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어제와 다른 오늘.
어둠 속.
후공의 시선은 밤의 호수에 고정되었다.
‘현음신녀는 왜 이 호수에 잠겨 있게 된 건가? 어떤 경로였을까?’
알아내야 할 대목이다.
신녀가 북해빙궁의 궁주이므로, 이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는 건 의미가 있다.
주화입마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만, 누군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래서 확인은 언제나 옳다.
시작점은 당연히 발견된 이 호수.
천공단의 탐문, 탐색 결과로 보면 호수 밖에서 시작되거나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주변에 눈이 쌓여 있으나, 이 눈밭은 최근 내린 눈이 아닌 터.
쌓인 눈덩이의 질감과 뭉침을 볼 때 최소 열흘 이전의 눈이다.
그런데 눈 위에 발자국이 없다.
소녀의 발자국도 없고, 다른 이의 발자국도 찾지 못했다.
남은 발자국은 천공단과 짐승의 것뿐.
그렇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은 호수 위가 아니다.
호수 안쪽이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했기에,
후공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화극일주의 요결을 따라 튕겨진 탓에 손 끝에 푸른 불꽃이 일어나 춤춘다. 정확히는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 끝 위에 떠오른 화극의 불꽃.
‘파염(破炎)!’
손을 떨쳐 호수의 중앙으로 불꽃을 날렸다. 호수의 얼음 표면에 닿는 순간, 불꽃은 화악 번지며 호수의 전체 얼음층으로 퍼져가면서 뒤덮었다.
눈을 한번 깜박였다가 뜨는 정도의 시간. 호수는 달라졌다. 더 이상 호수는 얼어붙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내린 호수 표면은 잔잔한 수면이 되었다. 물고기의 움직임에 따라 한 번씩 물결이 찰랑일 뿐이다.
[와아, 주인님 굉장해요. 박수우우우우! 으어억!]
[그으으으어어어!]
함께 따라나선 건 색관조와 금섬.
머리 위쪽을 날고 있었는데 색관조가 잘 날고 찬사의 말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두 날개로 박수를 치는 바람에 곤두박질쳤다.
덕분에 금섬도 추락.
하지만 위치가 좋았다. 금섬은 주인의 어깨에 사뿐히 안착하고는 안도의 ‘그윽’을 내쉬었다.
“금섬아.”
[극?]
“저곳이다.”
주인이 가리킨 곳으로 금섬의 시선이 옮겨갔다.
달빛은 연하고 사방이 어두운 밤.
호수 안쪽은 더욱 어둡다.
하지만 주인만큼은 아니라도 금섬의 안력도 상상을 초월한다. 공청석유를 곁에 둔 채 먹기도 했고, 그 외 좋은 것을 많이도 먹은 금섬이 아니던가.
[그윽! 그으윽?]
[주인님, 물 속에 동굴이 있어요?]
어느새 균형을 찾아 금섬의 반대편 어깨에 내려앉은 색관조도 본 모양이다.
색관조의 반응이 곧 금섬의 반응.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궁금하구나. 저 물속 동굴을 따라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말이야.”
[그윽.]
금섬이 알아들었다.
“의미 있는 곳이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곳. 금섬아, 너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그곳에서 듣고 보고 기억하여 돌아와라. 할 수 있겠지?”
[그윽!]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섬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첨벙!
금 두꺼비는 헤엄도 잘 친다. 호수의 북쪽 방향 그 끝지점에 난 수중 동굴로 사라져 들어가면서 금섬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제 금섬은 힘든 길을 가야 한다.
밤을 꼬박 새야 한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건 주인도, 친구도 마찬가지니까.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
그 밤.
현유신녀도 잠들지 못했다.
사저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사저는 북해빙궁의 궁주이므로.
오늘로 벌써 엿새째.
행방은 묘연하다. 어디에도 없다.
“사저…….”
사저가 수행하던 암자 부근 동혈에서 나직히 불렀다.
이곳이 사저가 확인된 마지막 행적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이번과 같은 상황은 처음이다.
갑자기 사라질 수는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질 능력도 갖췄다. 그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저는 북해빙궁의 궁주가 된 후로 그 무게를 잊은 적이 없어, 긴급 상황에서도 반드시 글이나 흔적을 남겼다.
뒤늦게 전갈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루를 넘긴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런 조치가 특별한 건 아니다. 누구라도 그래야 하는 일이고, 당연한 조치.
그렇기에 더 큰 의혹에 쌓이게 된다.
그 당연한 조치가 없이 꺼지듯 사라졌으니 기이한 일이다.
현유신녀는 몇 걸음 디뎌 동혈 입구 끝자락에 섰다.
삼십여 장 아래로 보이는 건 연못.
[그윽.]
순간 금빛 두꺼비가 연못에서 머리를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현유신녀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북해빙궁의 궁주에 대한 것뿐.
사저가 사라진 밤.
첨벙, 하며 울리는 물소리를 들었다는 이가 있어 연못 안도 살폈었다.
그곳에 있을 리가.
연못으로 떨어졌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연못 안까지 살폈다.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연못 안쪽에 수중 통로로 작은 구멍이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의미없는 수중 통로였다.
작은 구멍이었고, 어린아이의 몸이 지나갈 정도에 불과했다.
[그윽.]
두꺼비 소리를 뒤로하고 현유신녀는 암자를 떠났다.
그녀의 신형이 다시 멈춘 곳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빙벽 앞이었다.
현유신녀는 그곳에 한참을 머물렀다.
덕분에 금섬도 한참 머물렀다.
이윽고 현유신녀가 물었다.
“당신의 짓은 아니겠지?”
대답은 없다.
현유신녀는 자조적으로 스스로 답을 냈다.
“그래, 그럴 순 없겠지.”
빙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하는 모습.
금섬의 위치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현유가 ‘당신’이라 칭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답답해진 금섬이 앞다리를 들어 머리를 감쌌다.
많은 걸 보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주인에게 들려주어야 했기에 ‘당신’이란 인물이 누구인지 얼른 보고 싶어졌다.
그때였다.
“스승님, 밤이 깊습니다.”
현유신녀가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제자 한유예였다.
또한 그녀는 천공단과 조우했던 빙연대의 대주.
“들어갈 참이다.”
밤이 깊은 건 아니다.
도리어 동이 터오려고 하고 있는 시간.
“네.”
“천공단주라고 했더냐?”
“네? 네.”
갑작스러운 말이었던지라 이해가 늦었다.
어제 만빙호에서 만난, 스스로를 천공단주라 밝힌 엉뚱한 서생에 대한 보고는 이미 올린 터였다. 더불어 천공단의 면면까지.
“마침 이 시기에 천공단주라는 이가 등장한 것이 공교롭다. 그들의 면면도 기이하고. 그가 본궁에 관심이 있음을 드러냈으니 응해 주어라.”
“네.”
한유예가 바로 답했다.
천공단주는 도주하기 전 천공단의 대강을 소개했다. 그 뜻은 정녕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개를 듣고 난 뒤에야 한유예도 뒤늦게 그들에게 관심이 생겨나게 된 터라, 스승의 말씀은 그녀와 기대나 다름없었다.
스승과 제자가 천천히 걸어 그곳을 벗어났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는 두꺼비가 대신했다.
자, 이제 볼 수 있어.
‘당신’ 이란 존재.
금섬은 현유신녀의 위치에서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빙벽을 올려다보았다.
그 결과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으으으……?]
거대한 빙벽.
그 얼음 벽 안에는 ‘당신’이란 존재가 얼어붙은 채로 갇혀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어떻게 봐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사람을 얼려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눈도 뜨고 있고, 표정도 자연스러웠기에 금섬은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린 것뿐인데 소스라쳤다가 뛰기 시작했다. 여기, 보통 무서운 곳이 아니다. 내달려 크게 도약해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
빙벽 안의 사람.
정확히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다.
“금섬아, 네 생각은 틀렸다.”
호수 앞에서 후공은 금섬의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빙벽 속 여인.
그녀를 가두고 얼린 건 북해빙궁이 아니다.
하지만 금섬이 애쓰고 수고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두말할 나위 없었으며, 그 외 금섬이 알려온 이야기도 훌륭했기에 후공은 선물을 내렸다.
“자, 입 벌려라. 육각망 들어간다.”
손가락 끝에 육각망의 진향을 액으로 맺혔다. 금섬의 쩍 벌린 입안에 떨구어 주었다. 금섬이 좋아 죽었다. 배를 뒤집고 눈이 풀렸다.
이상한 놈이다.
취향이 독특한 녀석.
[주인님, 북해빙궁이 아니면 누가 그런 거예요?]
색관조가 물어왔다.
금섬도 대답이 궁금한지 한순간 시선을 고정한다.
“빙벽 속 여인을 가둔 건…….”
[……?]
[……?]
“…… 그녀 자신.”
[……??]
[……??]
두 영물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뭔소리인가 싶은 모양.
물론 후공도 들었을 뿐이다.
이야기를 들려준 건 설산파 장문인.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의 이야기.
90년 전 설산파와 북해빙궁의 혈사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장문인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태어나기 전이니. 그저 훗날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현음신녀는 보았던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생생하게…….
빙벽 속에 스스로를 가둔 설산파 여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겪었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과거 현음신녀가 도움을 청해왔던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말했던 당시로서는 70년.
지금으로는 90년.
그동안 빙궁이 해결하지 못한 일.
빙궁의 숙원.
그 빙벽 속 여인.
설산파의 전설적인 고수.
지난밤 소녀가 내뿜었던 살기는 어린 날의 기억 속 설산을 향한 것이요, 설산의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
“하하하, 야, 저리 가! 간지러워. 그만 좀 해.”
다음 날 아침, 소녀가 깔깔거렸다.
금섬이 소녀의 머리 위와 목, 그리고 등까지 뛰어다닌 탓이었다.
천공단이 그 모습을 보며 전음을 나눴다.
- 현음신녀라니……. 믿을 수가 없네.
- 형님의 말씀인데 안 믿는다고?
쌍웅이 낭인왕을 윽박질렀다.
낭인왕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 어…….
- 어……, 솔직히 우리도 그래. 믿어야 하는데…….
- 흐흐흐…….
천공단이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현실감이 없을 뿐.
그 오전, 설산파 장문인 설곽은 천공단이 떠나는 걸 아쉬워했다.
“대공자, 여의치 않으면 곧바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진심이었다.
고작 하루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장문인이었다.
처음에는 젊은 놈 하나가 있네? 정도로 보였는데, 이제 천공단주 외에 다른 이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잊을 수 없다.
‘내가 설산을 대신하여 너의 공격을 받아내겠다.’
이 젊은이가 설산에 닿지 않도록 기억을 잃은 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 소녀가 반로환동한 현음신녀임을 들은 아침에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니 아쉬울 수 밖에.
“뭐…… 잘 풀려도 오시게. 대공자.”
“장문인, 당연한 말씀을 하시니 서운해지려고 합니다.”
“하하하하, 내가 실수했군.”
**
정오를 지날 무렵,
천공단은 어제와 같아졌다. 만빙호로 뛰어들었다.
얼어붙은 호수에 얼음구멍을 내고 누가 더 물고기를 많이 잡는지 내기하자고 소리쳤다.
어제와 같은 건 후공도 마찬가지였다.
호숫가에 앉아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자께선 구경만 하실 건가요?”
제갈혜가 다가오며 말을 건네왔다.
어제와 같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
후공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잘하는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제갈혜를 웃게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후공은 늦었고, 소녀가 빨랐다.
“당연하지. 천화서고 오라버니는 두목이니까.”
“하하하, 그 생각을 못했네.”
어제와 다른 점이라면 곁에 소녀가 앉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소녀가,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라는 것.
혜의 웃음은 같다.
그때 소녀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갸웃했다.
“오라버니, 언니! 누가 오는 것 같아요?”
소녀는 기척을 감지했다.
후공이 답했다.
“북해빙궁이다. 우릴 반겨주러 왔구나.”
“북해빙궁?”
곧 빙궁의 빙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처럼 달려왔지만 어제의 적대감은 없었다.
대신, 한유예가 예를 갖췄다.
“북해빙궁의 빙연대가 천공단주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