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너의 손이 설산에 닿으려거든.
소녀의 몸에 새겨진 해골 문양.
문양의 크기는 크지 않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다.
문신은 아니다.
그저 찍힌 흔적.
귀운종 현현신마의 독문표식이며, 그녀의 전리품과도 같은 흔적.
현현신마는 늘 그녀가 상대한 자들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건 바로 문양.
그녀의 장력에 격중당한 이들의 몸에는 해골 문양이 남았다. 그녀가 따로 새기는 수고 같은 걸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찍혀서 남았으니까.
현현신마.
그녀의 손에 볼록하게 끼워진 해골 문양의 반지 때문이었다.
그 문양을 자랑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장력을 맞은 자 중 살아남은 자가 없는 탓이다. 그저 자그마하게 해골 문양이 몸 어딘가 새겨져 있다면 현현신마에게 참변을 당한 자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살아남았다.
후공은 소녀를 바라봤다.
‘신녀…….’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는 살아남았다.
후공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한 시점으로 떠나갔다.
귀운종 십마의 섬멸.
유령곡의 도발이 있기 전의 시기다.
귀운종 십마의 섬멸이 지상과제가 되었을 때, 그 과정에 참여한 정파의 절세고수들은 많았다. 그중에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도 있었다.
그리고 현음신녀가 현현신마와 격돌했다.
신녀와 신마의 격돌.
두 여인은 자부심이 넘쳤고, 그런 탓에 서로가 서로를 과소평가했다.
그런 경우, 승부는 빠르게 결정 난다. 얕잡아본 순간 상대를 빠르게 끝내려 한다. 또한, 순수한 능력의 격차가 드러나기도 쉽다. 물론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후공이 두 사람의 격돌 현장에 이르렀을 땐 이미 승부는 끝을 맺고 있었다.
현음신녀의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걸 본 순간, 현현신마의 머리가 몸에서 툭 하고 떨어져나와 날아올랐다. 피는 튀어오르지 않았다. 이미 빙공에 의해 핏줄까지 얼어붙은 탓.
현현신마는 머리 잃은 몸으로 손을 휘저어대며 몇 걸음 디뎠지만, 그마저도 곧 얼어붙어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멈춰섰다가 얼음이 부서지듯 부서져나갔다.
그렇게 승부가 끝을 맺나 싶었을 때, 현음신녀가 쓰러졌다.
쓰러지는 현음을 후공이 받아내고 보니, 그녀 또한 장력에 격중당한 뒤였다.
그녀는 과소평가한 대가를 얻었다.
찢어진 상의 사이, 배꼽 위로 해골 문양이 문신처럼 남았다.
그녀는 자신을 붙든 이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후공…….]
[신녀, 괜찮습니까?]
[뭐…… 이쯤이야.]
[다 죽어가오만.]
[……흐흐흐.]
힘겹게 웃음을 흘린 후 신녀가 말을 이었다.
[후공, 부탁드려요. 절 웃게 하지 마세요. 웃으니까 아프군요. 그나저나 살려주시겠죠?]
[생각 중입니다.]
[고마워요.]
[아니, 난 생각 중이라고…….]
[조금 쉬어야겠어요.]
그때 현음신녀를 살렸지만, 현현신마의 해골 문양은 어찌하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 남았다.
현현신마의 독문 표식.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양.
지독하기 짝이 없다.
반로환동을 한 뒤에도 남아 있지 않는가.
이 소녀가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가 아닐 가능성은?
없다.
현현신마의 장력을 맞고 살아남은 자는 극히 드물며, 해골 문양의 위치가 그렇다. 배꼽 위에 새겨진 해골 문양은 현현신마의 전리품이 아니라, 승리를 쟁취한 현음신녀의 전리품이다.
또 다른 확신의 근거는 소녀의 몸 안에 깃든 한기.
그리고 무의식 상태에서 능오침을 방어해낸 놀라운 경지가 말해준다.
다른 의문들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만빙호에 득달같이 달려왔던 빙궁의 고수들이 왜 여유 없던 모습이었는지 납득하게 된다.
그들의 궁주가 사라진 것이다.
문파의 수장이 실종된 사태를 맞게 되면 경계심은 솟구치고, 신경은 날카로워지며, 여유는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여유 없는 모습을 보았기에 안심하라는 의미로 천공단의 기괴한 자기소개를 방관하였고, 또 꼴사나운 모습도 보여주며 도주해주긴 했다만……. 그 도주가 그들의 궁주인 현음신녀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이야.
물론 아직 의문도 남고 확인을 거쳐야 하는 부분은 남아 있다.
왜 그 호수인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하필 그곳에 버려지듯 잠겨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설산파에 대한 원한의 근원도.
상념은 멈췄다.
스스스스…….
순간 방 안에 한기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진원지는 침상 위 소녀.
[주인님!]
[그으으윽!]
서릿발 같이 번져 가는 한기에 색관조와 금섬이 놀라 등 뒤로 숨었다.
“나가 봐라.”
[네!]
[그윽!]
염려의 말이나 조심하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두 영물이 도주했다.
괘씸한 놈들.
괜히 서운해져 후공은 두 놈이 빠져나간 창가를 흘깃 바라봤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태 본 것이 있으니 그렇게 되고 만다. 두 영물은 안다. 조심해야 할 사람은 주인님이 아니라 소녀.
허튼짓을 하는 순간, 소녀는 죽는다.
아니면 구겨지거나.
그것이 그들의 주인.
방 안의 한기는 점점 짙어졌다.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에 서리가 맺히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투명하게 쩌저적 얼어붙었다.
그러던 한순간 소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설산파를 죽여야겠어. 모조리.”
“…….”
앞으로 확인해야 하는 부분 중 하나가 소녀의 입에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소녀가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방 안을 둘러보고 바닥을 보고, 천장을 올려다봤다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시선이 마주쳤기에 후공은 빙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소녀가 물었다.
“괜찮아요?”
“춥구나.”
거짓말이란 건 소녀도 알고 있었다.
여태 얇은 옷으로 천화서고 오라버니는 호수에서 이곳까지 달려왔으며 내내 추위를 몰랐다. 또한 눈 위에 발자국은 옅게 남았을 뿐이었다.
“들었죠?”
“그래. 여기 이곳. 설산파.”
“네, 이 밤…… 지금…… 설산파를 쓸어버릴 거예요.”
후공의 의문은 깊어졌다.
현음신녀가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떠올리는 마음은 무의식에 가깝다. 그럼 이는 현음신녀의 순수한 염원이자, 숙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설산파 장문인이 알려왔다.
설산파와 북해빙궁의 관계는 원만하다고.
그 말이 거짓일 리 없다.
애초에 설산파는 북해빙궁의 경쟁상대도 아니다.
무엇보다 근원적인 의문이 남는다.
현음신녀가 설산파를 원한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손을 썼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현재 북해빙궁은 궁주가 실종된 상태.
설산파가 의심을 받을만하다면 빙궁의 고수들이 가장 먼저 들이닥칠 곳은 설산파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이 분노에는 오류가 있다.
틀림없는 사실일 테지만 동시에 이해의 범주가 아닐까, 그도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소녀가 바라본다.
고작 일곱 살, 여덟 살 소녀의 모습으로 현음신녀가 침상에서 내려서며 입을 열었다.
“천화서고 오라버니.”
“그래, 말하렴.”
“저를 막을 건가요?”
소녀가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였다.
“글쎄…….”
“손을 줘봐요.”
손을 건네자, 소녀가 살짝 건드렸다.
순간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직전 화극의 정심한 열기가 한기를 집어삼키려는 듯 발작을 일으켰지만, 서둘러 갈무리한 탓에 다행히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느껴진 차가운 기운을 후공은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곤 신기하다는 듯 손을 들어보이고 매만졌다.
“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해낼 수 있어요.”
“대단한걸.”
“맞아요. 그래서 오라버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
“…….”
소녀는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이유는 상관없어요.”
“마음에 그저 떠오르니까?”
“맞아요. 그거에요.”
자꾸 떠오른다. 설산파를 쓸어버려야 한다고.
“그러니 막지 마요.”
“아니, 나는 막아야겠다.”
“왜요?”
“지금의 넌 일부에 불과하니까.”
“일부라고요?”
“전부가 돌아온 다음 바라본다면 다를 거다.”
찾아야 할 기억의 전부. 찾아야 할 건 단지 은원의 실재만은 아니다. 진실인지 아닌지보다 더 중요한 건 시간의 흐름, 마음의 흐름.
이미 용서된 것일 수도 있고, 까마득히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설산파는 이미 대가를 치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녀는 빙궁의 궁주가 되어 현음신녀로 불리게 된 뒤로는 더 이상 설산파를 원망하지 않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사건이나, 그때와는 다른 견해.
어쩌면 이해의 범주일지도.
“제 기억이요?”
“그래. 스스로 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모든 것을 기억해내면, 그땐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마. 결단코 막지 않겠다.”
정기신의 온전한 회복.
그때 기억은 돌아온다. 지닌 힘도 모두.
“하지만 지금은?”
“불가.”
“그래도 제가 당장 하고 싶다면요?”
“후회하겠지.”
“후회해도 상관없다면요?”
“날 공격해라.”
“……?”
소녀의 눈이 커졌다.
후공은 태연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설산을 대신하여 너의 공격을 받아내겠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감당하겠다. 반격은 없을 것이고, 널 원망하지도 않으마.”
“싫어! 그게 뭐야! 왜 그러는데?”
“괜찮다.”
소녀는 즉각 반박했고 괜찮다는 말에 짜증은 극에 달했다.
맹렬히 쏘아보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괜찮지 않다구! 왜 설산파를 지켜! 나를 지켜줘야지! 천화서고 미워! 난 혼자잖아. 난 어린아이잖아. 안 그러냐구!”
“후후후…….”
후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웃음이 날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해도 우스운데, 현음신녀라는 걸 알고서 바라보게 되니 웃지 않을 수 없다.
소녀가 쌍심지를 돋웠다.
“웃는 거야? 웃음이 나와?”
“이리 와라.”
“싫어! 절대로 안 가.”
그러면서 침상 위로 올라가 이불을 휙 끌어올려 머리까지 덮었다.
“자장가는…….”
“싫어! 자장가도.”
“내일 보자.”
“내일 안 봐.”
“자렴.”
“이미 자고 있음.”
후공은 피식 웃고 창가에 섰다.
이 층 창가 너머 바깥으로 천공단의 모습과 설산파 장문인과 장로들이며 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강렬한 한기에 모두 놀라 달려왔고, 방 안에서 들려온 대화 소리도 모두 들은 터.
대강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천공단은 상황이 일단락되자 건들건들거리고 있었지만, 설산파는 장문인 휘하 누구 할 것 없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그들이 느꼈던 한기는 대단했던 터.
그 강력한 한기의 근원이 천공단과 함께 온 작고 귀여운 소녀인 데다, 그 소녀가 설산파에 원한이 있는 듯 보이니 설산파는 이게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일단락되었다.
소녀를 진정시킨 건 천화서고 대공자.
내가 설산을 대신하여 너의 공격을 받아내겠다!
그 말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왜?
그리고 소녀는 또 왜?
그때 장문인의 귓가에 전음이 꽂혔다.
- 장문인, 시간 어떻습니까?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원하던 바였기에 설산의 장문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장문인과 대화를 마친 그 새벽.
어두운 호수를 후공이 바라봤다.
호수는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를 건져올린 그 호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