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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191화 (191/460)

191화. 카앙, 카앙, 카아아앙!

후공은 그곳을 벗어났다.

내내 진기를 불어넣어 안정시켰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많이 지쳐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음인가.

마음이 받는 압박은 신체 전반에 타격을 주고 몸의 균형을 어그러뜨린다.

침소로 들어서며 소녀의 수혈을 점혈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스르륵 고개를 떨군다.

원래라면 소녀는 소녀가 아니기에,

현음신녀이기에 반발해야 함에도 속수무책으로 점혈당했다.

후공은 소녀를 침상에 눕히고 그 곁에 잠시 머물렀다.

소녀는 잠들었지만, 반면 잠들었던 색관조와 금섬은 깨어났다.

[주인님, 신비 상태가 왜 이러는 거예요?]

[그윽?]

소녀의 혈색은 창백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니 두 영물이 걱정했다.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라. 무슨 일이 있으면 지체치 말고 내게로 와라.”

[넵!]

[그윽!]

착실한 놈들.

자다 깼는데도 불평이 없다.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 처소를 나섰다.

빙벽으로 돌아가니 기다리고 있던 현유신녀가 반겼다.

“대공자, 아이는 괜찮나요?”

미안해하는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유로서는 어린 소녀가 감당할 만한 광경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자신이 만류했어야 했다면서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럴 것 없다.

소녀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대의 사저이자 북해빙궁의 궁주.

또한 위대한 무인이기도 하다.

그저 마주해야 할 진실과 마주했을 뿐.

또한 소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도 두려움 같은 건 아니다.

전혀 다른 의미.

하지만 후공이 내색할 수는 없는 일.

“괜찮습니다. 보기보다 강한 아이입니다.”

“그래요?”

“네. 그보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빙벽 속 여인. 누구인지, 어떤 사연인지. 궁주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거짓은 아니다.

궁주는 곁에 있지만 빙궁 입장에서도, 후공 입장에서도 실종 상태.

그녀가 기억을 회복했을 때, 비로소 그녀는 찾아진 것이 된다.

현유신녀가 빙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대사저예요. 저와 궁주의 사저.”

“흐음……, 뜻밖이군요.”

같은 스승.

그 아래 세 명의 제자.

빙벽 속 여인이 첫째, 소녀가 둘째, 눈앞의 현유신녀가 세 번째 제자다.

“누구라도 의아해할 테죠. 그러니까 90년 전이군요. 제가 막 입문했을 때의 이야기.”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설산과 빙궁의 비사.

빙벽 속 그녀는 현이.

원래라면 다른 이름, 그대로였다면 현이신녀.

빙궁의 인물이자, 90년 전 설산파 장문인의 딸.

스스로 빙벽 안에 들어간 여인.

물론 후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설산의 장문인이 들려주었다.

“그대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군요.”

“많이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크게 동요하면 원래 이런 표정이 됩니다.”

“그럴 리가요.”

현유신녀가 웃음 지었다.

그런 한편 그녀의 마음에 의문이 떠오른다.

이 젊은 서생의 관조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근심도, 두려움도, 격동도 찾을 수 없다.

오직 그저 바라봄.

수행의 깊이가 자신보다 더 깊어보이는 건 착각일까.

현유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데 정녕 빙벽을 깰 수도 녹일 수도 없었던 겁니까?”

장장 90년. 그 긴 세월 숱한 노력을 다했음에도 빙궁은 이 빙벽을 어찌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없어요. 가히 빙공의 극한. 대사저의 공능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어요. 도저히 방법을 찾지 못해, 급기야 이십여 년 전쯤 사저는 천하제일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었죠.”

“천하제일인이라면…….”

“네, 후공이에요.”

“그도 결국 해내지 못했나 보군요.”

“아니에요. 거절당했어요.”

“아……”

거절한 당사자였지만 후공은 진지하게 그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빙궁의 일은 빙궁이 해내야 한다는 뜻이었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도 믿어주셨던 것일 테고요. 하지만 그 후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기대와 달리 빙궁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궁주께서 수행을 멈추지 않고 정진하신 의미도…….”

“그래요. 사저는 자신의 대에서 빙벽을 제거하고, 빙벽 안 대사저를 끝내고 싶어했어요.”

후공은 우수를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스륵, 빠져나와 휘감기듯 손에 잡힌 검령.

그 모습에 현유신녀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방금 이건, 허공섭물인가? 어검술? 아니, 그보다는 마치 저절로 빨려든 것 같구나. 어떻게 된 거지?’

허공섭물이라면 우수와 검 사이에 기의 흐름이 있어야 했다.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읽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데 대공자의 발검은 마치 검이 스스로 빠져나와 손아귀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검술도 기의 흐름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지금의 광경은 현유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왜 갑자기 검을 쥔 것인지는 짐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신녀, 제가 시도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그럼.”

스슷!

삼 층 전각 높이의 거대한 빙벽.

그 중심에 여인이 갇혀 있다.

이름은 현이.

아름다운 여인.

후공은 현이의 눈높이까지 신형을 솟구쳐 검강을 발현했다.

자줏빛 광채가 맺히면서,

우우우웅!

검령이 울었다.

빙벽 속 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너무도 생생해, 마치 마주보고 있는 듯하다.

왜인가.

빙벽 안 현이는 미소 짓고 있다.

검강이 다가감에도 그녀의 미소는 변함이 없다.

미소 짓는 현이의 머리 부위 빙벽을 쪼갤 듯 내리친 순간,

카앙!

검령이 튕겨졌다.

그 반탄 속에 후공이 본 건 여전한 현이의 미소.

이젠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만했다.

신검이라 불리는 검령, 그 검령으로 발현한 검강으로도 빙벽은 그대로. 심지어 얼음 조각조차 튀지 않는다.

강철도 두부처럼 베어내는 검령이 부르르 떠는 가운데, 후공은 반탄된 작용을 이용해 신형을 뒤집어 지면에 내려섰다.

“흐음…….”

현재의 경지는 본래 수행에서 6성의 경지를 넘보는 시점. 비록 6성이라도 가능하다고 봤던 터라 놀라움이 남았다.

하지만 후공보다 더 놀란 건 현유였다.

‘자줏빛 검강?’

대공자가 강기를 구사할 수 있는 화경에 든 건 당연하게 여겼다. 제갈 군사로부터 유령곡을 상대할 때 그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들었기 때문.

하지만 들은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그렇게 직접 보며 놀라운 가운데 그녀를 사로잡은 건 검강의 자줏빛 빛깔이었다.

강기의 발현하는 광채는 각기 다르다.

백, 적, 자, 청, 흑, 황. 옥.

특유의 지닌바 무공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빛깔로는 우위를 논할 수 없다. 경지를 가늠함은 그 빛의 선명함.

한데 대공자의 자줏빛 검강은 빛나면서도 투명해 보일 정도로 맑고 선명하다. 불순함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함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이가 있었다.

천하제일인.

그의 검강.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귀운종과의 일전에 참여한 사저가 보았고, 복귀한 사저가 들려주었다.

‘아니겠지?’

그녀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후공의 제자일 리가.

후공이 제자를 거두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저 무림맹의 천하십객이 이런 저런 가르침을 받아 제자 격이라고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그래, 아닐 것이다.

만약 제자였다면 제갈 군사가 먼저 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놀라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대공자를 쫓았다.

대공자는 이제 빙벽으로 다가가 빙벽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매만져보다 멈춰 가만히 손을 대고 서 있다.

일순 손아귀에 불길이 일었다.

‘삼매진화로군.’

삼매진화로 녹일 수 있는 빙벽이 아니다.

하지만 현유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이내 대공자가 갸웃한다.

빙벽을 올려다봤다가 자신의 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현유가 다가갔다.

“대공자, 너무 상심 말아요. 그대는 충분히 강한 사람입니다.”

넋이 나간 듯 보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상심할 일인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이 경지는 그녀로서는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저 대사저가 생성한 빙벽의 견고함이 상식을 초월할 뿐.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후공은 상심하지 않았다.

‘된다…….’

화극일주의 염화가 빙벽을 녹였다.

삼매진화는 현유신녀의 눈을 가리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화극에 진득하게 녹아내리는 빙벽의 물기를 감추려 삼매진화로 날려버린 것뿐. 또한 삼매진화인 척 보이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빙벽은 녹아내린다.

화극으로 녹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때는 아니다.

빙궁의 일은 빙궁이 끝내야 한다.

끝내려 수행에 정진했던 소녀가 현음신녀가 되어야 한다. 그녀의 손으로 이 숙원을 마쳐야 한다.

“신녀, 저와 천공단이 다시 시도해봐도 되겠습니까?”

이 빙벽은 천공단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터.

강호의 신비로운 고수와 경이로움을 마주쳐보는 것만으로도 성장의 발판이 된다.

‘다시 시도?’

현유신녀는 대답 없이 한참을 바라봤다.

대공자의 무심한 눈빛.

기분이 이상해진다.

분명 안 될 것이 분명한데도,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착각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현유는 믿어보고 싶어졌다.

*

믿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음 날, 천공단의 빙벽 공략이 시작됐다.

카앙, 카앙, 카앙, 카아앙!

안 됐다.

대신 소란스럽기가 말로 할 수 없어졌다.

금적자와 항마삼협이 강기를 맺힌 장력으로 후려치고, 쌍웅의 비도가 날고, 낭인왕의 도, 남궁연과 언교운의 검이 빙벽에 쇄도했다.

되진 않고 소란만 가중되었다.

“와아, 이거 뭔데 안 쪼개지는 거야!”

“얼음조각도 튀질 않아!”

“완전 미쳤는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 거냐고.”

“개방의 취유장은 못 부술 것이 없다고오오오오!”

카앙, 카앙, 카앙, 카아아앙!

아침부터 시작해 밤까지 계속되었다.

저녁 무렵부터는 금적자가 음공으로 해결하겠다고 금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빙벽은 안 갈라지고, 대신 듣기 좋은 음률만이 카앙, 카앙, 하는 소리와 함께 빙궁에 울려퍼졌다.

그렇게 사흘.

빙궁은 이게 뭔 일인가 싶어졌다.

그런 탓에 포기를 모른다는 점을 높이 샀던 빙궁도 결국 슬슬 이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빙벽은 빙궁의 숙원이고 무엇보다 진지한 사안이거늘, 천공단이 나서면서부터 이상해져버린 것이다.

게다가 찾으라는 궁주는 찾지 않고 빙벽만 깨고 있으니 뭐하는 자들인가 싶어졌다.

장로들 중 성격이 화급한 자들은 당장 그만두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지만, 그때마다 현유신녀에게 가로막혔다.

“빙궁이 보낸 세월이 90년. 그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단 며칠. 특별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오히려 활력이 도니 좋아 보입니다.”

그녀라고 소란스럽지 않을 리가.

하지만 그녀는 천공단보다는 천공단주를 주시하고 있었다.

천공단의 소란은 천공단주가 시작.

그가 보인 무위.

그가 드러내는 무심함.

그의 곁에 있는 천공단과 제갈 군사.

그 놀라운 면면을 휘감고 있는 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쩌면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문득 들어 기대하게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앙, 카앙, 카아아아앙!

천공단은 밤이 깊을 때까지 빙벽을 후려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천공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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