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90화 (190/460)

190화. 빙궁의 숙원과 마주하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

그를 알면 친구들도 알게 된다.

그는 누굴 가까이하는가.

그가 누구를 인정하는가.

그렇게 신뢰는 신뢰를 불러온다.

그래서 제갈혜에 대한 신뢰는 자연스럽게 천공단주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자신은 견줄 수 없다는 제갈혜의 말.

빙궁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천공단주에 대한 추가 검증은 의미 없었다.

시간 낭비일 뿐이다.

들은 말도 있다.

천공단주의 행적. 그가 이루어 온 것들.

“사숙, 그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허허, 고작 이십 세 정도의 청년이거늘…….”

“그 모든 일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니, 실로 경악스럽습니다.”

둘러앉은 빙궁의 십이 장로들은 현유신녀가 전해온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현유신녀도 이해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 자신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으니까. 말하는 이가 제갈군사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숙, 대공자의 행적이 사실이라면 가히 후공이 과거 강호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룬 일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강호의 전설로 회자되는 후공의 초기 행적.

수행을 마치고 세상에 나온 후공이 유람을 하겠노라 다니던 길이 강호제패가 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후공은 각대문파 전대고수들이 아끼는 후배가 되었고, 힘 있고 명성 높은 이들이 후공을 따르니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무림맹주가 되었다.

그리고 맞서게 된 사황천, 유령곡, 귀운종.

마교의 경우는 아예 틀어박혔다.

한데 제갈군사를 통해 알게 된 천화서고 대공자의 행적은 더욱 놀랍다. 어찌된 게 후공의 길보다 더하다 싶은 것이다.

서문세가와 맞선 것을 시작으로 약왕문의 친구가 되고, 천룡의 가문들이 대공자를 비호한다.

십이지문의 하나인 소요파는 장문인이 척살당했고, 새로운 장문인을 얻었다. 그 중심에 대공자가 있었다. 소요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구대 문파에도 손길이 이어져 종남은 은인으로 여기고, 화산은 깊은 호의를 지니고 있다. 거기에 더해 술법의 모산과 하오문까지 친구로 두었다.

이 정도면 현 강호 세력 중 절반 가까이가 대공자의 편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반문하면서도 십이 장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단 무림맹의 군사의 말이어서만은 아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이미 빙궁에 들어서며 증명한 것이다. 빙궁의 환영진에 뛰어들어 스스로 길을 찾았다.

그의 그런 행위에는 많은 것이 숨겨져 있다.

환영진이란 말을 듣자마자 뛰어내린 것만으로도, 빙궁을 향한 대공자의 믿음은 터무니없을 정도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후 환영진의 해답을 찾은 건 그가 보인 능력.

담대할 뿐 아니라 모든 변수에도 대응할 수 있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래서 본녀는 그에게 도움을 청할까 싶은데…… 장로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입니다.”

장로들의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모두 한목소리를 냈다.

천화서고의 천재이자 강호의 신성이 곁에 다가왔음이다.

증발한 듯 종적이 묘연한 궁주.

그 너머 어쩌면 빙궁의 오랜 숙원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마저 떠올랐다.

*

그 밤,

현유신녀는 자리를 마련했다.

“대공자, 어서 오세요.”

“영광입니다.”

자리하는 걸 보는 현유신녀의 표정은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해졌다.

“미모의 여인이 함께 올 줄은 몰랐군요.”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또 보기와는 달리 입이 무거운 친구라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후공은 곁의 소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하면 이 소녀가 그 신비한…….”

“네, 제가 그 신비한 소녀예요.”

소녀가 당차게 자신을 밝혔다.

이름도 모르고 다 잊어버린 주제에 당당하기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현유신녀가 웃음을 흘렸다.

“신비한 소녀라. 대공자,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일언지하에 거절.

말해줄 순 없다.

기억은 스스로 찾는다.

그렇기에 후공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두 사람을 마주하게 하는 것.

이 마주함으로 소녀가, 현음신녀가 스스로 자각하는 시작점이 되길 바랐다.

이곳에 위협은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찾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현유신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다. 각자 사정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기묘함은 남는다.

“묘하군요. 소녀가 낯설지 않아요.”

“아마도 이 나이 때 아이들은 다 비슷해 보여서 그러실 겁니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렇게 보입니다.”

“하하, 맞는 말이에요.”

소녀도 현유신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좋은 사람.”

“이 할머니가?”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래, 고맙구나.”

기억을 잃은 사저와 그런 사저를 찾고자 하는 사매는 한참을 서로 바라본다.

이윽고 현유신녀가 본론을 꺼냈다.

“대공자, 본녀는 그대에게 도움을 청할까 해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궁주의 행방에 대한 것.

그 묘연한 종적에 대한 것이었다.

“……본궁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군요. 하지만 불가사의한 상황이라 그대에게 청하려 합니다.”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

앞에 있다.

소녀의 모습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가 미흡합니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후공은 정중히 사양했다.

첫 대답은 사양하는 것이 좋다.

말 그대로 빙궁의 치부인 탓이다.

두 번째 요청이 들어오면 수락.

그렇게 내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염려 말아요. 찾아줄게요. 빙궁의 궁주님!”

소녀가 수락했다.

후공은 뚱해져 소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누가 누굴 찾아주겠다는 건가.

당사자인 주제에.

소녀는 그러든가 말든가였다.

말똥말똥한 눈에 웃음기를 담아 말해왔다.

“오라버니, 얼른 그러겠다고 해야지.”

“어………….”

두 번째 요청에 수락한다는 계획이고 뭐고, 그렇게 성사되었다.

그리하여,

“머뭇거릴 것 없이 이 밤 둘러봐도 되겠는지요?”

“물론이에요.”

*

현음신녀의 암자.

그 곁에 그녀가 수행하던 동혈을 살폈다.

의미를 둘 만한 흔적은 찾지 못했다.

격전이라든지, 외부의 습격이라든지.

후공이 기이하게 여긴 건 아니었다.

외부인인 자신에게 요청한 걸 통해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빙궁의 결속은 단단할 터.’

궁주의 실종에 관하여, 그 중차대한 상황을 맞아 외부인에게 드러내고 도움을 청한다는 결정은 지도부의 반발이 나오기 좋다.

한데 지도부가 수긍했음은 체계가 잘 잡혀있고 결속이 강함을 의미한다.

암습이나 음해는 아니다.

순수한 주화입마.

동혈 앞쪽으로 나와 끝단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 아래로 밤의 연못이 은은히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저곳에서 금섬이 고개를 내밀었다.

현유신녀를 바라봤다.

이 연못의 수중 통로와 호수는 연결되어 있다.

“오라버니, 무서워. 너무 바짝이야. 그러다 떨어지겠어.”

소녀가 곁에서 함께 내려다보다 뒤로 물러났다.

어떤 작용인지 연못은 얼어붙어 있지 않다.

“무섭긴 하구나.”

원래라면 소녀는 무서울 수 없다.

환영진의 절벽에서도 웃으며 뛰어내렸던 소녀다.

하지만 이 연못이 무섭다는 건,

그녀가 이곳에서 추락했기 때문이다.

기혈이 뒤틀리고 심마 속에서 아득히 정신을 잃고 헤매다 추락.

“신녀, 그 밤 물소리가 들렸다고요?”

“맞아요.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겠죠. 연못 안은 이미 살펴보았답니다.”

“그럼 의미를 둘 건 아니로군요.”

의미가 없을 리가.

후공은 소녀를 돌아봤다.

왜 바라보는가 하고 소녀가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후공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주화입마 후 연못으로 추락.

거동이 쉽지 않아 연못을 빠져나올 길이 없자, 귀식대법을 펼쳤을 것이다.

거의 본능에 가깝다.

호흡은 멈추고, 신체 전반의 기능은 정지.

그 와중에 반로환동인가?

아니면 그 전인가?

수중 동굴의 통로는 작지만 이미 현음신녀의 체격은 소녀. 그렇게 흘러 흘러 호수에 이르러 떠돌았다.

그런 현음신녀를 건져올린 것이 소천개.

소천개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 전에 빙궁의 빙연대에게 쫓겨나지 않았다면 소녀가 된 현음신녀를 만날 수 없었을 터.

그랬다면 현음신녀는 지금도 차가운 호수 안에서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공은 소녀를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다행이다.’

“왜?”

소녀가 묻는다.

“그냥 좋아서.”

“그게 뭐야, 시시하게.”

시시하다면서도 소녀는 웃는다.

*

이틀을 그저 보냈다.

그 사이 소녀는 빙궁의 곳곳을 다녔다.

후공이 함께 할 때도 있었고, 천공단이 함께 일 때도 있었다.

소녀는 제 집처럼 편하게 여겼지만 소녀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지 오라버니, 난 누굴까?”

“넌 신비한 소녀지.”

“오라버니는 거지고?”

“그, 그렇지.”

“왜 더듬거려?”

“모르겠어.”

“그니까 거지로 안 살면 되잖아.”

“그, 그렇긴 하지.”

“또 더듬거려. 에이, 거지 같아.”

천하의 소천개라도 상대가 소녀가 아니라 북해빙궁의 궁주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 번씩 식은땀을 흘렸다.

물론 은앙개는 연차가 있어서 달랐다.

막 대하려 했다.

“신비야, 등 좀 긁어봐라.”

“싫어!”

“비싸게도 구네.”

“오라버니도 거지잖아.”

“…….”

물론 결론은 소천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사흘째를 맞은 저녁,

“함께 가자.”

후공은 마주보길 택했다.

소녀와 함께 현유신녀를 찾아갔다.

기억의 상실 중 어떤 원인은 두려움에 대한 회피.

소녀가 두려워하는 근원과 마주한다.

곳곳을 누볐지만, 한 곳만은 아니었다.

“신녀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세요.”

“궁주님의 수행에 관해서입니다.”

현유신녀가 갸웃했다.

“뜻밖의 물음이군요. 그대가 원하는 답이 수행의 깊이를 묻는 건 아닐 테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의문이 듭니다. 제가 강호의 친구들에게 들은 바 북해빙궁 궁주님의 무위는 대적할 자가 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수행의 길에는 끝이 없다 하나, 궁주께선 왜 그토록 정진하셔야 했는지 말입니다.”

“흐음…….”

현유신녀는 대답 대신 침음성을 흘렸다.

그녀의 눈빛도 깊어져 갔다.

이윽고 현유신녀의 입이 열렸다.

“대공자, 그대는 마치 모두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제 착각일까요?”

물론 알고 있다.

금섬이 보았던 빙벽 속 여인.

설산파 장문인에게 들었던 전설이 된 여고수.

북해빙궁의 숙원이요, 소녀의 숙원일 것이다.

언젠가는 깨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두려움에 현음신녀는 수행을 멈출 수 없었을 터.

그 두려움과 마주할 때였다.

답을 유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

“착각입니다.”

“좋아요.”

현유신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대라면 물을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까. 함께 가도록 해요. 보여드리죠.”

깊어져 가는 밤.

현유신녀는 빙벽으로 안내했다.

금섬이 보았던 빙벽.

빙궁의 곳곳을 누볐지만 소녀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대공자, 이곳이에요.”

현유신녀가 가리켰다.

빙벽 안에 갇힌 여인. 놀랍게도 눈을 뜨고 있었다.

“놀랍군요.”

말과 달리 후공은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달랐다.

연신 뒷걸음질쳤다.

마치 금섬이 그랬던 것처럼 눈이 커져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소녀라서 그런 것인지, 현음신녀이기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득 손이 따뜻해 바라보니 천화서고 오라버니였다.

“괜찮니?”

“오라버니, 나 왜 그러지? 모르겠어. 그냥…… 눈물이 나.”

소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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