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00화 (200/460)

200화. 풀과 나무 같은 사람들이라며!

겨울 진법 안.

긴 호흡과 함께 후공이 운기를 정리했다.

눈을 떴을 때 두 눈동자에 자줏빛 광채가 번쩍였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후공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간다.

이번 수행의 성취도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화극이 동조하고, 빙정을 온전히 흡수한 덕분에 단숨에 7성 중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큰 도약이다.

만약 빙정이 없었다면 6성 후기에 그쳤을 터. 그런 점에서 이번 북해빙궁으로의 여정은 여러모로 뜻깊다 할 수 있었다.

‘혜가 복덩어리로구나.’

혜가 아니었다면 북해빙궁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되었다면 빙궁과 현이의 지옥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성취를 알아봄인가.

우우우웅.

옆에 내려놓은 검령이 소리냈다.

검령도 알 수 있었다.

검연의 공능으로 이어져있고 주인과의 유대는 점점 깊어져 가는 탓에 느껴진다. 주인의 힘은 더욱 강렬해졌다.

주인이 몸을 일으켰기에 검령은 검집째로 날아가 허리에 휘감겼다.

“후후.”

후공은 검령을 향해 한번 웃어준 다음, 뒷짐을 진 채로 환명을 띄웠다. 순간 소리 없이 서른두 개의 환명이 빼곡히 떠올라 주위를 에워쌌다.

공간이 흐물거리는 탓에, 환명에 뒤덮인 후공의 모습은 마치 큰 원형의 아지랑이 안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이제 환명은 서른둘.

모든 환명을 온전히 의식만으로 제어가 가능해진 덕분에, 손을 쓰는 번거로움은 아예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환명의 유지시간도 비약적으로 늘어, 거의 반시진(약 1시간)에 이르렀다.

환명을 거둬들인 후 ‘지무(地無)’를 시험했다.

지무는 체공의 묘.

땅의 힘, 지력을 상쇄시킨다.

또한 7성의 경지에서부터 시작된다.

지무를 운용하자,

스윽!

발이 지면에서 한 뼘 정도 떠올랐다.

그 상태로 천천히 허공을 걸었다.

마치 투명한 계단을 디뎌가는 것처럼 위로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일곱 걸음째에 이르러 멈추었고, 지무의 운용이 그치자 그 상태에서 천천히 하강했다.

후공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걸음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지무가 시작되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었다.

지무의 온전한 운용은 9성.

지금 당장은 허공답보의 형태이나, 그때가 되면 허공을 가를 수 있다. 환명이 없이도 허공을 질주할 수 있게 된다.

몸을 돌려 눈높이로 둥실 떠 있는 책자를 잡았다. 뒤집은 순간 풍광이 바뀌며 서재가 되었다.

서재 안.

언제 나오시든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던 양소가 예를 갖췄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후공이 피식 웃었다.

“양소, 뭘 알고 말하는 것이냐?”

“모릅니다!”

“크흠, 알고 말해야지.”

그 말에 양소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성취는 있으셨는지요?”

“넌 몰라도 된다.”

“넵!”

그럼에도 양소가 씩씩한 모습을 보였기에 후공이 너털거렸다.

‘귀여운 녀석.’

“불청객은?”

“여전히 영흑진에 갇힌 상태이며, 식음을 끊었습니다. 이틀이 지났습니다.”

영흑진(永黑陣)은 영원한 어둠의 진법.

벗어날 수 없는 어둠.

한번 찾아온 밤은 계속될 뿐 아니라 점점 어두워진다. 그것이 갇힌 자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수고했다.”

“바로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아니다. 갈 곳이 있다. 돌아온 다음에.”

“네.”

밖은 새벽.

천화서고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후공은 색관조를 불러 함께 천화서고를 벗어났다.

신형을 날려 산야의 중턱 쪽으로 향했다.

[주인님,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여기.”

산의 중턱에 이르러 멈췄다.

그러자 색관조가 떠올랐는지 요란을 떨었다.

[주인님, 이거 그거죠? 그거!]

“그래.”

[그윽?]

부록처럼 함께 온 금섬만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색관조는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향으로 주인과 이어지던 날.

그날 주인은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려 밖으로 나왔었다.

오늘 밤도 비슷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우측 숲 방향, 연계의 한계지점까지 날아가 그곳 숲속에 있어라. 뭔가 날아들 것이나 겁먹을 것 없다.”

[넵!]

곧바로 색관조가 날아올랐다.

연계는 향의 연계. 보이지 않는 향의 선을 따라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6백여 장을 날다 멈추려던 색관조가 갸웃했다.

[응?]

[그윽?]

금섬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우와아아아, 주인님 굉장하셔. 거리가 늘어났어. 연계가 끊어지지 않아.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

그렇게 날다 연계가 끝난 지점은 거의 천여 장쯤이었다.

까마득하게 멀었다.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는 평야에서 마주 보고 있다 해도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거리였다.

이는 후공이 다루는 천향의 공법이 드디어 천향삼주를 지나 천향사주에 이른 결과.

색관조의 움직임이 멈췄기에 후공은 우수를 들어올렸다.

스윽.

손가락 안쪽으로 다섯 개의 하얀 빛줄기가 떠올랐다.

호신강기마저 뚫어내는 가느다랗고 강력한 기운.

능오침이다.

신체에 침투한 순간 혈관을 역으로 타고 흘러 심장을 터뜨린다.

하지만 본래 능오침의 용법은 다르다.

장거리 암살기.

과거 12성의 경지에선 의식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후 능오침으로 타격했다.

뭔가 날아든다 싶으면 상대는 죽는다.

지금은 비록 7성에 불과하나, 의식을 대체할 수 있는 천향이 있기에 가능해졌다.

천향이 삼주에서 사주에 이르면서 거리가 늘어나고 더 정교해진 것도 한몫한 터.

이제 능오침은 천향의 선을 타고 날아간다.

소매를 떨쳐낸 순간, 다섯 개의 빛줄기가 우측 숲속으로 날아갔다.

스슥, 스스슥! 스슷!

퍼퍽!

[무슨 소리지?]

천여 장 너머 숲속 나무 위에 내려앉아 있던 색관조가 눈을 연신 깜박여댔다.

금섬도 들었다.

[그윽?]

나뭇잎 스치는 소리, 나뭇가지가 꿰뚫리는 소리였다.

무언가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 눈에 보였다.

다섯 개의 하얀 빛줄기가 짓쳐들고 있었다.

퍼퍼퍽!

나무를 관통하고도 속도가 줄지 않았고, 방향은 자신들 쪽이었다.

[뭐, 뭔데?]

[그으으윽?? 극극극!]

금섬이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말했고, 색관조도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다 주인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뭔가 날아들 것이나 겁먹을 것 없다.’

[이거 주인님께서 쏘아보내신 거야!]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

다른 누군가였다면 주인이 모를 수 없다.

[그으으으으으으…….]

[향의 선, 그래 향의 선을 따라서 날아오고 있어. 근데…….]

겁먹지 말라 하셨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가공할 속도로 짓쳐들기에 색관조와 금섬은 하얗게 질려갔다. 이미 다섯 개의 빛줄기는 이미 눈앞.

[무, 무서워. 으어어어어어어어!]

[그아아아아악!]

두 영물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관통된다 싶은 순간, 다섯 빛줄기가 부서져내리며 흩어졌다.

색관조가 실눈을 살며시 떴다.

[금섬아, 나 살았냐?]

[그윽.]

[와아아, 너도 살았구나. 우리 살았다! 우리 살았어!]

[극극극.]

[뭐? 넌 그럴 줄 알았다고? 개소리 작작하시고요.]

[큭큭큭.]

그 천여 장 너머.

후공은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능오침과 천향은 잘 어우러졌고, 마지막 소멸까지 온전히 통제되었다.

그사이 돌아온 색관조와 금섬이 요란을 떨었다.

[주인님, 저희는 전혀 겁먹지 않았답니다. 아주 초연하게 바라봤어요.]

[그윽, 극극극!]

다 들었다.

요란한 비명소리.

그래도 버티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기에, 후공은 이들이 가상하고 기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겁먹지 않았을 테지.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겁먹었어요오오오오!]

[그으으으으으으윽!]

*

다음 날 오전.

후공은 모용진을 불러오라 한 후 먼저 자리했다.

송화가 들어서며 탁자에 찻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공자님, 있잖아요.”

“응?”

“모용 공자 말인데요, 사람이 이상해요.”

“왜?”

“네, 그저께부터 갑자기 강아지처럼 뛰면서 엄청 짖어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돌아버린 거 아니냐며 편 의원이 놀라서 달려왔을 정도였다니까요.”

“허허, 그럴 리가.”

하지만 그때 들려왔다.

“왈왈, 크르르르 왈왈. 왈왈왈~~~. 크르르르르르~~ 왈왈왈왈~~ 왈왈왈. 크르르르, 왈왈왈…….왈왈, 크르르르 왈왈. 왈왈왈~~~. 크르르르르르~~ 왈왈왈왈~~ 왈왈왈~~~.”

“어머, 어머! 공자님, 들리시죠? 또 시작했나 봐요. 저랬다니까요. 명문세가의 집안에 외모도 멀쩡하게 생겼으면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도대체 지금 누굴 만나러 오는데 짖으면서 오는 건지. 어? 공자님, 공자님?”

주인이 멍해진 표정이라 송화가 다급히 불렀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합격.”

“뭐가요?”

“어쨌든 합격.”

*

그 시각,

무흔신투는 절망 속에 있었다.

‘밥을 안 줘.’

밥뿐인가. 물도 안 준다.

사람을 가둬놓고 보러 오지도 않는다.

밖에 사람은 지나다니는데 그건 모두 환영.

빠져있는 건 절망만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도 빠져 있다. 조금씩 어두워져가더니 이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진법의 변화를 접하고 나니 두려움이 커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여길 왜 와가지곤…….’

천화서고를 얕잡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다. 천화서고를 하찮게 여긴 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컸을 뿐.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다.

그 가운데 스멀스멀 피어나는 건 원망.

‘금취객, 지귀객…… 이 상놈의 새끼들.’

뿌드득.

두 놈을 떠올리자, 무흔신투는 이가 갈렸다.

두 놈이 아니었다면 천화서고를 털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취객과 지귀객이 워낙에 대단한 일을 해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명성에 위기감을 느낀 것이 원인.

두 놈이 벌인 일은 압도적으로 위대해,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러다 떠올렸다.

좋다! 그럼 난 천화서고를 털어주마!

이렇게 호기롭게 나섰건만 감금.

여태 잡혀본 건 오직 한 사람.

후공에게 잡혀봤을 뿐인데, 천화서고에 갇히게 될 줄이야.

‘죽자, 죽어!’

천하제일인에게 잡힌 건 흠이 아니다. 하지만 천화서고에 갇힌 건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였다.

그렇게 무흔신투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을 때였다.

순간 엄청난 광채가 쏟아졌다.

‘빛?’

어둠 속에 있다 보니 눈부심이 말로 할 수 없어 무흔신투는 황급히 눈을 감았다.

이내 슬며시 눈을 뜨면서 주위를 바라보자, 주위 풍광은 어느샌가 달라져 있었다. 앉아 있는 곳도 어이없게도 전각 내부 방이 아니라 땅바닥이었다.

진법의 묘용에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떠들썩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열자, 오랜만이네.”

“성숙노괴는 잘 계시고?”

“이게 몇 달 만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새 폭삭 늙어버렸어.”

천공단이 깔깔대며 다가왔다.

[정지, 정지, 정지!]

[큭큭큭.]

색관조와 금섬도 함께였다.

무흔신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발……. 이미 와 있었구나.’

무흔신투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금적자의 얼굴은 알고 있었기에, 나타난 이들이 천공단임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며 멋쩍게 웃었다.

“호열자를 사칭한 건 미안하외다. 난 그저 천화서고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하룻밤 묵어가려 했을 뿐이라오. 한데 천화서고가 이렇게 과한 대접을 할 줄은 몰랐구려. 나도 이틀 내내 고생했으니 이쯤에서 원만하게 정리합시다.”

천공단이 뚝 걸음을 멈췄다.

‘통했나?’

무흔신투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쓰잘데기없는 희망.

천공단은 원만함 따위 모른다.

무뢰배 중에 최상급 무뢰배.

멈춘 건 도약을 위함일 뿐.

일제히 무흔신투를 향해 날아들었다.

“어어? 뭐야, 뭔데? 잠깐, 잠깐만!”

무흔신투의 당혹성은 이내 비명으로 바뀌었다.

반격이고 뭐고 할 틈 같은 건 없었다. 쓰러져 자근자근 짓밟혔다.

“이 도적놈의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하룻밤을 묵어? 이 하룻강아지 같은 놈의 새끼가 변명에 성의가 없어!”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

그렇게 패버린 다음, 뻗어버린 무흔신투의 다리를 낭인왕과 모용진이 각각 하나씩 잡고 질질 끌고 갔다.

“가자, 도적놈아.”

그렇게 무흔신투는 질질 끌려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무흔신투는 묻지 않았다.

물어보나마나 천공단주, 천화서고 대공자 앞일 터.

‘천화서고, 이런 곳이었냐.’

수하들을 보면 두목의 성향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원망하게 된다.

‘시발……. 대체 어떤 새끼가 천화서고에 풀과 나무 같은 사람들만 있다고 했냐. 죽여버릴라.’

질질질 끌려가며 머리며 등짝이 돌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천공단은 그런 사정을 신경 쓰는 이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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