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북해빙궁을 얻다.
나란히 걷는 걸음.
두 사람은 평온히 걸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지만, 현이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머릿 속에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뻔해 보이는 것들을 떨쳐내고 보니 남은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현이는 그중 하나를 꺼냈다.
“대공자, 천화서고는 어떤 곳인가요?”
“빙궁과 비슷합니다.”
“빙궁하고요?”
“네, 빙궁처럼 아름답고 따스합니다.”
현이가 미소 지었다.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상상이 잘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경험한 것이라고는 빙궁과 얼음 빙벽이 전부였다.
가보고 싶어. 언제 가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들려왔다.
“신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천화서고…….”
“크흠, 최고의 선택이십니다.”
“하하하!”
현이가 소리 내 웃었다.
당연히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대공자의 말하는 투가 유쾌했다. 거기다 뿌듯한 표정으로 엄지까지 들어 보이는 바람에 그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신녀, 그 전에 저와 함께 가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또 어디인가요?”
“굉장한 곳입니다.”
“그래요? 어디일지 궁금해지는군요.”
현이의 얼굴에 기대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후공이 답했다.
“제 처소입니다.”
“지금 이 밤에 말인가요?”
“네.”
“너무 빠른 것 아닌가요?”
후공은 잠깐 무슨 말인가 몰라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하하하!”
이번엔 후공이 웃음을 터뜨렸다.
현이가 자신의 제안을 농담으로 받아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터.
현이의 원래 성격은 밝았던 것인가 보다. 또한 며칠 지나지도 않았거늘 정서적인 안정이 예상보다 훨씬 높아 보여 다행이다 싶었다.
“신녀, 안심하십시오. 잡아먹지 않습니다.”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말을 던졌다.
“대공자, 실망스럽군요.”
“하하하하!”
확인은 끝.
그리고 그것이 현이의 동의.
함께 처소로 들자, 색관조와 금섬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영물이 반겼다. 예를 갖췄다.
[색관조가 현이신녀 님을 뵙습니다.]
[그으으으으으으으으으윽!]
둘 다 태도가 극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색관조는 두 날개를 앞으로 끌어와 포권을 취하듯 했고, 금섬도 앞다리를 앞으로 모으고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후공은 코웃음쳤지만, 현이는 좋아했다.
“말하는 새와 금두꺼비라……. 너희는 정말 귀엽구나.”
[신녀,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나요. 이제 내내 행복하세요.]
[그으으으으으으으으으윽!]
금섬의 말이 길었다.
그으으윽, 해봐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길이 없지만, 그 마음은 현이에게 전해졌다.
“너로구나. 그날 나를 바라보던.”
그날…….
금섬은 알아들었다.
그날 보았다.
수중 통로를 따라 빙궁의 연못에 도착한 날이었다. 연못에서 나와 빙벽 쪽으로 와서 보았다. 그때는 무서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을 알아봐주는 것이 기뻐 금섬이 눈웃음치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윽, 그윽, 그윽!]
방금까지 진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기에 색관조가 호되게 야단쳤다.
[야, 정신 차려! 그러다 죽어!]
[그윽?]
[까르르르, 당연히 농담이지. 그러실 리 없잖아.]
[큭큭큭!]
그 말이 또 좋아 금섬이 펄쩍펄쩍 뛰었다.
현이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환영식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현이는 시선을 돌려 물었다.
“대공자, 이다음은 무엇인가요?”
단순히 대공자가 두 영물을 보여주려 자신을 청했을 리 만무했다.
빙궁의 이 밤이 있기까지 대공자는 모든 것을 조율한 이.
상황과 과정, 그 결과까지 대공자의 손바닥 위에 있었고, 모두가 따랐으며, 그대로 되었다.
대공자가 하는 말과 행동에 의미 없는 건 없다.
그렇기에 현이는 이 밤의 초대도 단순할 리 없다고 여겼다.
“선물을 드리려 합니다.”
“선물은 이미 넘치도록 받았는데도요?”
“선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치만…….”
현이는 무엇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공자는 이미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로 인해 모두가 환영해주었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주었다.
그녀로선 정녕 과분할 정도였다.
그렇게 되어 빙궁을 걷고, 스치는 바람의 감촉도 느꼈다.
이제 귀뚜라미도 보러 갈 수 있었다. 밤의 정취 속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현이에게 이보다 큰 선물은 없었다.
하지만 후공은 아니다.
부족하다 여겼다.
궁주인 현음신녀가 부탁의 말을 건넸던 20여 년 전.
그때 자신이 왔다면 현이의 지옥은 일찍 끝났을 것이다.
“공청석유를 드리려 합니다.”
“네? 그, 그게 무슨…….”
현이가 놀라 눈이 커졌다.
공청석유라면 영약 중의 영약. 천지의 기운이 담긴 영수(靈水)다. 모두가 바라는 꿈의 영약. 한 방울이 모이기까지 세월의 흐름은 말로 할 수 없고, 한 방울의 가치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걸 왜……?”
후공의 마음은 단순하다.
아깝지 않다.
그저 현이의 20년을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
90년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일 뿐.
3살 때였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잘못된 꿈을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아이. 낯선 빙궁에 와야 했던 작은 아이. 내내 마음 졸였을 시간들.
그러다 다 어그러지고, 빙벽 안에서 그 긴 세월을 보냈다.
그러니 선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따스함도 많을수록 좋다.
“그 귀한 걸…… 왜 제게?”
답이야 뻔하다.
귀하기에 귀한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것뿐.
“남아돌아서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
현이가 웃으며 울었다.
**
연회가 열렸다.
성대했고, 따스한 음률이 빙궁을 휘돌았다.
모두가 잔을 들어올린다.
모두가 기쁘게 취해갔다.
설산의 장문인이 함께했고, 빙벽 속 현이가 함께했다. 술잔이 오가며 웃음소리가 휘도는 가운데 북해빙궁의 90년 숙원은 흩날려 간다.
이런 날을 맞이한 것이 북해빙궁은 꿈만 같았다.
천공단은 언제나 그렇듯 연회를 더욱 흥겹게 했기에 분위기는 가라앉을 새가 없다.
색관조는 날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현음신녀는 잊지 않았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작게 따라 불렀다.
“낮에는 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아래 새들은 팔랑팔랑, 밤에는 달빛에 물든 노란 하늘! 까마귀가 깍깍. 낮도 좋아, 밤도 좋아! 구름 위에서 걸을까요, 까마귀를 타고 밤하늘을 날까요. 낮도 좋아, 밤도 좋아, 구름 위에서 걸을까요.”
생각해 보면 소녀일 때도 좋았다.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좋았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천공단과 함께 지낼 수 있었을지도.
천화서고 대공자와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신비한 소녀라고 칭해, 신비라고 불렸던 시간. 그 이름도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모른다.
“궁주 누나, 다 기억하고 있네? 하하하하!”
소천개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 옆에서 은앙개가 소천개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야이, 거지새끼야! 궁주 누나가 뭐냐, 궁주 누나가!”
“그럼?”
“궁주 누님이라고 불러야지.”
“하하하하, 뭐라는 거야.”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가운데 소천개가 현음에게 공손히 잔을 내밀었다.
“궁주 누님, 한 잔 따라주실 수 있는지요.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물론.”
모습으로는 더 어린 궁주가 소천개의 잔을 채웠다.
소천개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잔을 비웠다.
그 뒤를 은앙개가 이었다. 또 그 뒤로 항마삼협, 금적자며 무산쌍웅과 낭인왕, 남궁연, 언교운 설영 등이 이어가며 잔을 받았다.
천공단으로서는 실로 영광이었다.
또한 생각조차 못 해 본 멋진 광경이었다.
단주가 북해로 간다고 할 때만 해도 그저 바람 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과 같은 시간을 갖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드높은 명성.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듯,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신비한 문파 북해빙궁의 귀한 손님이 될 줄은 몰랐다.
모두 한 사람 덕분이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
천공단주.
천화서고 대공자.
여태까지의 모든 과정과 지금의 결과. 모든 경험들이 평생에 걸쳐 겪어볼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천공단의 일원이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심지어 낭인왕은 괜히 울컥해져 개처럼 짖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제갈혜도 천공단과 같았다.
백부가 간다고 했던 북해빙궁.
어쩌면 백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역시 만날 수 없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서운하지 않다. 괜찮았다.
백부가 왔다면 빙궁의 숙원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아마도 천화서고 대공자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뚱뚱해도 모두가 백부를 좋아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다시 떠오른다.
백부를 떠올리게 하는 이.
백부와 같이 말하는 이.
천화서고 대공자.
또 어느샌가 유령곡의 끔찍했던 기억도 아주 먼 옛날 일인 것처럼 날아가버렸다.
어릴 적 백부가 했던 말.
‘혜야, 기억을 흐리게 하는 방법이 있다.’
‘응?’
‘새로운 곳, 여러 장소를 여행하는 건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아픔도 빠르게 잊게 되고.’
의제인 아버지를 잃었을 때를 이야기하며 백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아무 곳도 가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훗날 이해하게 되면서, 떠올릴 때마다 펑펑 울었던 시간들.
그리고…….
지금의 풍경.
“제갈 소저, 잔이 비었습니다.”
“그렇네요. 부탁드려요.”
제갈혜는 빙긋 웃으며 말을 걸어온 대공자에게 잔을 내밀었다.
“소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신 겁니까?”
“옛날 일. 기억을 흐리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요.”
“크흠……. 갑자기 말입니까?”
“이상한가요?”
“그거 많이 이상합니다. 소저는 엉뚱한 면이 있었군요.”
“하하하!”
뚱하니 바라보는 표정만으로 제갈혜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인지 대공자의 말을 듣고 있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상할 건 없다.
그건 후공이 잘하는 일 중 하나.
“그렇게 웃으면…….”
“푼수 같다고요?”
그렇게 반문하는 제갈혜는 다음에 나올 말을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다행이구나.’
백부는 그런 식으로 말했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달랐다.
“그리 웃으니 귀엽습니다.”
이것도 후공의 진심.
언제나 봐도 그렇다.
또한 어리게만 보이는 혜가 유령곡의 일을 잊은 듯하니 좋았다. 빙궁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예상했던 말과는 달랐지만 제갈혜는 이 말도 좋았다.
대공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어른의 눈길. 그렇게 바라봐지는 것도 이제 익숙해진다.
연회의 밤이 깊어갔다.
- 대공자.
들려온 전음에 후공이 소녀를 바라봤다.
전음이 이어졌다.
소녀가 미소 짓는다.
- 그대는 엄청난 걸 지니고 다녔더군요.
공청석유에 대한 이야기.
후공은 알아들었기에 짐짓 미간을 좁혀주었다.
- 빼앗으시려는?
“하하하하!”
현음은 전음도 잊고 그만 웃고 말았다.
이 사람의 여유는 정녕 특별하다.
- 대공자, 보답할 기회 정도는 주었으면 싶군요.
북해빙궁의 빙정을 그에게 전해주기도 전에, 그 말을 미리 꺼내기도 전에 커다란 은혜를 입을 줄은 현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그리고 들려온 말은,
- 듣던 중 반가운 말씀입니다.
- 고마워요.
- 저도 고맙습니다.
현음은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현음이 입을 열었다.
“궁주로서 선언합니다. 오늘부로 북해빙궁은 천공단의 친구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천공단의 적은 북해빙궁의 적이 될 것이고, 천공단의 친구는 누가 되었든 북해빙궁의 환대를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북해의 얼음이 다할 때까지 지켜질 것입니다.”
빙궁인들의 함성이 뒤를 이었다.
“북해의 얼음이 다할 때까지!”
“북해의 얼음이 다할 때까지!”
“북해의 얼음이 다할 때까지!”
떠나갈 듯한 함성이 빙궁을 휘돌았다.
그 함성을 듣는 천공단은 누구 할 것 없이 말로 할 수 없는 뿌듯함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새외의 신비 문파인 북해빙궁이 천공단이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