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호수의 소녀.
천공단은 해를 보며 남쪽으로 달렸다.
멈춘 건 어느 이름모를 작은 호수였다.
사방이 눈과 얼음이란 점은 만빙호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규모 면에 있어서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담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아담한 것이!
천공단은 다시 얼어붙은 호수에 뛰어들었다.
마치 그 모습은 원래 처음부터 이곳에서 낚시하려고 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 언니!
‘……?’
설영의 전음에 제갈혜가 돌아봤다.
- 우리 왜 도망친 거예요?
강호 경험이 짧디짧은 설영이다. 다들 도망치는 분위기라 냅다 뛰긴 뛰었는데, 뛰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설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 글쎄, 나도 일단 뛰어서…….
제갈혜라고 알 턱이 없었다.
호언장담했던 대공자여서 더욱 아리송했다.
북해빙궁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도 색관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하지만 대공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왜 마음에 들어 하는지는 또 다른 의문이었다.
- 대공자가 북해빙궁과 인연이 있었던 걸까요?
설영도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 그럴지도.
- 언니가 대공자에게 물어봐요.
- 아마 물어봐도 제대도 된 대답은 듣지 못할 거야.
- 아닐걸요. 언니는 모르시나 본데, 대공자가 언니를 보는 눈빛은 특별해요.
- 나도 알고 있어.
- 어머, 어머! 어쩜 좋아!
설영이 부산을 떨었다.
- 언니도 느끼고 있었군요?
제갈혜는 쓰게 웃었다. 역시 여러모로 경험이 없는 설영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별하긴 하지. 아이 대하듯 하니까.’
물으면 대답은 뻔하다.
크흠…… 무섭잖습니까, 정도일 것이다.
그러면서 제갈혜는 시선을 돌려 대공자를 찾았다.
저만치에서 후공도 마침 보고 있었다.
혜와 시선이 닿고 눈이 마주쳤기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태연해서, 노려보던 제갈혜는 그만 웃고 말았다.
정말 모를 일이다.
왜인지 모르겠다. 제갈혜는 자신이 너무 쉽게 웃는다 싶었다.
기이할 정도였다.
기이할 것 없다.
그건 단지 후공이 잘하는 것 중 하나일 뿐.
“형님!”
“단주!”
후공이 목소리를 쫓아 바라보니 무산쌍웅과 금적자였다. 각기 손에 은빛 물고기 한 마리씩 들고 있었다. 북해의 빙어종은 중원과는 다른 것인지, 크기가 손바닥만 했다.
“빙어를 벌써 잡으신 겁니까?”
“하하, 내 나이가 나이잖나. 이깟 것 뚝딱이네.”
“형님, 저희는 원래 낚시꾼이었습니다.”
금적자에 이어 무산쌍웅이 사기꾼같이 깔깔대고는 이내 현란한 손길로 회를 뜨기 시작했다.
금적자는 무산쌍웅에게 자신이 잡은 빙어도 건네주고는 입을 열었다.
“단주, 이대로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선생께선 아쉬우신가 봅니다.”
“아쉽지. 여기까지 애써 왔으니까.”
물론 그래서만은 아니다.
아쉬움도 있지만, 금적자는 단주가 북해빙궁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 보였기에 단주의 의중이 궁금했다.
북해빙궁 면전에서 도주하며 그들에게 굳이 망가진 모습을 보인 것이며, 한 사람 한 사람 거론하고 남궁연을 지목한 건 천공단의 면면을 소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전 천공단의 소란한 등장도 마찬가지.
시작도 전에 단주가 미간을 찡그렸다면 천공단은 한마디씩 끊어서 말하는 대신 얌전히 신형을 착지하고 입을 닫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천공단은 그렇다.
첫 만남일 때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금적자는 궁금했다.
이 젊은 서생, 어린 두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정녕 천공단주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금적자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어째 북해빙궁 처자들 안색이 어두워 보였지 않나.”
“네, 그래 보였습니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금적자가 잘 보았다.
북해빙궁의 대응은 과한 면이 있었다. 아무리 외지인의 출현이라도 여유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탓에 눈앞에서 망가져주었다. 얼렁뚱땅 식으로, 대충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라고 소개한 후 자리를 벗어나주었다.
‘현음신녀가 말한 빙궁의 칠십 년 숙원이 터진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정확히는 그때로부터 어느덧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구십여 년의 숙원.
“단주,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북해빙궁은 물 건너간 듯하니 설산파로 가는 건 어떤가?”
“형님, 드셔 보십시오.”
그때 무산쌍웅이 회를 갖다 바쳤기에 후공은 대답을 미루고 빙어를 음미했다.
“하아……. 이 맛이었군요. 첫 식감은 담백한데 그 뒤에 이어지는 고소함이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찬사가 나왔기에 무산쌍웅이 좋다고 클클거렸다.
이어 맛을 본 금적자도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런 다음에야 두 사람은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선생께서 설산파와 인연이 닿아있나 보군요.”
“설산의 장문인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일세.”
“그중 선생께선?”
“물론 내가 형이네. 두 살 많아.”
“여어~~~.”
과장된 탄성을 터뜨려주자, 금적자가 껄껄거렸다.
“하하하, 그때 내가 막 후공에게 조언을 듣고 예절이며 뭐며 다 내려놓고 살기로 할 때였는데 난데없이 어린놈이 겁도 없이 시비를 걸어오지 뭐겠나. 패고 보니 설산파 장문인이었네.”
“하하, 두 살 차이라면서요?”
“두 살이면 어린놈이네. 내가 두 살일 때 태어나지도 않았잖나.”
후공은 다시 껄껄 웃고 말았다.
과묵하고 예의에 물들어있던 금적자의 옛 모습을 알기에, 매번 금적자의 말하는 것을 들으면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설산파에 신세를 지도록 하죠. 당연히 설산파의 위치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모르네.”
너무 당당해 후공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단주의 딱딱해진 얼굴에 금적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만난 곳이 하북이었거든. 이후 언제 한번 간다 간다해놓고도 멀어서 엄두가 나야지.”
“크흠…… 멀긴 합니다.”
남말할 처지가 아니어서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현음신녀의 초대를 받고도 자신도 지금에서야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호수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와아, 와아, 와아아아아! 다들 나 좀 봐요! 엄청난 놈이 걸려들었어! 엄청 큰 놈이 물었다고! 이거 고래 같아!”
“고래가 왜 호수에 살아!”
“거지새끼, 고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아니야, 진짜 묵직해. 낚싯대 휘어지는 것 좀 보라고!”
그 말대로였다. 소천개의 낚싯대가 무게를 감당하느라 크게 휘어져있었다.
다들 소천개 곁으로 모여들었다.
“와아, 진짜네.”
“진짜 고래인가? 새끼 고래 같은 거?”
“고래는 아니겠지만 엄청난 놈인 건 틀림없어.”
거짓이 아니었다. 호수의 반투명한 얼음층 저 아래로 커다란 음영이 비쳤다.
“이거 놓치면 이 소천개 님은 평생 후회할 거야. 어떻게 해야 잘 잡았다고 소문이 날까?”
“너무 당기지만 말고 풀어줬다 끌어왔다 해야 해. 녀석의 힘을 빼는 거지.”
“좋아.”
하지만 이내 소천개가 갸웃했다.
“어라? 교운이 형, 풀어줘도 도망가지 않는데?”
“응?”
“순한 놈인가?”
“일단 당겨 봐! 천천히.”
“응!”
소천개가 낚시대를 끌어당기기 시작하자, 천공단의 호기심도 극에 달했다. 하나같이 시선을 얼음구멍에 둔 채 눈을 반짝였다.
슬슬 끌려왔기에 소천개가 흥분했다.
이대로면 됐다 싶었다.
“큰 거 온다아아아아! 순한 놈이라고 놓아줄 리 없잖아아아아아! 으라차차차차!”
소천개가 외치면서 힘주어 잡아채 수면 위로 확 끌어올렸다. 그렇게 거대 물고기가 얼음구멍에서 솟구쳐나와 허공에 떠오른 순간,
“헉!”
“이런 미친!”
“시…… 이게 뭐야?”
“마, 말도 안돼!”
천공단이 놀라 뒷걸음질쳤다.
“어…….”
소천개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 황망해 툭, 하고 낚싯대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건져올린 것이 고래나 물고기가 아닌 사람이라면 놀라는 건 당연했다.
그것도 어린 소녀.
고작 여덟 살이나 아홉 살 정도로 보였고, 소천개의 낚싯바늘에 걸린 건 소녀의 옷이었다.
낚싯줄의 흐느적거림과 함께 허공에 떠올라 있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처억.
추락하는 소녀를 그 지점에 있던 낭인왕이 받아들었다.
소녀를 내려다보는 낭인왕의 얼굴은 망연자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살아있다면 말을 건네볼 텐데…….
험악한 얼굴에 놀라지 않도록 애써 웃음이라도 지어볼 텐데…….
소녀의 숨결은 없고, 심장은 뛰지 않는다.
“하아…….”
축 처진 몸과 새파랗게 질린 피부색만큼이나 소녀의 몸이 얼음장 같았기에, 깊은 탄식만 나직이 흘렸다.
그런 낭인왕 곁으로 천공단이 모여들었다.
소녀를 내려다보며 누구 할 것 없이 낭인왕과 같아졌다.
탄식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대체 어쩌다가…….”
“후우…… 이게 무슨 일인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왜 호수에서…….”
아이들은 누구라도 귀엽다.
이 소녀도 그랬다.
타인이 보기에도 그럴진대,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소천개는 하소연하려 형아를 찾았다.
“형아, 어떻게 하지? 내가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어. 어……, 여깄었네?”
원래 앉아 있던 곳에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나 찾아보니 어느샌가 낭인왕 곁에 있었다.
“낭인왕,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네, 형님.”
낭인왕이 낚싯줄을 제거한 후 조심스럽게 건넸다.
받아든 형님이 소녀를 내려다본다.
한데 기묘했기에,
낭인왕의 눈이 커졌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
‘응?’
‘왜?’
단주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듯도 보이고, 가소로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익히 곁에서 보고 겪은 바가 많다.
그렇기에 모두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 순간,
스윽.
후공이 우수를 들어올렸다.
손가락마디마다 떠오른 건 하얀 빛줄기의 능오침.
그대로 소녀의 어깨를 짚었다.
능오침은 혈관을 타고 나아가 심장을 터뜨린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쩌엉!
가로막혔다.
소녀의 심장에 도달한 순간, 소녀의 심장 부근에서 한줄기 기운이 일어나 휘돌며 능오침을 막아냈다.
‘멋지군.’
당연히 전력을 다한 능오침이 아니었다.
그렇다해도 놀랍다.
더 놀라운 건 소녀가 깨어있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이 소녀는 무의식에서 저절로 반응했다.
얼마나 고절한 경지인가.
소녀의 수행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보게 된다.
이 소녀는 누구인가?
왜 호수 아래, 두꺼운 얼음 아래 물 속에서 떠돌고 있었던 것일까?
그쯤에서 천공단도 감을 잡았다.
“형님?”
“두목?”
“단주, 어떻게 된 건가?”
“대공자 설마…….”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살아있습니다. 이 아이의 몸에 귀식대법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형아, 진짜야?”
“헉, 말도 안 돼!”
“단주,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천공단이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너무 황망할 뿐.
그 황망함에도 오류가 있다.
누군가 소녀에게 귀식대법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귀식대법을 펼친 건 소녀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