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98화 (198/460)

198화. 무흔신투.

연회로부터 열흘.

작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어느 때인가 시간은 빠르게 지난다.

즐거울 때, 아쉬울 때, 그리워질 것이 분명할 때.

천공단과 보내는 시간, 빙궁이 그렇게 느꼈다.

궁주 현음신녀를 비롯 모두가 아쉬워하는 가운데 작별인사가 오갔다.

“대공자,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조만간 뵙도록 하죠.”

“조만간이 십 년, 이십 년은 아니겠지요?”

“하하, 그것도 괜찮군요. 다음번에 만날 때는 숙녀의 모습일 테니, 그 모습도 기대됩니다.”

그 농담에 현음이 웃음지었다.

대공자는 갑자기 날아온 유성. 별빛처럼 반짝일 뿐 아니라 유쾌하기도 하다.

“대공자, 본 궁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청해주세요.”

“물론입니다.”

뒤를 이어 천공단이 현음에게 예를 갖췄기에 후공은 물러나주었다.

그곳에서 현유와도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다음 기다리고 있는 건 현이신녀.

현이가 미소지었다.

“대공자, 제가 가보고 싶은 곳. 기억하고 있나요?”

그녀가 가보고 싶다는 곳.

알고 있다. 천화서고.

그리고 그 너머 여태 가보지 못한 많은 곳을 다니며 보고 경험하길, 후공은 진심으로 바랐다.

후공은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현이신녀, 손을 내밀어보십시오.”

현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 갸웃했다.

그러다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후공이 잡았다.

천향의 무향을 남겼다.

“부근에 오시면 마중나가겠습니다.”

현이로서는 손을 잡아올 줄은 몰랐던 터. 멍해져 손을 내려다봤다.

맞잡은 손.

따스하게 전해지는 감촉.

하지만 멍해진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친 탓. 현이는 왜인지 마음이 뒤흔들렸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고, 마음이 진탕되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이 떨어진 다음에도 멍하니 바라보자, 천화서고 대공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현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조만간…….”

“신녀. 조만간이 십 년, 이십 년은 아니겠지요?”

방금 전 사저인 현음이 했던 말을 대공자가 다시 했기에, 현이는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에요.”

“좋군요.”

손이 놓였다.

왜 그것이 아쉬운지 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돌아서는 길, 천공단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다들 안녕! 신비 누님, 또 봐요!”

“빙궁은 최고야! 멋져어어어!”

“빙어 잘 먹고 갑니다아아아!”

“누가 시비 털면 천공단을 불러주십시오오오!”

“우리 잊으면 안 돼요!”

“누님들 또 봅시다아아아아!”

마지막으로 나이에 민감한 금적자가 누님들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빙궁은 자신들이 괴상한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멋진 사람들.

그 이름은 천공단.

잊을 리가.

**

그로부터 두 달여.

안휘 북부의 한 반점에 추레한 노인이 들어섰다.

정오를 넘긴 시간이라 손님이 많았고, 들려오는 소리도 다양했다. 노인은 다가온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하고는 손님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고단한 일상, 우스꽝스러웠던 일들, 혹은 험담들.

다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원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장문인, 제가 크게 대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장주, 제가 음식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곳 음식이 탁월해서 그렇습니다. 퀄퀄퀄…….”

“그렇다곤 해도.”

“퀄퀄퀄, 장주께서도 드셔 보시면 제가 왜 이곳을 원했는지 아시게 될 것이외다.”

처음에는 해괴하게 웃는 놈이 다 있네,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기다리던 대화가 이어졌다.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퀄퀄, 저도 동감이외다. 대공자의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는데 어찌 된 게 통 만날 수가 없으니 서운한 마음이 금할 길이 없소이다. 퀄퀄퀄퀄…….”

“장문인께서도 소식을 들은 것이 전혀 없습니까?”

“퀄퀄, 북교산에서 유령곡의 패악을 막은 뒤로 종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한 달 전쯤 대공자의 아우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물어보니, 소식이 없어 자신들도 답답하다고 하더이다.”

“거참, 기괴합니다그려.”

그 말이 끝났을 때였다.

콰앙!

누군가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에 반점 내 모든 손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노인도 바라보니 용모가 헌앙한 젊은 검객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에 젊은 검객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했다.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이 동네 괴이하구나. 미친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괴상하게 웃는 놈에다가, 잘 먹고 있다가 탁자를 내리치는 놈까지.

노인은 시선을 거둬들였다. 음식이 나왔기에 식사를 서둘렀다. 원하던 정보는 얻었고, 이제 실행에 옮길 때였다.

‘기다려라, 천화서고! 이 무흔신투 님께서 털어주마!’

*

강호에 명성 높은 도둑이 셋이 있는데,

그들의 별호는 각각 금취객, 지귀객, 그리고 무흔신투였다.

셋 중에 누가 가장 뛰어난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금취객은 금에 환장한 자로 닥치는 대로 금을 취했고, 지귀객은 땅을 파고드는 데 탁월했다. 빠르고 깊게 잘 파고 들어갔다. 마지막 무흔신투는 흔적이 없었다.

세 명 모두 각각 뛰어난 점이 있어, 누굴 첫손에 꼽아야 하는가는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지독한 면모라면 한 사람이 꼽혔다.

무흔신투(無痕神偸).

흔적이 없다는 ‘무흔’은 단지 그의 도행(盜行)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모조리 쓸어가버리는 탓에, 그가 턴 곳은 먼지만 날리기에 ‘무흔’이었다.

그런 무흔신투의 이번 목표는 천화서고.

신출귀몰하다는 천화서고의 대공자가 없는 지금이 기회였고, 그는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천화서고의 위치는 이미 파악해둔 터.

느긋하게 신형을 날려 산을 오르려니 한순간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뒤돌아보니 아까 반점에서 탁자를 후려갈긴 젊은 검객이 뒤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모른 척 외면하려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어르신!”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젊은 검객이 신형을 끌어올려 순식간에 눈앞에 이르렀다.

신법이 빠를 뿐만 아니라 매끄럽기 그지없어, 무흔신투의 눈매는 절로 가늘어졌다.

“무슨 일인가?”

“혹시 천화서고에 가시는 길입니까?”

“그렇네만.”

이 길에 닿는 곳은 천화서고뿐.

둘러대지 않고 바로 답했다.

“하하하, 잘됐습니다.”

“자네도?”

“네, 그렇습니다. 아참, 제 소개를 잊었군요. 저는 모용세가의 모용진이라고 합니다. 어르신의 존성대명은 어찌되시는지요?”

“호열자라고 불리고 있네. 천공단의 일원이지.”

그 말에 모용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정말이십니까?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어쩌면 천공단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맞았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무흔신투는 떨떠름해졌다.

상대가 모용세가의 자제라는 점과 또한 천공단을 안다는 점에서 뭔가 삐거덕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럴 것 없다.

모용진은 천룡대전에서 천공단주에 감복한 뒤 호시탐탐 천공단에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나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번에 용기를 낸 건, 진주언가의 언교운이 천공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

언교운 외에도 천룡대전 이후 몇 명 더 늘었다는 소문도 들었던 터라 자신도 간청해보려 온 참이었다.

절친인 난화서원의 묵영의 독려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달려온 길에 반점에서 들었다.

대공자와 천공단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대화였다. 순간 왜 자신만 이렇게 재수가 없나 싶어 탁자를 후려갈겼거늘, 눈앞에 떡하니 천공단과 마주했으니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럼 천공단주께서도 곧 도착하는지요?”

“그건 아니네. 난 심부름을 왔을 뿐이지.”

“아…….”

모용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 ‘호열자’라는 이 노인을 따라가면 천공단주를 만날 수 있다 싶어 금세 싱글벙글이 되었다.

“어르신, 가시죠.”

“그러지.”

무흔신투는 표독스러워지려는 자신의 눈빛을 애써 감추고 신형을 날렸다.

이런 애송이를 다루는 건 식은 죽 먹기.

굳이 암수를 쓸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절벽 앞에 이르러 멈췄다.

모용진은 왜 이곳에서 멈추는지 묻는 대신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이 절벽 너머로 펼쳐진 광경이 환상인 것이로군요.”

“허허, 자넨 제법 안목이 있군.”

“하하, 과찬이십니다.”

그때 들려왔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목소리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휘돌아 귀를 파고들었다.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신비하기 짝이 없었기에, 또 모용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아아아, 굉장합니다. 하하하하하!”

“진정하게.”

모용진이 좋아할수록 무흔신투는 더욱 떨떠름해졌다. 자신은 천화서고를 털어버리려고 왔는데 곁에 있는 자가 너무 좋아하니 기분이 자꾸 가라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흐음…….”

무흔신투가 침음성을 흘린 후 절벽 너머로 답했다.

“천공단의 일원인 호열자라고 하오. 단주께서 심부름을 보내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대공자께서?”

“그렇습니다.”

“천공단에 호열자는 들어보지 못했다. 돌아가라.”

“그러할 겁니다. 낭인왕은 들어보셨습니까?”

“알고 있다.”

“낭인왕 이후 북교산에서 인연이 닿아 천공단에 들게 되었습니다.”

“북교산? 그러한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대의 곁에 있는 이는 누구인가?”

즉시 모용진이 크게 답했다.

“천룡의 가문 중 하나인 모용세가의 모용진입니다. 대공자와는 천룡대전에서 인연을 맺었고, 난화서원의 천재 묵영과도 어릴적부터 교우한 사이입니다. 대공자를 뵙고자 먼 길을 떠나 왔습니다. 대공자께서 출타 중이신 건 아오나, 부디 천화서고를 견식할 기회를 주십시오.”

“…….”

답은 나오지 않았다.

침묵은 길었다.

다시 답이 들려온 건 일다경(15분)이 지난 뒤였다.

“두 분을 환영합니다. 들어오십시오.”

절벽의 환영이 스러져가고, 길이 드러났다.

그 너머로 화려한 전각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모용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우와아아아아, 굉장합니다. 하하하하하!”

“…….”

무흔신투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

무흔신투의 안내를 맡은 건 부몽이었고, 윤은 모용진을 안내했다. 각각 다른 처소로 안내했고, 쉬고 있으라는 말을 전한 뒤 돌아섰다.

무흔신투는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 소리를 귀담아들으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모용진은 달랐다.

덩그런히 처소에 있으려니, 왁자지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들을 본 순간 모용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천공단이었다.

“모용 형아, 오랜만이야.”

“여길 또 어떻게 찾아왔대?”

소천개와 은앙개가 헤실거렸고, 그 뒤로 남궁연과 언교운도 보였다.

“진아, 혼자 온 거냐?”

“무턱대고 여길 오면 어떡해?”

남궁연과 언교운의 말에 모용진이 더듬거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그럼 단주의 심부름을 왔다는 호열자라는 노인은?”

“호열자? 하하하하하!”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 말에 답한 건 무산쌍웅이었다. 모용진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험악한 얼굴들이라 보는 것만으로 위축되었다.

누구냐고 묻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모용진의 눈에, 연이어 천공단의 모습이 들어왔다. 금적자, 항마삼협, 낭인왕 등이었다.

“그럼 대공자께서도?”

“응, 당연하지. 형아는 지금 연공 중이야.”

빙궁에서 돌아온 건 나흘 전.

누군지 몰라도 이미 노인은 죽은 목숨이었다.

천공단이 깔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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