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현이신녀.
정오를 넘긴 시각.
빙궁으로 돌아온 후공은 현유신녀와 마주앉았다.
“대공자, 나갔던 일은 즐거웠나요?”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빙벽 공략, 이후에는 사냥. 이제 세 번째는 무엇이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그와 같이 말하며 현유신녀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말한다.
무엇이든, 어떤 요구든 다 들어주겠다고.
그것이 제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인다 해도.
후공은 그 태도가 흡족해 마주 미소지었다.
과거에도 느꼈지만, 눈앞의 여인은 특별해 보인다. 궁주인 현음이 번뜩이는 재능이라면 현유는 고요하고 현명하다.
스스로 반짝이지 않는 궁주의 그림자였지만 그럼에도 빛이 난다.
“오늘 밤, 모두 끝낼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현유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미간을 좁히고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녀는 알 수 없다.
‘모두’라는 건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물론 모두라면, 궁주의 행방과 빙궁의 숙원까지다.
하지만 어떻게?
그야말로 갑작스러웠기에 당황했다.
여태까지 지켜본 대공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빈 수레로 생각될 정도로 요란한 소리만 냈을 뿐이다.
“이야기가 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신녀께서 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
현유는 바라보는 것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소녀, 기억을 잃은 소녀의 옷을 준비해주십시오. 소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빙궁에서 마련할 수 있는 가장 고급스럽고 품격있는 의복이면 좋겠습니다. 옷은 신녀께서 직접 입혀주십시오.”
“……?”
말은 없지만 현유의 눈이 묻는다.
이유는?
후공이 미소 지었다.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
결국 이유는 듣지 못했다.
그저 옷을 입혀 달라는 말.
그럼에도 현유는 따랐다.
요구대로 고급스러운 옷을 준비했고, 의아함 속에 소녀를 맞이했다. 그러다 보았다. 옷을 입혀주려 할 때 보았다.
현유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왜요?”
소녀가 물었지만, 현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으로 불렀다.
‘사저…….’
소녀의 배꼽 위쪽에 새겨진 조그만 해골 문양.
해골의 한쪽 눈이 일그러져 있다.
‘이게…… 무슨…….’
해골 문양은 귀운종 현현신마의 독문 표식.
사저가 귀운종과의 일전에서 현현신마를 날려버린 대가로 얻어 온 상처 자국이었다.
어떻게 해도 지울 수 없고 사라지지도 않는, 훈장과도 같은 표식이었다. 때맞춰 온 후공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들었다.
이제 소녀를 바라보는 현유의 눈은 달라졌다. 한없이 다정해졌다.
‘사저…….’
소녀를 보고 있으니 이유를 들은 듯하다.
대공자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백 마디의 말을 하기보단 직접 보여주었다.
고급스럽고 품격있는 옷.
소녀가 북해빙궁의 궁주이므로.
사저가 눈앞에 있었다.
“아이야.”
“응?”
“한번 안아봐도 될까?”
“옷도 안 입고?”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현유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걸 참아야 했다. 보이는 모습은 일곱 살인가, 여덟 살 정도. 그럼에도 소녀의 모습은 이제 현유의 눈에 달리 보인다.
어린 날, 서너 살일 무렵의 자신이 보았을 때 꽤 커보였던 사저의 모습으로.
왜 몰라봤을까.
처음 보았을 때 왜 낯설지 않았는지 이해된다.
현유가 소녀를 안았다.
*
소녀는 돌아갔다.
하지만 현유에게는 돌아온 것이었다.
행방이 묘연했던 사저를 찾았다.
그리하여 다시 마주한 대공자.
현유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대공자, 어떻게 된 거죠?”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빙연대에게 쫓겨 옮겨 간 호수에서 건져올린 소녀.
귀식대법을 알아차렸고, 소녀의 전신 경맥에 내포된 강대한 한음지기도 확인.
이후 데리고 있는 영물인 금섬을 통해, 호수의 수중 통로가 빙궁의 연못과 연결되어 있음을 파악하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현유는 많은 의문이 풀렸다.
그날 암자 아래쪽으로부터 크게 들렸다던 연못의 첨벙 소리.
연못 안의 작은 통로.
감쪽같이 사라진 사저.
비로소 아귀가 들어맞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의문이 있다.
옷을 직접 입혀달라는 의도 아래 감춰진 진실.
대공자는 사저의 상처 자국을 보여주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묻게 된다.
“그대는 누구인가요?”
사저의 상처 자국을 아는 이는 극소수.
후공은 물음을 이해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강호의 인연 속에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만박선생이 떠드는 소리를 귀담아두었던 것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 만박자!”
현유의 의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만박자다.
또한 귀운종과의 일전에 만박자가 참여했다는 것도 들은 바 있었다. 그가 원해서는 아니고, 후공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고 했다.
그럼에도 현유는 놀랍다.
이토록 젊은 나이에 대공자의 인맥이 만박자에게까지 닿아있으니 놀라울 따름.
그때 들려왔다.
“신녀, 이제 끝나 갑니다. 마지막이 남았군요.”
“대공자…… 설마 본궁의 숙원을 말하는 건가요?”
“네, 오늘 밤 끝내려 합니다.”
후공은 말을 이어가며 오늘 밤 어떤 과정을 밟게 될지 이야기했다.
현유는 믿을 수 없어 내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공자의 이야기 중 하나만큼은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신녀, 빙벽 안 그녀에게도 지옥이었습니다.’
정녕 생각조차 못한 말이었다.
**
이야기를 마친 후공은 빙벽 앞에 섰다.
정확히는 환명을 딛고 높이 둥실 떠올라 현이의 눈앞에 서 있었다.
빙벽 안 여인,
언제나 미소 짓고 있는 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모습을 현이도 빙벽 안에서 바라봤다.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언제나 보고 있었다.
‘그야…….’
소녀를 데리고 온 이.
자줏빛 검강으로 빙벽을 내려쳤던 이.
그때도 지금처럼 눈이 마주쳤었다.
한데 지금은 더 놀랍다.
어떻게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보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일까?
그날의 진실.
잘못 전해진 이야기.
자신의 마음.
모르겠지.
그래, 알 수 있을 리가.
그저 빙벽을 부술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테지.
그때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소리가 들려왔다.
- 현이신녀.
‘……?’
현이는 들려온 전음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내게 말을 걸었어.
전음이 이어졌다.
-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현이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 그, 그대는…… 어떻게…….
- 짐작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대답을 듣게 되니 좋군요.
- 많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난 오랜만이라…… 제가 말이…… 어눌해요.
후공은 이해했다.
빙벽 안에서 90년.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 듣기 좋습니다.
- 왜인지…… 당신의 말…… 눈물이 날 것 같군요.
-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긴 세월…… 그 안에서…….
설산 장문인의 딸.
두 사매의 대사저.
현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표정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후공은 그녀가 침묵 속에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 …….
북해빙궁의 궁주 현음신녀가 빙궁의 숙원을 해결해달라 청할 때 왔다면 좋았을 것을……. 후공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이로서는 알 길이 없다.
지금도 젊은데 더 일찍이라니. 그저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사실 이곳에선…… 시간을 잊는답니다.
- 멋지군요.
그 말에는 현이가 웃었다.
- 사매는…… 반로환동인가요?
- 알아보셨군요.
- 네,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였어요.
- 지금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난 듯하더군요. 그날의 일. 당신의 마음.
- …….
한참의 침묵 후 현이가 전음을 보냈다.
- 현음이 울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 당신의 슬픔을 보았으니 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 나의 슬픔…… 그대는 어떻게 알았죠?
- 스스로 갇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라도 같다.
저주? 그럴 리가.
어느 누가 됐든 사람은 단 하루라도 갇혀 있지 않으려 한다. 하루를 묶여있는다 해도 견딜 수 없다. 한데 그 세월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날 빙궁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비밀은 드러난 것이 아니다.
현이 스스로 밝혔다.
확인을 위해 묻자, 전음이 들려왔다.
- 그대의…… 말이 맞아요. 제가 밝혔죠.
잘못 알려졌다.
전말은 밝혀진 것이 아니다.
그녀가 밝힌 것일 뿐.
설산파 장문인이자, 아버지와의 약속.
처음 그녀는 아버지의 꿈을 따라갔다.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던 시간들.
하지만 세월은 무섭다.
현이는 빙궁의 따스함에 젖어들었다.
세월의 무서움은 가공스러워 아버지와의 약속, 아버지의 꿈을 계속해서 다짐해도 빙궁의 따스함은 그녀의 마음으로 파고들었다.
스승의 애정.
어린 사매들. 그리고 빙궁의 선한 인연들.
‘빙궁이 좋아.’
그렇게 되고 말았다.
결국 어느날 죄책감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스승에게 전말을 밝힌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먼저였고, 자신은 이성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폭풍이 휩쓸고 간 뒤.
스승은 쓰러졌고, 많은 이들이 다쳤다.
모두 자신이 한 일이었다.
후회와 회한 속에 선택한 길은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가는 것.
저주와 공포를 위해 갇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이 세월은 속죄의 시간.
그녀에겐 지옥.
하지만 혼란은 기억을 왜곡시킨다.
빙궁은 똑바로 보기 어렵다.
어린 현음도, 더 어린 현유도 마찬가지.
두려움에 잠식당해 보지 못했다.
그렇게 빙궁에게도 지옥이 열렸고,
현이에게도 지옥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잘못 알고 있다.
전말은 밝혀진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밝힌 것일 뿐.
만약 그녀가 밝히지 않았다면 비밀은 영원했을 것이다.
- 차라리 밝히지 말지 그랬습니까.
- 그리…… 되지 않더군요.
후공은 현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미소가 내내 슬퍼 보였는데 이제 비로소 웃는 듯 보여, 미소로 답해주었다.
- 당신의 지옥은 끝났습니다. 빙궁의 지옥도.
- …….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들려왔다.
- 나는 벗어날 수 없어요.
수행을 멈춘 탓에, 아니 그녀가 모든 것을 쏟아부어 빙벽을 형성한 탓에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극음지체의 경이로움으로 만든 빙벽.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고, 녹일 수 없는 감옥이다.
- 제가 할 수 있습니다.
- 그날은……?
그날, 자줏빛 검강은 통하지 않았다.
- 그날 해냈습니다.
거짓말.
그럴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신기하다.
- 왜일까요. 믿어지니 신기해요. 만약 누군가 온다면 후공이란 이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대군요.
20년 전쯤.
그녀는 빙벽 앞에서 사매가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다.
빙궁의 숙원을 끝내겠노라고.
후공에게 청하여 이 지옥을 끝내겠다고 다짐하는 말이었다.
- 후공이란 이가 오면 틀림없이 죽음을 맞을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그대라서 다행입니다.
- 그가 왔어도 똑같았을 겁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 그대는…….
- 천화서고 대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