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신비한 소녀 (2)
설산파를 쓸어버린다.
왜 그런 마음이 떠오르는 걸까.
소녀는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물론이고, 어떤 식으로 쓸어버려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상관없어.’
그런데 이상하다.
그래야만 하는 일이고,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그건 생각하는 것만으로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이었다.
죽일 거야.
반드시 끝장내 주겠어.
기분이 좋아지자 소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소천개가 다정하게 물었다.
“우리 꼬마 아가씨, 즐거운 일이라도 떠오른 거야?”
소천개로서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하니 예쁜 여동생이 생긴 상황. 물론 하늘이 아니라 자신이 호수에서 건져 올린 것이긴 해도, 자신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이 꼬마 아이가 너무나도 귀여워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 꼬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른다고 했건만, 갑자기 혼자 빙긋 웃고 있으니 뭔가 생각난 것이 틀림없었다.
“응, 거지야.”
소녀의 대답에 소천개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뭐가 떠오른 거야? 무슨 일인데?”
“비밀이야, 거지야.”
“야, 그런 게 어딨어. 이 오라버니에게 이야기해 봐.”
“싫어. 그리고 냄새 나. 저리 좀 가.”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 하는 소리야?”
소천개가 미간을 찡그렸다.
“응.”
“흥! 가라면 누가 못 갈까 봐?”
소천개가 홱 몸을 돌려 성큼 걸어가다 멈춰 돌아섰다.
“이만큼 어때?”
소녀는 무슨 말인가 갸웃하다 이내 깨닫고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저리 좀 가랬더니 진짜로 조금 떨어져 있겠다는 것.
“깔깔깔, 재밌어. 조금 더 가.”
소천개가 뒤로 세 걸음을 더 디뎠다.
“이 정도는 어때? 예쁜 아가씨, 더는 안 돼. 너무 멀어.”
“그래, 이제 좋아.”
“하하하, 좋다고? 그래 넌 이 오라버니가 좋다는 거지?”
“아니잖아. 거지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좋아. 공기도 너무 맑아.”
“하하하, 날 부를 때 거지라고 부르지 말래두.”
“거지새끼.”
“어허!”
“그럼?”
“거지 오라버니. 이렇게 불러야 착한 아가씨가 되는 거야.”
“거지새끼, 거지새끼, 깔깔깔!”
“너에겐 안 되겠다. 항복.”
“응?”
“새끼는 빼고 그냥 거지로 부르기로 하자.”
“그거 마음에 들어. 진작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거지 오라버니도 참.”
“에헷?”
소천개가 갸웃했다가 이내 웃겨 죽는다며 깔깔댔다. 그 모습에 소녀도 함께 깔깔거렸다.
오래 가진 않았다.
제갈혜와 설영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잠시 아가씨 빌려가도 될까?”
“물론입지요. 그럼 이 거지는 이만 총총총.”
소천개가 군소리 없이 물러났다.
설영의 손에 들려있는 바늘과 실을 보고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탓이었다.
소녀의 옷이 꼭 어른 옷을 입은 것 같고 옷의 밑단들은 대충 뜯겨 있기에, 설영 누나가 바느질로 손을 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사형 곁으로 간 소천개는 이내 소스라쳤다.
“뭐, 뭐라고?”
은앙개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 야, 상식없는 놈아! 전음을 들었으면 전음으로 답하라고.
- 어, 미안. 너무 놀라서. 진짜야? 반로환동이야?
- 두목이 그렇다니까 그런 거지.
- 그렇지. 그건 틀림없지. 사형, 나 말로만 들었지 이번이 처음이야.
- 나도 그래. 후덜덜하다야.
- 어떡하지?
- 왜?
- 내가 아까 반로환동한 고수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르라고 했어. 그리고 한 번 들었어.
- 야, 멍청한 새끼야!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냐!
- 기억 찾으면 다 생각나겠지?
- 당연하지.
- 근데 누굴까?
- 몰라.
- 형아도?
- 어, 두목도 아직인 듯.
그때 소천개가 일어섰다.
- 사제야, 어디 가냐?
- 어, 다시 호칭 정정해 주려고. 거지 오라버니가 뭐야. 거지 똥개 멍멍이라고 부르라고 해야겠어.
- 그거 좋네.
- 나 엄청 똑똑하지?
- 어. 근데 갈 필요없어.
- 왜?
- 두목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말고 편하게 대하란다.
- 왜??
- 뭐랬더라. 아, 맞다. 기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그게 최선이래.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지금은 소녀니까,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소녀로 생각해야 한다나.
- 뭔가 어렵네. 그치?
- 그러게.
- 근데 형아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까? 반로환동도 알고.
- 책이지.
- 아…… 역시 책인가.
- 아무렴.
***
설산파의 안내는 색관조.
일행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설산파에 거의 도착했을 때는 해 질 무렵이었다. 북해의 하루가 빨리 저문다는 점에서 먼 길은 아니었다.
이동할 때, 소녀는 주로 천공단주와 함께했다.
소녀는 품에 안겨 갈 때도 있었고, 목마를 타고 가기도 했다. 그 상태로 동요를 부르기도 했는데, 그 동요는 기억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동안 색관조에게 배운 것이었다.
“낮에는 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아래 새들은 팔랑팔랑, 밤에는 달빛에 물든 노란 하늘! 까마귀가 깍깍. 낮도 좋아, 밤도 좋아! 구름 위에서 걸을까요, 까마귀를 타고 밤하늘을 날까요. 낮도 좋아, 밤도 좋아, 구름 위에서 걸을까요…….”
“노래 좋고요!”
그렇게 천공단주의 칭찬을 들으면 바로 한 번 더 불렀다.
“낮에는 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아래…….”
“저기로군.”
“어? 설산파에 다 왔어요?”
“그래.”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눈 덮인 산 중간중간 큰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다 죽일 거야. 설산파.”
“멋진 풍경이로구나. 그렇지?”
후공은 소녀의 말을 듣고 기억해 두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너무 태연히 흘러나온 말이라, 소녀가 생각을 입 밖으로 내고도 자각을 못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맞아. 멋진 곳이야.”
“설산파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겠지?”
“그럴 것 같아요.”
“기대되는구나.”
“나도, 나도.”
소녀의 대답이 천진난만하다.
하지만 명백해졌다.
소녀는, 아니 이 반로환동한 고수는 설산파에 원한이 있다.
소녀의 자각은 멀지 않았다.
그 순간이 오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터.
‘후후, 기대되는군.’
**
“하하하하! 금적선생, 이제야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하하하하하!”
금적자가 장담한 대로였다.
설산파 장문인 설곽이 화통한 웃음소리와 함께 맞이하는 모습에서는 친근함이 묻어났다.
“선생의 일행이 많아, 처음에는 본파를 공격하러 오는 무리인 줄 알았습니다그려.”
농담도 건네는 가운데 금적자가 천공단의 면면을 소개하니 그때마다 설산 장문인 설곽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급기야 탄성을 내질렀다.
“허허, 정녕 놀랍습니다. 도대체 선생께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급기야 강호를 데리고 다니시는 겁니까?”
중원의 내로라하는 고수와 명문가의 자제들과 개방의 제자, 심지어 무림맹의 제갈 군사, 그리고 천산의 후인까지 금적선생의 휘하에 있다 싶으니 마치 강호 전반을 끌고 다니는 느낌.
장문인 설곽이 감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데리고 다니다니?”
“허허허, 왜 그러십니까. 예전과 달리 겸손해지기까지 하셨습니다.”
장문인 설곽이 원래 안 그랬잖느냐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금적자로선 겸손이 아니었기에,
“아니야.”
“아니라니요?”
“나도 부하야.”
“네? 부하라니요?”
장문인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근 10년 전 하북에서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다툼이 일어 그때 크게 곤욕을 치르고 금적선생의 무위에 경탄했던 그였기에, 지금 선생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천공단주는 내가 아니라…….”
“……?”
장문인 설곽의 시선이 금적자가 보는 곳을 쫓았다.
여태까지 소개되지 않았던 한 사람, 젊은 서생 쪽이었다.
후공은 바로 예를 갖췄다.
“천공단주가 장문인께 인사 올립니다.”
“하하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장문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항마삼협과 무산쌍웅 그리고 낭인왕 등이 살기등등 쏘아본 탓이었다.
농담으로라도 한마디 더 했다간 칼부림이 날 분위기였기에 설곽이 더듬거렸다.
“그, 그럼 정녕 일행의 수장이 여기 이 젊은…….”
“그렇지. 천공단주. 천화서고의 대공자일세.”
“무, 무공 또한……?”
“경이롭지. 나는 단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네.”
금적자가 껄껄 웃으며 설명을 마쳤다.
**
그 덕분에 천공단에 대한 설산파의 대접은 지극 정성이었다.
면면을 보면 그렇게 되고 만다.
향후 천공단이 강호에 위세를 떨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고, 천공단주의 명성도 강호를 진동하리라.
그런 마음 아래 만찬이며, 숙소로 쓸 거처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이제 좀 쉴까 싶던 장문인은 쉴 수 없었다.
천공단주가 대화를 청해온 탓이었다.
“대공자, 조금 걷겠나?”
“그것도 좋겠군요.”
두 사람은 전각의 외곽 소로길을 함께 거닐었다. 말없이 걷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천공단주였다.
“설산파는 평온해 보입니다.”
“하하, 강호와는 다르지. 이곳 북해에서 다툴 일은 많지 않네.”
“북해에서 가장 강한 분이라면 누가 꼽히는지요?”
“가장 강한 사람이라…….”
“아, 물론 답은 설산 장문인이시겠지만, 제가 궁금한 건 그다음으로 강한 분입니다.”
“하하하하, 자네 재밌는 사람이로군.”
장문인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한 사람.”
“……?”
“북해빙궁의 궁주겠지.”
“현음신녀입니까?”
“들었나 보군. 그렇다네.”
“그다음은 누구입니까?”
“그다음도 모두 북해빙궁의 인물들이네. 그녀의 사매, 그리고 빙궁의 장로들.”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산파는 허황되지 않고 자신의 현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의문이 깊어졌다.
“설산파와 빙궁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좋네. 빙궁의 인물들은 의롭기도 하고, 우리가 도움을 받기도 하지.”
“그렇군요.”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
‘한데 왜지?’
반로환동한 고수는 왜 설산파를 쓸어버리겠다는 것인가.
그녀는 누구기에?
그렇게 의문을 안고 처소 부근으로 돌아왔을 때, 처소에서는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옛날 옛적에 하늘 나라에 선녀님이 살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동요를 가르쳤던 색관조가 이번엔 소녀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있었다.
후공은 밖에서 기다렸다가,
[어라…… 잠들었네?]
[그윽.]
그 말을 듣고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잠든 소녀를 들어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침상 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정에 들었다.
주인의 수행에 두 영물은 조용해졌다.
시간은 소리없이 흘러 밤은 더없이 깊어져갔다.
스윽, 스으윽.
더웠나보다.
소녀가 이불을 걷어차고 옷을 젖혀 배를 드러냈다.
[그윽.]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금섬이 아니었다.
침상으로 폴짝 뛰어올라 소녀의 옷을 내려 배를 덮어주려고 하다가 동작을 멈췄다.
[그윽?]
[왜 그래?]
[그으으으으?]
[무서워?]
[그윽.]
[뭔데 그래? 어…… 뭐지? 주, 주인님.]
금섬이 얼어붙고 색관조가 놀라 불렀을 때는 이미 후공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러난 소녀의 배꼽.
그 위쪽으로 해골 문양이 보였다.
일반적인 해골 문양과는 달랐다. 해골의 한쪽 눈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
후공은 내심 탄식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본 문양이지만 바로 떠올랐다.
잊을 수 있을 리가.
‘귀운종 현현신마의 독문 표식…….’
사황천보다, 유령곡보다 더 질기고 어두웠던 귀운종.
그들 중에 장법으로 크게 위세를 떨쳤던 인물이 현현신마라 불린 여인이었다.
후공은 잠든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웃음이 난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정녕 몰랐다.
그리고 이해되었다.
옷을 내려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다음,
마음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군. 현음신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