 잿빛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들끓는 붉은 용암이 분출하며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천화서고 대공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괜찮아.’

제갈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산을 내려와 먼 발치에 일행과 함께 바라보는 중.

‘그때와 같을 거야.’

멸천존자의 손에 천길 낭떠러지로 던져졌을 때도 희망이라곤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천화서고 대공자가 날아왔다.

그때와 같을 거야, 그때와 같을 거야. 해낼 거야. 그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제갈혜는 그렇게 계속해서 마음을 다독였다.

“흐흑흑…….”

곁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천산의 후인 설영이었다. 설영은 입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울먹이는 소리는 새어나왔다. 제갈혜는 울지 말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자신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알았을까.

대신하는 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들 똑똑히 들어요! 절망은 금지야! 좌절도 금지! 다들 알잖아. 형아는 천공단주야! 천공단주는 무적이라고!”

소천개였다.

씩씩한 목소리에 은앙개가 핀잔을 던졌다.

“멍청아, 울면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울긴 누가 울어! 거지새끼야!”

소천개가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면서 악을 썼다.

은앙개가 피식 웃고는 소천개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소천개는 사형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은앙개의 눈시울도 용암을 닮아갔다.

모산의 탄식이 터져나오고, 천공단이 망연자실 바라보는 가운데, 한순간 불꽃 덩어리 하나가 분화구의 연기를 뚫고 솟구쳐올랐다.

모두의 눈이 그 불꽃을 향했다.

“어……?”

“뭐, 뭐야?”

“형님?”

“두목?”

다들 놀라 소리쳤다. 불꽃이 기이한 탓이었다. 여태 튀어오르던 용암의 불꽃들과 궤적이 달랐다. 적당히 튀어오르다 포물선을 그리며 하강해야 마땅한데, 이번 불꽃은 창공을 향해 그대로 쭉 나아가는 것이다.

짐작이 확신이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불꽃 덩이가 허공의 한 지점에 우뚝 멈춘 탓이었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니까. 무엇보다 멈춰선 불꽃의 형태가 사람의 모습이라면, 불길 속의 모습이 천공단주로 보인다면 더 이상 의문은 필요없었다.

“대공자아아아아아!”

모산의 장문인 허월이 크게 외치고,

“단주, 왔구만!”

“하하하하하! 형님, 믿고 있었습니다!”

“형아아아아!”

“두목 놈아아아!”

“두목, 뭡니까! 늦으셨습니다!”

하나도 믿고 있지 않았으면서 걱정 같은 거 안 하고 있었던 것처럼 천공단이 비로소 웃음을 띠며 반겼다.

제갈혜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여태 얼마나 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비로소 안심이 된 순간 힘이 쭉 빠졌다. 터지려는 눈물만 애써 참아냈다.

[주인님! 주인님!]

[그윽!]

환명을 딛고 허공에 선 후공 곁으로 색관조가 날아왔다. 색관조는 미친 듯이 후공 주변을 돌며 소리쳤다.

[주인님, 아직 몸에 불이 붙어 있어요! 빨리 불을 꺼야 해요!]

어수선하기가 말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 만했기에 후공으로선 탓할 순 없다. 색관조만 아니라 현재 모두에게 보여지기로 자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파란 불길에 휩싸여있는 것이다.

후공은 말없이 미소만 지어보였다.

이는 화극일주의 화신(火身).

호신강기처럼 화신의 푸른 불꽃이 온몸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용암의 물결, 그 고열 속에서 드러난 화신의 공능은 놀라웠다. 용암은 화신을 뚫지 못했고, 후공은 용암의 늪 안에 놓여 있었으면서도 따스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헤쳐나오면 그만이었다.

주인의 미소를 보며 영특한 색관조는 바로 기이함을 알아차렸다. 불꽃이 일렁이나 불타지 않는 주인의 옷.

[주인님, 왜 옷이 타지 않는 걸까요오오오오! 머리카락도요오오오오!]

[그으으으으으윽???]

눈이 휘둥그레진 색관조와 금섬의 모습에 후공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어 시선을 돌려 모산을 일견했다가 천공단 쪽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냈다.

“조금 늦었습니다. 한데 다들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설마하니 천하의 천공단이 단주를 못 믿고 눈물 질질 짜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요?”

“하하하하!”

“형님, 우린 노래 부르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렴, 형아! 그럴 리 없잖아! 나는, 나는 그니까…… 방금 하품해서 그런 거야. 근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하품이 계속 나네!”

마지막으로 소천개가 둘러대고는 맘껏 울었다.

**

객잔의 이 층.

후공은 모산 지도부만 따로 불러 자리를 가졌다.

객잔 안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화산 폭발에 놀라 인근 마을 전체가 대피한 터라, 객잔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텅 비었다.

“……그리되었습니다.”

모산에 말을 전했다.

전한 말은 화극에 관한 것.

모산이 찾고 모산이 취해야 할 것을 자신이 취하게 되었노라 말해주었다.

그렇게 말을 마쳤을 때, 모산 장문인 허월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건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후공은 미소를 머금었다.

“장문인, 괜찮습니까?”

바로 허월이 역정을 냈다.

“괜찮냐고?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너무하는구만!”

“제가 너무했습니까?”

후공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허월은 몰라보지만 후공은 허월을 안다. 그렇기에 모산의 반응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산을 업신여기지 말게! 본문을 은혜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잡배 취급하다니, 고약하구만! 자네가 아직 어리고 강호 경험이 없기에 이번 한 번은 이해하고 넘어가겠네만, 다신 그런 소리 말게.”

“하하하, 그런 뜻이었습니까. 말씀대로 제가 아직 어립니다.”

후공은 모산을 알고 허월을 안다.

여러모로 모자란 놈들인 건 분명하지만, 도리를 모르는 이들이 아니다. 이미 천공단을 통해 모산이 구출하려 몸을 던지려 했다는 것도 들은 터였다.

“흥! 아니까 다행이군. 그나저나 화극이라고 했나?”

“네.”

“축하하네!”

“덕분입니다.”

“솔직히 배는 조금 아프구만.”

“하하하!”

허월이 짐짓 새침한 척하며 꺼낸 농담에 후공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산도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다.

동굴 안에서 보낸 시간. 돌이켜보면 대공자는 화정 너머의 기연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던 듯하다. 동굴에서 왜 그토록 모산을 다그쳤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모산이 얻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지. 온전히 모산에 기회를 주려 부단히 애쓴 것이다. 너무 고통스럽고 타버릴 것 같아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데도, 대공자는 모질다 싶을 정도로 몰아붙였었다.

화정을 뛰어넘는 기연, 이제 와서 알게 된 화극이란 이름의 그 기연을 모산이 얻어가길 대공자가 바랐던 시간이다.

급작스러운 화산 활동에서야 비로소 대공자는 나섰고, 이후에는 모두가 무탈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까지 했다. 애초에 대공자가 없었다면 들어갈 수도 없었고, 들어갔다 해도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러니 시샘할 수 있을 리가.

그러니 원망할 수 있을 리가.

그저 모든 보물은 주인이 따로 있음이겠지. 자격에 대해 말하자면 대공자는 차고 넘쳤다.

모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대공자와 모산이 연을 맺게 된 것을 흡족히 여겼다.

하지만 후공은 이 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장문인.”

“듣고 있네.”

“화정을 다룰 요결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화정과 화극은 한 뿌리.

비록 화극에 비해 화정의 공능은 백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건 화극에 견주었을 때의 이야기. 화정의 불꽃도 충분히 위력적인 면모를 발휘할 수 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허월이 놀라 더듬거렸다.

장로들도 누구 할 것 없이 눈이 커졌다.

요결이란 것이 어디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인가.

“들으신 대로입니다. 본래는 화극의 요결이나 화정에 맞게 제가 조금 손을 보았습니다. 또 자체적으로 검증은 마쳤습니다. 문제라면 모산이 저의 검증을 믿느냐, 안 믿느냐 정도로군요.”

“믿네. 믿고말고!”

허월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천공단주가 보인 바가 어디 한둘인가. 모산의 회도진을 순식간에 돌파하였고, 둥실 떠오른 경신술에다, 또 팔괘금쇄진의 곤의 자리를 단번에 차지하고 파훼한 자이다. 그 뒤의 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화극에 대해 왜 굳이 이야기를 꺼내나 했는데 비로소 이해되었다. 요결을 전해주려는 의미였다.

그래서 의아하다.

이 청년은 왜 이렇게 모산에 호의를 보이는 건가.

알 수 없다.

모르면 어떤가. 보았고 직접 겪었으니 그것이 전부.

“대공자, 고맙네. 혹시 이 노부가 이 요결로 연공하여 화정으로 화신에 이르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요결의 전수를 마치자, 허월이 감사를 표하며 물었다.

“장문인께선 1년 정도 예상됩니다.”

“그렇게나? 자네는 바로 화신을 이루었잖나?”

“크흠…….”

분위기 좋은데 ‘사람이 다르지 않느냐’라는 말은 차마 꺼내기가 뭐해서, 후공은 침음성만 흘렸다. 솔직히 모산 최고의 재능이라는 허월이라서 1년이지, 다른 이라면 더 걸릴 수도 있었다.

그 정도 반응만으로도 허월은 의미를 이해했고 그래서 시무룩해졌다. 오래가진 않았다. 털어내듯 고개를 저어대고는 입을 열었다.

“대공자, 이제 어디로 가나? 낚시도 했으니 따로 계획이 없다면 모산으로 함께 가세. 크게 대접하겠네.”

“하하, 동굴에서 천공단과 꽤 함께 지냈는데 또 함께하고 싶습니까?”

다들 막장입니다만, 이라며 말을 끝내자, 허월이 호탕하게 웃었다.

“막장은 무슨. 모산은 천공단 좋아하네!”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구하러 나서려는 모산을 천공단이 살기등등 가로막던 모습. 그런 막장이라면 모산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다행입니다. 하지만 모산은 훗날 들러야겠습니다. 저희가 갈 곳이 있습니다.”

“어디로 또 가나?”

“낚시하러 갑니다.”

“응?”

“북해빙궁 부근에 빙어가 그렇게 맛이 좋다고 하더군요.”

“천공단이 원래 낚시 모임이었나?”

“하하하하!”

웃음이 오가는 중에 모산이 아쉬워했다.

이후에는 선물이 오갔다.

후공은 열양화리의 내단을 모산의 숫자에 맞춰 건넸다. 화리의 내단은 무산쌍웅이 챙겨왔는데, 양은 충분했다.

모산은 다섯 개의 작은 깃발을 건넸다.

깃대를 포함 한 뼘 정도의 크기였는데 이름 없이 청, 적, 황, 백, 흑, 다섯 개의 색상이었다.

후공은 갸웃했다.

이 깃발은 모산의 보물 중 하나인 오행기였기 때문이었다.

깃발의 재료는 천잠사요, 색상은 오행의 기운이 담긴 물질들로 오랜 기간 물들여 제련한 것이다.

과거 허월이 자랑삼아 보인 적이 있었다.

제련이 까다롭고 오래 걸려 모산에도 몇 개 없다고 들었었다.

갸웃한 모습을 무엇인지 몰라서라고 오해한 허월이 오행기에 대해 설명했다.

“오행의 기운으로 제련하고 모산의 술법을 가미한 오행기일세. 주변에 꽂아두기만 하면 되네. 오행기 안에 있으면 은신이 가능하지. 가능 범위는 반경 오장여 정도이나 면적이 작을수록 더욱 효과적이라네. 은신술과는 비교할 수 없고, 화경의 극에 달한 고수라 해도 오행기와 그 안의 사람을 알아차릴 수 없을 걸세.”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기의 범위 안에서는 소리며 냄새 또한 차단되니 쓰임새가 크다.

천공단의 무공 수준이 제각각이고 강호의 위협적인 칼날은 어디에서 날아들지 모르니 천공단에 도움이 될 터였다.

“기쁘게 받겠습니다.”

“하하, 자넨 정말 마음에 드는군. 사양하면 어쩌나 괜히 마음 졸였지 뭔가.”

“강호에서 만난 멋진 친구의 선물을 사양할 리가요.”

“하하하, 그 말은 더 듣기 좋구만!”

**

그로부터 이십여 일 후.

천공단은 얼어붙은 호수에 도착했다.

이름하여 만빙호(萬氷湖).

북해빙궁이 멀지 않은 곳이었고, 온통 하얀 눈과 얼음뿐인 호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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