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85화 (185/460)

185화. 신비한 소녀 (1)

귀식대법.

죽음을 위장할 때와 은신이 필요할 때 쓰인다.

호흡과 심장의 박동을 일정 기간 동안 멈추고 체온까지 떨어뜨려 죽음을 위장하고 존재를 감추는 고절한 절학이다.

접근하여 잠복, 그 후 은신하여 암살에도 쓰인다.

특급살수의 경우 귀식대법을 통해 경지가 높은 이들을 노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의도한 대로 잘되지 않는다.

그 전에 발각되기 일쑤다.

경지가 높다는 의미는 제비뽑기로 올라선 것이 아니어서 알아차리게 되고, 귀식대법을 펼쳐 다가온 이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그런 점에서 후공도 귀식대법을 펼친 자들을 여럿 보았다.

암살의 위협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고, 암살자 중 대부분은 귀식대법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그때마다 다 보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들 누구도 몰랐다. 정작 가까이 곁으로 다가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하냐?’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건네면 소스라치게 놀라던 모습들. 모두 죽음을 맞았다. 여태 은밀히 귀식대법으로 다가온 이들 중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한데 이번에는 소녀다.

물론 소녀가 스스로 다가온 건 아니긴 해도…….

후공은 소녀를 안고 호수 밖으로 나왔다.

따라 나오는 천공단에 지시를 내렸다.

“천공단, 탐문.”

천공단의 신형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갈혜도 움직여야 할 상황임과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 아래 설영과 함께 신형을 날렸다.

후공의 눈앞에 있는 건 색관조과 금섬뿐.

땅에 내려앉아 동물 조각상처럼 묵직하게 바라보고 있는 두 영물의 모습이 명령을 기다리는 듬직한 수하의 태도였기에,

“든든하구만.”

칭찬해주니, 두 놈이 그제야 배시시 웃는다.

“좋다. 너희는 설산파의 위치를 찾아라.”

[주인님, 문제 없어요!]

[그으으으으으으윽!]

어느새 창공을 날아가는 색관조의 등 위에서 금섬의 긴 대답이 여운을 그리며 들려온다.

이제 곁에 남은 건 품 안의 소녀뿐.

후공은 그 자리에 앉아 의식없이 축 늘어져 있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누구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소녀가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

반로환동(返老還童)한 여고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도 최근이다.

소녀의 커다란 옷이 말해준다. 소매와 밑단을 뜯어낸 흔적, 거기다 기본적으로 옷의 품이 크다. 큰 옷을 입었다기보단 몸이 작아진 것.

또한 능오침을 무의식 중에 방어해낸 것을 보면, 화경의 극이나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이 나이의 소녀로서는 결코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니 반로환동이다.

어린아이로 비춰질 뿐, 원래의 나이는 많을 것이다.

한데 반로환동 이후 귀식대법, 그리고 혼절이라니. 흐름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반로환동까지는 어찌 이해가 된다만, 귀식대법을 펼친 채로 의식을 잃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단계를 연속으로 밟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염려도 든다.

의문의 한 지점에선,

‘혹시 이 소녀가 북해빙궁이 해결해야 할 숙원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

이유라면 앞서 만났던 북해빙궁의 여유없어 보인 모습 때문이다. 왜 그리 방어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했는지 의문이었는데, 소녀를 접하고 나니 이해가 될 듯하다.

빙궁의 오랜 고민이 지금 시기에 터진 것이라면, 그리고 그 고민의 실체가 이 소녀라면…… 설명이 되는 부분이다.

또 다른 이유는 소녀의 몸 안에 있다.

소녀의 안에 깃든 강력한 기운의 근원은 끝을 모를 한기(寒氣).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

하지만 빌어본다.

후공으로선 내심 소녀가 그런 존재가 아니길 바랐다.

만약 그런 존재라면 소녀를 죽여야 할 상황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후후, 그러기엔 너무 귀엽단 말이지.’

웃음을 지으며 의혹과 의문을 떨쳐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데다 오지 않은 앞날. 미리 당겨와 걱정할 건 없다. 소녀가 깨어나면 알 수 있을 터. 상황에 맞게 대처하면 그만이다.

소녀의 손을 잡았다.

고사리같은 손이 차갑다. 맥도 잡히지 않는 손. 그럼에도 분명히 살아있기에, 후공은 손바닥 장심을 통해 안온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잠시 후,

‘따뜻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의 의식이 알아차렸다.

반발하진 않았다.

하등 그럴 이유가 없었다. 포근하고 따스했으며 어루만지는 듯한 기운인 것이다. 그 스며듬이 마치 다독이고 감싸는 것 같으니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이 따뜻함은 뭐야? 어디서 오고 있지? 내 손? 그래, 내 손이야. 무엇에 닿은 걸까? 따뜻한 무언가에 닿은 거야? 부드러워. 사람 손 같아. 그래, 이건 사람 손이 틀림없어. 좋은 사람이로군. 그래, 좋은 사람이 틀림없어. 날 보살펴주고 있어. 아니 그보다 신경 쓰이는걸. 틀림없어를 연속해서 두 번이나 말했어. 바보같아.’

바보같다는 생각을 할 때, 소녀의 미간이 꿈틀했다.

외부로 드러난 살아있음의 첫 증명이었다.

그 이후 회복과 자각이 빨라졌다.

소녀의 의식은 점점 더 뚜렷해져갔다.

더불어 체온이 오르면서 혈색이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심장도 조심스럽게 박동을 시작했다.

‘누굴까? 누군데 내게 친절한 거지?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나이는 많을까? 남자? 여자? 혹시 강호의 고수인가? 잠깐만! 강호의 고수? 강호가 뭐지? 아, 맞다. 생각 났어. 무서운 사람들. 강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인가? 아니 잠깐만, 잠깐만! 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여기는 어디야? 아니 잠깐만, 잠깐만! 아, 이런…… 바보같이 또 말을 반복했어. 하아…… 멍청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보다는…….’

소녀는 아득함을 느꼈다.

‘어떡해……. 나 누구야? 나는 누구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안되겠어. 생각해 보자. 떠오르겠지. 떠올라야 해. 생각해 내야 해.’

아득한 막연함 속에 소녀가 머릿속을 헤집으며 몸부림칠 때, 그 몸부림과 마음 속 외침은 외부로도 나타났다.

“나는 누구야? 나는? 왜……, 왜…… 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입밖으로 내뱉는 소녀. 그 모습을 후공도 갸웃하며 바라봤다.

소녀의 말이 이어졌다.

“어떡해……. 모르겠어.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나는 누구인 거야?”

“기억상실이라고? 허허허허…….”

그 말에는 후공도 그만 너털거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갈수록 태산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반로환동에 귀식대법, 거기에 기억상실이 더해진 인물을 만나리라곤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소녀의 정신이 돌아온다 싶어서 이쯤에서 바닥에 내려놓을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윽고…….

소녀가 눈을 떴다.

소녀와 눈이 마주쳤기에 후공은 웃어 주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소녀는 마주봤다가 자신의 몸을 봤다가 주변도 둘러봤다.

“여긴 어디에요? 그리고 누구세요?”

“우선 널 내려놓으마.”

“싫어요.”

“……?”

후공은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너무 단호한걸?”

“추울 듯?”

“…………어.”

후공으로선 뚱하니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말투가 어린애 말투란 점은 어찌어찌 넘어갈 만한 사안인데, 춥다는 건 동의해주기 어려운 탓이었다.

몸 안에 극음의 한기를 품고 있는 반로환동한 소녀가 추위를 탈 리가 없지 않는가.

“여기가 북해라고요?”

먼저 장소에 대해 말해주자,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들 부르지.”

“북해는 어떤 곳이에요?”

“이런 곳이지.”

“이런 곳이 어떤 곳인데요?”

“추운 곳. 눈과 얼음이 가득한.”

“눈과 얼음? 아, 뭔지 알겠어요. 오라버니는 누구에요?”

“사람들이 말하길 천화서고 대공자라고들 한다.”

“저는 처음 들어봐요.”

“……그래.”

“혼자예요?”

“아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요?”

“크흠…… 지금은 그렇지. 어, 저기 오는구나.”

“안 보이는데요?”

“느껴 보렴.”

“느껴요? 뭘요?”

후공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느껴져요. 누군가 오고 있는 것 같아요. 나 어떻게 알았지? 되게 신기해. 근데 누굴까요?”

“내 친구들이다.”

“친구들이 많아요?”

“뭐…… 제법.”

“그럼 저도 친구할래요.”

“후후, 날 어찌 믿고 그런 소리를 하는거냐.”

“천화서고 대공자. 좋은 사람. 맞죠?”

“앞은 맞았다만 뒤는 틀렸다.”

“뒤에도 맞아요. 틀렸다가 아니라 틀림없다겠죠.”

“크흠…… 일단 내려주마. 인사를 해야지.”

“좋아요.”

빠르게 다가오던 천공단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빨리들 와요! 여기야, 여기! 천화서고 대공자의 친구분들, 빨리 빨리!”

그럴 수밖에 없다.

죽어 있던 소녀가 이런 식으로 활력 넘치게 반겨버리면 멍해지는 건 당연한 일.

소녀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역시 천공단주!

귀식대법이란 말을 들었어도 내심 ‘진짜인가?’ 한줄기 의심했던 마음을 통렬히 반성하는 시간.

통렬할 수밖에 없다.

“다들 뭐하는 거야! 왜 그러고들 있어요! 빨리 와야지!”

소녀의 외침이 너무 활기차다.

하지만 잠시 후,

천공단은 더 놀라버렸다.

탐문 결과에 대한 보고사항은 특별할 것이 없었고, 그 보고를 마치고 난 다음이었다.

- 단주, 그게 무슨 말인가?

- 형, 형님??

- 저 꼬마아이가 귀식대법을 직접 펼쳤다고요?

- 두목…….

쏟아지는 전음에 후공이 대답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답해주자, 다들 놀라 몸을 휘청였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 그, 그럼…… 반로환동이란 말입니까?

- 그게 되는 것인가요?

- 그건 마교와 밀교놈들이 연구하던 것이잖습니까.

놀랄 만도 하고, 맞는 말이기도 했다.

반로환동은 역천의 비술.

세월을 거스름은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거스르는 일.

늙은 노인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란 따로 없다. 하지만 가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주화입마의 경우다.

주화입마를 당해 그 마화의 입구에서 돌아가려고, 벗어나려 애쓰다 엉뚱하게도 반로환동하는 선례가 존재했다.

그것을 아예 체계적으로 연구하겠다고 나선 것이 마교와 밀교 쪽. 물론 잘되지 않았고 여럿 죽어나갔다.

이치를 거스른다는 건 찾아온 봄을 다시 겨울로 되돌리려는 것과 같아서 될 수가 없다. 그저 우연히 그 길에 들어섬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천공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저절로 돌아가 소녀를 찾았다.

제갈혜와 설영, 그리고 소천개가 소녀 주위에서 소녀의 실체도 모른 채 재잘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금적자가 물어왔다.

후공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색관조가 날아들며 어깨에 내려앉는다.

“찾았겠지?”

[까르르르르르, 주인님은 바로 아시네요.]

“잘했다.”

이어 시선을 금적자에게 향했다.

“선생께서 호형호제하시는 설산파로 가시죠.”

“허허, 알겠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리를 저만치 제갈혜 곁에 있던 소녀가 들었다.

‘설산파? 설산파라고? 이상해……. 처음 들어보는 이름. 그런데 좋아. 마음에 들어. 가자. 가고 싶어.’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가서…… 설산파를 쓸어버릴 거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