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01화 (201/460)

201화. 뭘 훔쳤다고?

후공은 풍화정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풍화정은 산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기에,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곳.

고요함은 이내 소란한 소리에 깨어져나갔다.

두 아우와 제갈혜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갈 소저, 불청객은 누구일 것 같은가요?”

“이제 알게 되겠죠. 하지만 대단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해보여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할까요? 여태 본가를 털려는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거든요.”

“부몽, 넌 강호를 모르는구나. 온갖 해괴한 일이 우습게 일어나는 곳이다.”

“형님은 늘 저랑 같이 있었으면서, 꼭 강호를 종횡하며 무쌍이라도 찍은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야, 부몽! 넌 꼭 그렇게 이 형의 정곡을 찔러야 속이 시원하냐!”

그 말에 제갈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천공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질질질, 불청객을 끌고 오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것이 여간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 풍화정에 도착했다.

“앉아.”

낭인왕이 무흔신투를 발로 차며 채근했다.

무흔신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새색시처럼 두 다리를 포개어 앉았다. 그것이 또 폭언을 불러왔다.

“너 뭐하냐, 왜 요염한데? 똑바로 무릎 안 꿇어!”

“…….”

‘시발놈.’

속으로만 욕하며 무흔신투가 공손히 무릎 꿇었다.

그렇게 바라본 젊은 서생.

정자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미소 짓고 있었다.

‘이자가 천화서고 대공자로구나.’

모두 서 있고, 혼자만 앉아 있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 없다.

‘근데…… 왜 웃지?’

후공이 웃은 건 알아보았기 때문.

녀석이 역용을 하고 있었지만, 후공의 지금 경지는 7성 중기.

역용 여부뿐 아니라 이젠 역용 전 본래의 얼굴도 간파할 수 있다.

‘무흔신투, 너로구나. 내 전서구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신법이 뛰어난 놈들은 전서구보다 활용도가 좋아, 몇몇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었다. 그중 무흔신투는 원적자와 더불어 최상의 전서구.

원적자는 대머리도 아닌 주제에 머리를 밀고 다녀서 반짝반짝 멀리서도 잘 보이는 장점이 있었고, 무흔신투는 신법뿐 아니라 역용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활용성이 좋았다.

하지만 아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

“역용을 풀어라.”

“역용? 저기 대공자, 역용 같은 건 안 했네만.”

어떻게 알아본 건가? 내심 흠칫했지만 무흔신투는 일단 시치미를 뚝 뗐다.

그것이 화를 불러왔다.

천공단이 머리를 후려갈겨댔다.

“두목이 풀라면 풀어!”

“형님이 했다면 한 거야!”

“얼마나 더 맞아야 정신 차릴래!”

“존댓말, 존댓말!”

마지막으로 금적자가 말투를 지적하며 금피리로 머리를 두들겼다.

무흔신투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역용을 해제했다.

추레하고 볼품없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술궂은 노인의 얼굴이 되었다.

천공단이 소란스러워졌다. 딱 도둑놈처럼 생겼다느니 뭐 이따구로 생겼냐며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아니다.

“하나 더.”

천공단주의 말에 탄성이 뚝 그쳤다.

다들 뭔 소리인가 갸웃했지만, 무흔신투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눈앞의 젊은 서생이 자신의 이중 역용을 알아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첫 번째는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안쪽의 역용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어,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은 현 강호에서 손에 꼽힐 정도인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언 형.”

“네, 두목.”

언교운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나섰다.

“지금부터 변명이 나오면 하나씩 썰어갑니다.”

“네!”

스릉.

언교운이 무흔신투의 왼팔을 들어올려 잡고 검을 가져다댔다.

무흔신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들려온다.

“하나 더.”

이쯤이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간파당한 데다, 언가놈의 눈빛도 어떻게 된 게 싱글벙글할 뿐이라 전혀 망설일 것 같지 않았다.

이내 두 번째 역용을 해제했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신수가 훤하고 인상 좋은 노인의 모습.

그 광경에 천공단이 또다시 탄성을 내질렀다. 얼굴이 아깝다느니, 이 얼굴로 도적질을 하고 다닌 거냐며 관상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떠들어대면서 머리를 후려갈겨댔다.

소란은 이내 가라앉았다.

대공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별호.”

“…….”

무흔신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실토할 별호인가.

하지만 팔에 겨눠진 검날이 옷을 찢고 살에 닿는다.

“무흔…… 신투.”

“어어?”

“대도 무흔신투라고?”

“우와와아아아아아!”

후공은 알고 있었기에 담담했지만, 천공단은 아니었다. 별호를 듣자마자 입이 쩍 벌어졌다.

“쩔어어어어!”

“이거 영광이야, 행운이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진작 말했으면 안 팼을 거 아냐!”

천공단이 누구 할 것 없이 호감을 보였다.

윤과 부몽만 들어본 적이 없어 멍청해졌다.

“소저, 무흔신투가 그렇게 유명한가요?”

“대단한 인물이죠.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니. 천의 얼굴을 지녀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모르는 이인데, 오늘 보게 되었군요.”

“오오오오!”

“오오오오!”

그제야 윤과 부몽도 탄성을 내질렀다.

죽상을 하고 있던 무흔신투는 뜻밖의 반응에 머쓱해졌다.

그래도 알아봐주고 인정해주니 기분이 좋아져, 괜스레 ‘잘 살아온 건가’ 같은 생각이 들면서 절로 웃음이 났다.

거기에 후공이 찬물이 끼얹었다.

“그래서?”

“네?”

무흔신투가 급 긴장해 얼굴이 딱딱해졌다.

“나는 내 사람이나 내 물건을 건드리는 자를 살려두는 사람이 아니다.”

무심하기 이를 데 없어 무흔신투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바로 머리를 땅에 쿵쿵 박았다.

“살려주십시오오오오!”

상대는 보자마자 자신의 이중 역용을 알아본 자.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경지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거기에 누구 할 것 없이 화려한 면면을 지닌 천공단의 수장.

최근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나, 심히 과장된 것이라 여겼거늘 직접 대면하니 실감했다.

그래서 감각이 말해온다.

죽는다.

방금까지 환호하던 천공단도 어찌된 일인지 다시 살기등등해졌다. 이는 생사여탈권이 오롯이 천공단주에게 있다는 의미. 여기에서 말 한마디 잘못 나가면 끝이란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다.

쿵쿵쿵!

“살려주십시오. 다, 다시는 천화서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살려달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보물로 보상하겠습니다. 크게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보물은 나도 넘쳐난다만. 그래서 네가 본 서고를 털려고 온 것이 아니냐?”

“…….”

무흔신투는 말문이 콱 막혔다.

우문현답이었다.

이리되면 금덩이든 뭐든 보통 보물로는 씨도 먹히지 않을 터.

‘생각하자, 생각.’

즉시 여러 보물을 떠올려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떠올랐다.

보물이란 것이 꼭 만져지고 보여야만 보물인가.

아니다. 사람이 보물일 수도 있고, 귀한 정보도 보물일 수 있다.

“이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특급 정보가 있습니다.”

비록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팔 수 있는 건 뭐든 팔아야 했다.

“들어보자.”

“금취객과 지귀객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있다치고.”

“그 두 놈이 근자에 엄청난 도행을 벌였습니다. 저는 엄두도 못 내고, 할 생각도 없는 일이었지요. 근데 해냈습니다.”

“뭘?”

“천하제일인.”

“응?”

후공이 갸웃했다.

왜 갑자기 자신이 거론되는가.

“그 두 놈이 천하제일인의 세 자루 신검을 훔쳤습니다.”

“…….”

이제 말문이 막힌 건 후공.

듣고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빠르게 깜박였다.

“방금 뭐라고?”

“후, 후공의 세 자루 신검을 훔쳤습니다.”

엄청난 발언에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통했나?’

통한 듯싶다.

대공자가 넋이 나가버렸고, 둘러보니 천공단도 하나같이 멍해져 있었다.

그렇게 둘러보며 내심 실실거리고 있자니,

짜악!

뺨이 날아갔다.

바라보니, 아름다운 처자.

“사람이 되어 어떻게 그런 짓을!”

제갈혜였다.

무흔신투가 얼얼해진 뺨을 만지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소저, 그거 내가 한 짓이 아니고요…….”

그걸 모를 리가.

그저 도둑놈이란 공통점이 화를 불러온 것뿐이었다.

천공단의 성토가 뒤따라왔다.

“그걸 왜 훔쳐! 이 도적놈아아아아!”

“이 도적놈의 새끼들, 진짜 답이 없구나!”

“인간적으로 후공의 물건은 건드리면 안되는 것 아니냐!”

“후공이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냐, 이 년이 지났냐!”

“죽어, 이 새끼야! 죽어어어!”

후공이 손을 들었다.

즉시 천공단이 진정하며 고요해졌다.

무흔신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세히.”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얼마전 금취객을 만났습니다. 그놈이 떠벌리며 자랑하길…….”

그렇게 무흔신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신검 탈취를 제안한 건 지귀객.

금취객은 처음 그 말을 듣고 웃어넘겼다고 했다.

무림맹의 진법은 귀곡자가 설계한 것인데 그걸 어떻게 뚫고 들어가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설령 뚫어낸다 해도, 천하십객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무림맹에 들어가는 건 이쯤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지귀객이 말한다.

현재 천하십객이 자리를 비웠노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천하제일인의 무덤은 무림맹을 두르고 있는 천요산에 위치해 있고 그곳은 진법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이니 땅을 파고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금취객은 미심쩍었답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그렇게 쉽다면 혼자 하면 될 걸, 왜 자신에게 제안하냐고 말이죠.”

“그랬더니?”

“지귀객이 답하길, 혼자는 너무 무섭다고 했답니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확인을 위해 제갈혜를 불렀다.

“제갈 소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제갈혜는 이해했다.

“맞아요. 신검들은 함께 들어가 있어요.”

말하고 나니 제갈혜는 더욱 분노에 사로잡혔다.

신검을 탈취했다는 의미는 무덤 속 관을 열었다는 뜻이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그때 들려왔다.

“찾으러 가죠.”

“대공자…….”

제갈혜의 얼굴에 떠오르는 건 고마움.

그렇지 않아도 부탁해보려 했던 터에 대공자가 선뜻 나서준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후공의 일.

후공으로선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번, 쾌, 친.

애검을 회수한다.

무흔신투에게 시선을 주었다.

“신투, 금취객의 은신처는?”

“은신처까지는 모릅니다만, 만났던 곳이 장강수로채 부근입니다. 금취객이 동정용왕과 깊은 친분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가 안내한다.”

“……네.”

무흔신투가 죽상을 하고 대답했다.

이어 후공은 제갈혜를 바라봤다.

“제갈 소저, 무림맹으로 가서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네,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설 소저와 금적선생께서 동행해 주십시오.”

“그러지.”

“네.”

“색관조를 딸려 보낼 테니 바로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그렇게 함세.”

**

그날 오후.

천화서고는 고요해졌다.

대공자와 천공단이 떠난 빈자리는 크기만 했다.

그리고 노가주가 처소에서 씩씩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훌쩍 떠나!”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윤과 부몽이 마음을 달랬지만 노가주의 씩씩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돌아오면 계절이 바뀌어 있는데 내가 어찌 진정한단 말이냐! 게다가 왜 천화서고가 무림맹주의 신검을 찾으러 다녀야 하는지, 이 할애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너희는 이해가 되느냐?”

“할아버지, 이건 다 철금회주 때문이에요.”

“왜?”

“철금회주가 선물한 검이 후져서 큰형님은 새로운 검을 찾고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붓을 찾아다니지 않고 왜 검을 찾아다니냐는 말이다아아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