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저는 보잘것없습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
한유예의 정중한 인사에 천공단주가 답했다.
“어제보다 오늘의 만남이 더 좋군요. 또 어제 본 후 오늘 다시 뵙게 되니 더 반갑습니다.”
그 태도가 자연스럽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기에,
“단주께선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한유예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이 고왔다 해도, 득달같이 달려온 것은 어제와 같았다. 충분히 당혹할 만도 한데 이 젊은 서생의 모습은 태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하, 그럴 리가요. 여기만 한 낚시터가 없어서 몰래 다녀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한데 정중히 맞아주시니 크게 마음이 놓였을 따름입니다.”
한유예도 미소 지었다.
돌려 겸양한 말임은 그녀도 알 수 있다.
제대로 마주하고 보니 어제와는 느낌이 달랐다.
분명 엉망진창으로 보였는데…….
‘아니야.’
그저 망가지는 걸,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다.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에 의미를 두지 않는 자.
한유예는 그럴 필요가 없는 자들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존엄이 드러나는 자들.
결국은 알게 되는 진정한 모습.
스스로 존엄한 자들.
어떻게 보인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지금 천공단주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스무 살 남짓 되는 청년이란 점에서 놀랍다. 심지어 이 청년은 북해빙궁이란 이름의 무게에 전혀 눌림이 없다. 그저 한없는 여유.
왜 이 젊은 나이에 단주인가?
그에 대한 답을 들은 느낌이다.
그 영향이겠지.
시선을 돌려 바라본 천공단도 마찬가지다.
기상천외하게 소개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의 천공단은 다들 시큰둥하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낚시에 여념이 없었다.
하나같이 괴이한 자들.
그러다 눈에 띄었다.
단주 옆에 서 있는 소녀.
“단주, 못 보던 얼굴이군요. 곁의 아이는 누구인가요?”
분명 어제는 없었다.
“오다가다 만났습니다.”
“어제 말인가요?”
“네, 어제. 이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특별한 존재입니다. 다름 아닌…….”
천공단주가 말을 멈췄다.
왜 여기서 말을 끊는 것인가.
‘누구기에?’
한유예는 괜히 긴장되어 미간을 좁혔다.
이곳 북해가 오다가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인가. 그것도 어린 소녀를? 보통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당사자인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한데 사실 천화서고 오라버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걸까? 궁금해져 올려다봤다.
기대의 눈빛 속에 천공단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신비한 소녀입니다.”
“흐음…………………….”
한유예가 한참이나 아랫입술을 깨물며 앓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터인데, 그럴 거면 그냥 말을 말지 신비한 소녀란 건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소녀는 달랐다.
귀를 쫑긋 세우고는 기대하고 있었는데 신비한 소녀라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오라버니는 진중한 듯 보이면서도 한 번씩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곁의 제갈혜도, 호수 안에 있던 천공단도 그만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자, 그래서…… 오늘 오신 건?”
천공단주가 물었다.
“빙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좋군요.”
그 순간 호수 안 천공단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빙어고 뭐고 이 결정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아~, 일이 이렇게 되는구만!”
“우와아아, 북해빙궁에 간다아아아!”
“이게 꿈이야, 생시야!”
기다렸다는 듯 낚싯대를 팽개치고 달려왔다.
*
눈 덮인 산을 올랐다.
빙궁의 빙연대가 앞장서고 그 뒤를 천공단이 따랐다.
뒤따르며 후공은 곳곳에 설치된 기문진식을 알아봤다.
산을 올라갈수록 진식이 촘촘해진 것을 보면, 빙궁은 이 산 너머일 것이다. 거의 다다른 셈이었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척 물었다.
“대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군요. 이곳이 맞습니까? 무섭습니다. 이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만.”
“하하, 이곳입니다.”
이내 한유예와 빙연대가 멈췄다.
눈 덮인 산의 봉우리. 구름은 가깝고 보이는 건 모두 새하얀 절경일 뿐이다.
봉우리 절벽에 서며 한유예가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단주, 혹시 환영진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진작에 알아봤다.
“환영진이었습니까?”
“네, 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시면 됩니다. 두려워하실 건 없어요.”
후공은 목마를 태우고 있던 소녀를 내린 다음, 절벽 아래를 바라봤다. 소녀도 밑을 내려다보다가 끝이 안 보인다면서 탄성을 터뜨렸다.
그때 손이 잡혔기에 소녀가 돌아봤다.
천화서고 오라버니였다.
“같이 갈까?”
다정한 목소리.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후공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반로환동한 고수답다. 그도 아니면 무의식에서는 익숙한 장소, 익숙한 느낌일지도.
주화입마로 인한 반로환동.
주화입마로 인한 기억상실.
저절로 발현된 듯한 귀식대법.
무엇이 정기신을 흔들었음인가.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 급한 마음, 그 외의 고뇌. 그런 무언가일 테니 기억의 회복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누구라고 말해주면 안 된다.
미리 정의 내려주어선 안 된다.
혼돈을 부추길 뿐. 스스로 찾는 것이 최선이다.
어쩌면 이 환영진에서 기억이 돌아올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후공은 생각했다.
“가자!”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누가 말릴 틈은 없었다. 간다는 것이 지금 당장일 것이라고는 예측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추락해가는 모습에 한유예가 기겁해 소리쳤다.
“다, 단주! 환영진을 통과하려면 조건이…….”
안돼…….
까마득히 사라져가는 모습에 한유예는 망연자실했다. 그냥 뛰어내려선 안 된다.
방식이 있다.
정확한 위치, 그 해당 지점을 찾고, 열쇠를 쥐어야 하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 방법을 이제 말하려던 참인데 성급하게도 바로 뛰어내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한유예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그때 툭 하고 몸을 건드리는 손길에 한유예가 돌아봤다.
바라보니 거지였다.
“빙궁 누나?”
“……?”
“천화서고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거야?”
“응?”
그녀는 모른다.
알고 있었다면 걱정도 없었을 터.
소천개는 시큰둥해졌다.
“시골이네.”
“…….”
어떻게 강호인이 천화서고를 모를 수 있지?
그런 뜻임은 한유예도 이해했다.
무시당했지만, 반박할 여유는 없다.
이대로면 환상진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파라라라락!
거침없는 추락 속에 후공과 소녀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감각은 환상 속에 휘말려들었다. 분명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 같은 상황.
후공은 태연할 뿐이다.
소녀도 그랬다.
“굉장해! 오라버니 이게 다 환상인 거예요?”
“그렇지.”
“근데 이대로면 죽겠는데?”
그러면서도 소녀에게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겠지.”
“살아날 방법은?”
“없지.”
“멋져.”
“하하하하!”
후공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녀도 웃었다.
소녀는 걱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를 말해보라면 천화서고 오라버니가 곁에 있어서일까, 라고 말하게 될지도. 웃음소리를 들으니 더욱 마음이 편안해졌다.
후공은 거의 왔기에 소녀를 바라봤다.
아쉽지만 기억의 회복은 때가 아닌 듯하다.
서두를 건 없다.
빙궁 안에 들어서면, 기억 속 익숙한 광경들을 접하다 보면 불현듯 기억은 돌아올 것이다. 빠르든 늦든.
“특이한 눈송이가 보이는구나.”
“우릴 따라와.”
“그래.”
맹렬한 속도로 수직 강하 중에 눈송이들이 스친다. 밀려나고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하나는 달랐다.
하나의 눈송이만은 특별했다.
눈높이에서 따라온다.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흐느적거리는데 기이하게도 뒤처지지 않고 추락하는 속도에 맞춰 눈높이에 계속 보였다.
“잡아봐라.”
“응.”
소녀의 손이 눈송이를 움켜쥐었다.
순간, 화아아악!
빛이 번쩍였다. 이어지는 암전.
그러다 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절벽은 아니다. 사방이 백색 광채로 뒤덮인 가운데, 서로가 서로만 볼 수 있었다. 추락하는 느낌은 계속.
그 눈부심 속,
소녀의 귓가로 음성이 들려온다.
“마치 땅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 세 걸음.”
“응.”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른다.
사방이 온통 새하얗게 변한 공간 속에서 소녀는 의심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화악. 풍경이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절벽은 아니었다. 추락도 아니다.
발에 닿는 감촉은 이미 땅의 질감.
더불어 눈에 들어온 건 아름다운 풍경과 고급스러운 전각들. 얼음으로 빚어진 커다란 조각상도 여기저기 보였다.
소녀의 눈이 커졌다.
“대단해. 진짜 환상이었어. 그럼 여기는……?”
“북해빙궁.”
“아름다워.”
“그렇구나.”
이윽고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천공단과 빙연대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천공단은 둘러보며 빙궁의 모습에 감탄하기 바빴지만, 빙연대주 한유예는 놀란 눈으로 천공단주를 찾았다.
“단주, 무사하셨군요. 걱정했습니다. 한데 어떻게…….”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
한유예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운으로 될 일인가.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 생각해보니, 저절로 뒤따라온 건 말로 할 수 없는 경외감.
허허실실.
무엇이 진정한 모습인지 모를 천공단주의 언행 속에 갸우뚱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백 마디 말보다 천공단주는 한 번의 실행으로 스스로를 증명해보였다. 그저 뛰어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사람.
또한 자신이 마주하고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
천공단은 처소로 인도되었다.
여장을 풀 때, 그곳에 제갈혜는 없었다.
현유신녀와 마주앉았다.
찻잔 너머로 제갈혜를 바라보는 현유신녀의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제갈 군사, 저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 당시엔 너무 어렸습니다.”
현유신녀는 제갈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혜는 초면이었다.
현유신녀로서는 이해의 범주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선명히 떠오릅니다. 무림맹에서 보았습니다.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때가 두 살이었는지…… 세 살이었는지 모르겠군요.”
제갈혜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살, 세 살 때라고 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려고 해도 떠오르는 건 없다. 북해빙궁의 궁주인 현음신녀도 그녀의 사매인 눈앞의 현유신녀도.
하지만 이런 식의 말들이 처음은 아니다.
나이가 차면서, 무림맹 군사가 되면서 자주 들었다.
강호 원로들, 각대 문파의 지도자들이 말하곤 했다.
어릴 때와 다르지 않다고, 그 얼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제가 그때 백부님 곁에 있었나 보군요.”
“맞아요. 후공 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요.”
“……………….”
제갈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강호의 명숙들이 찾아오는 자리에 한쪽을 차지하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백부는 그걸 또 좋아해서 명숙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한 번씩 잘 그렸다고 추임새를 넣기도 했었다.
훗날 만난 강호의 명숙들이 그런 모습에 껄껄 웃었노라 이야기해주어 알게 되었다.
현유신녀도 그중에 한 사람인 모양.
뺨이 화끈해져 숨을 고르고 있자니, 현유신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자에게 듣자니 천공단주는 매우 뛰어난 사람 같더군요. 군사가 본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천하제일인이자 무림맹주였던 후공이 인정한 천재.
귀곡자, 귀곡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이가 제갈혜였기에 물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그에 비하자면…….”
제갈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저는 보잘것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