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02화 (202/460)

202화. 마주하면 친절해진다.

보름 후.

후공은 반점의 이 층 창가에서 동정호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지만 여전하다.

바다를 보는 듯 드넓고, 아름다운 풍광.

동정용왕도 떠올랐다.

역대 동정용왕 중 최고의 무위.

잠수 실력이 뛰어나, 수중을 탐색할 일이 생길 때면 불러다 잠수를 시키곤 했다. 수중을 탐색하는 데 동정용왕보다 나은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물론 지금은 더 뛰어난 존재가 있다.

금섬.

그나저나 녀석의 부인이 독문 출신이었던가?

뭐, 상관없는 일.

시선을 돌려 반점의 손님들을 눈에 담았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단위의 손님, 상인들,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 그리고 두 사내……. 탁자 옆에 칼을 세워두고 대화 한마디 없이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다.

두 사내는 이곳 반점에 들어설 때 따라 들어온 이들.

사내들끼리 말없이 술을 마시는 것이야 흔한 광경이지만, 한 번씩 흘깃거리며 눈빛이 번뜩이는 건 이례적이다.

저들이 귀 기울이고 듣고자 하니 들려주자.

후공은 시선을 거두고 항마삼협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항마삼협께서 동정용왕과 친분이 있으시다고요?”

“네, 형님. 친분이 두텁습니다.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크흠…….”

친분이 두터울 리 만무하다.

이놈들이 누구와 두터운 친분을 쌓을 놈들인가. 제대로 쌓은 친분은 천공단이 처음일 터. 침음성과 함께 떠오른 못마땅한 표정에, 이열이 껄껄 웃었다.

“형님,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어느 정도입니까?”

“싸웠습니다.”

“그다음은?”

“술 한잔 했습니다.”

“그다음은?”

“만난 적 없습니다.”

“…….”

그럼 그렇지.

당당할 때부터 알아봤다.

친분에 두터운은 왜 붙인 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항마삼협이 머리를 긁적였고, 천공단이 깔깔거렸다.

하지만 괜찮다.

중요한 건 어떤 반응이 나오냐일 뿐.

용건이 있음을 알리고, 두드려본다.

돌아오는 소리를 들어본다.

“좋습니다. 삼협께서 다녀오십시오. 부디 환대를 받았으면 좋겠군요.”

“네, 맡겨주십시오.”

항마들이 당당한 목소리를 낸 후 객잔을 나섰다.

곧바로 두 사내 또한 칼을 챙겨들고 몸을 일으켰다.

환대는 받을 것이다.

저 두 사내가 소식을 전할 터이니.

항마삼협이 배에 오르기도 전, 방금 나눈 대화는 고스란히 동정용왕의 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창너머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비둘기의 발목에 서신을 묶은 끈이 너풀거렸다.

***

서신을 받아든 동정용왕이 와락 미간을 찡그렸다.

“천공단?”

오십 대 초반.

미남형 얼굴에 평소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얼굴이 일순 사나워졌다.

그 앞에서 부채주 은야천이 굽신거렸다.

“네, 근래 소문이 무성한 그 천공단입니다.”

“은야천아!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왜 천공단이 갑자기 본 채를 찾아오느냐는 거다! 그리고 전령으로 오는 것이 왜 하필 미치광이 항마삼난이냐고!”

“어찌하면 좋을지.”

“어쩌긴 뭘 어째!”

“네, 그럼 곧바로 수장시키겠습니다.”

“돌았냐! 왜 수장을 시켜! 넌 무슨 말만 하면 수장이야, 수장은. 확 수장시켜버릴라.”

“죄, 죄송합니다. 그럼 어찌……?”

은야천이 땀을 뻘뻘 흘렸다.

“용건이 뭔지 들어본다. 곱게 데리고 와.”

“네!”

그렇게 마주했다.

반시진이 지난 뒤였다.

“여어어~ 동정용왕! 신수가 훤해졌구만.”

“이리 환대해주다니, 우리만 우정을 잊지 않은 것이 아닌 것 같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제수씨는 잘 계시고?”

반가운 인사를 받았지만 동정용왕의 얼굴은 딱딱해졌다.

솔직히 이놈들과는 좋은 기억이 없는 것이다.

칠 년 전인가, 팔 년 전인가.

대충 그쯤이다. 거하게 한판 붙었다가 자신은 옆구리가 터져나갔고, 세 놈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왜 싸웠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왜 싸운 후에 술을 마셨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 껄껄 웃으며 털어내고 말았었다.

그 뒤론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훗날 한 번씩 떠올릴 때면 억울해서 잠을 설쳐야 했다.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자꾸 떠올랐다.

‘3대 1이었어. 3대 1.’

1대 1로 붙었으면 그냥 한 놈씩 쳐죽일 수 있었는데, 왜 그때는 그냥 흘려보냈는지 모를 일.

만나면 꼭 그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막상 또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좀스러워져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닥치고. 소식을 듣자하니 너희들 꼴이 말이 아니더구만.”

“무슨 소식?”

“천하가 다 아는 소식이지. 그 모가지 뻣뻣한 항마삼난이 고작 젊은 서생 나부랭이 따위의 가랑이 밑을 기어다닌다고 하던데? 아니겠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나올 반응은 뻔했기에 동정용왕은 출수할 준비까지 끝냈다.

탁자를 뒤엎고 폭주할 터.

하지만 돌아온 건 폭소.

“하하하, 제대로 들었네!”

“우리가 요즘 그 맛에 살지! 형님 가랑이 기는 게 최고로 재밌어! 가슴 떨려!”

“아침에 한 번 기고 저녁에 또 기어다니고 그렇거든.”

동정용왕의 얼굴은 이제 아주 딱딱해졌다.

“너희들, 돌아버렸냐?”

“돌기는 네놈이 돌았겠지.”

“허허, 갑자기?”

“금취객 어딨냐?”

순간 동정용왕이 흠칫했다.

빠르게 표정을 바꿔 갸웃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항마들이 놓칠 리 만무했다.

이내 낄낄거렸다.

“너 알고 있구나?”

“흐흐, 알고 있네, 알고 있어.”

“표정 웃겨 죽어.”

동정용왕이 헛기침을 하며 너털거렸다.

“허허, 알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갑자기 삼대 대도 중 하나인 금취객 이야기를 꺼내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지 않느냐. 본 채에 보물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태연한 목소리로 대처했지만 늦었다.

암기를 받아낼 정도의 고수의 눈길에 이미 숨김없이 드러난 터.

목적을 달성한 항마삼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형님과 함께 다시 온다.”

“어이~~ 이따 보자고.”

“차는 잘 마셨어.”

콰앙!

돌아서는 항마삼협을 보며 동정용왕이 탁자를 내리쳤다.

“너희는 갑자기 나타나서 다짜고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열이 히죽 웃었다.

“알잖아.”

“뭘?”

“후공의 신검.”

동정용왕이 멍해졌다.

이열이 손을 들어보였다.

“간다.”

문을 나섰지만 동정용왕은 붙잡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눈을 깜박일 뿐.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이게 알려졌다고? 어떻게?’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금취객이 떠벌렸다고 한 건 무흔신투뿐.

무흔신투가 잡혔나?

그럴 리가. 말이 안 된다. 잡히는 사람도 아니고,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얼굴도 본 자가 없어 곁에 있어도 알아볼 수 없다.

무흔신투가 아니라면 누구지?

알 수 없다.

이어 생각을 전환했다.

‘죽일까?’

동정용왕은 순간 살기를 일으켰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항마삼난이 전부가 아니다.

문제는 천공단주.

미치광이에 독종들인 항마삼난이 그 가랑이 사이를 기어다니는 걸 자랑삼아 떠들게 한 인물이 핵심이다. 그가 처리되어야 끝나는 문제.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래, 수장이 최고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다지만 물 위에서는 다르다.

놈은 다가올 수 없다.

결코 닿지 못한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익사만큼 조용한 건 없다.

**

쏴아아아아!

유람선이 물길을 헤치며 나아갔다.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은 천공단.

유람선 한 척을 빌린 터.

그리고 역시나 소란스러웠다.

“우리 장강수로채에 간다아아아아~~~.”

“동정용왕 만나러 간다아아아아~~~~.”

“나도 간다아아아아~~~.”

“우린 천공단이야아아아아!”

곁에 다른 유람선과 선박들이 쳐다봤지만, 그딴 걸 신경 쓰는 천공단이 아니었다.

한참을 외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유람선을 타고 있으니까 그때 생각난다. 벌써 그립네.”

“나도 그립다. 그때 재밌었는데 말이지.”

거지들이 그윽하니 향수에 젖은 눈이 되었기에 곁에 있던 모용진이 물었다.

“뭐가 그리운데?”

“해골바가지. 해적들. 다들 잘 지내려나.”

“우와와아아아, 그 이야기는 안 했잖아! 해적들을 만난 거야?”

“어, 해적 두목이 회를 잘 떠. 장사하기로 했는데 장사 잘되나 모르겠네.”

“우와아아아아,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그러니까 말이지…….”

다른 한쪽에서는 후공이 무흔신투와 함께 있었다.

무흔신투는 다시금 역용을 한 터라 추레하고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곁에서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기…… 대공자.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조심스럽습니다만…….”

“조심스러울 땐 하지 마.”

“……네.”

무흔신투가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입이 근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정용왕이 보였다는 반응은 실토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쯤에서 자신은 떠나도 될 것 같은 것이다.

한데 왜 굳이 유람선에 태우고 장강수로채로 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만…….”

“생각하지 마.”

“……네.”

다시금 시무룩.

그 모습에 후공은 피식 웃고 말았다.

꽤 지났는데도 이 녀석의 시무룩한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이다.

“신투.”

“네?”

“수영은 좀 하느냐?”

“어설프게 합니다. 물에 빠져도 죽을 일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한데 수영은 왜 갑자기?”

“수영을 해야 할 일이 생길 테니까.”

유람선 배 밑으로 다섯.

배에 구멍을 내고 있다.

“언제 말입니까?”

“지금.”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람선의 사공들이 물에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뛰어들어 빠른 속도로 헤엄쳐 멀어지는 모습에 무흔신투가 멍해졌다.

“쟤들 뭐하는 겁니까? 왜 쟤들이 수영을 하는 겁니까?”

“배가 가라앉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배가 가라앉는다고요?”

황당해한 건 천공단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디 가!”

“이봐요, 배를 버리고 가면 어떡해! 돌아와아아아!”

“어? 뭐야? 배가 기울어져!”

배가 좌현으로 기우뚱 무너져갔다.

한번 무너지자 배는 빠르게 침몰해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쾌속선 열두 척이 침몰해가는 유람선 부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각각의 쾌속선 위로 보이는 건 도검을 든 이들.

그중 한 척의 배에서 부채주 은야천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너희 중에 누가 천공단주냐!”

젊은 청년 하나가 손을 들어보였기에 은야천이 실소를 터뜨렸다.

“너로구나. 어린놈이 세상 물정 모르고 겁도 없이 나댄 결과이니 널 탓해라.”

“우릴 죽일 생각입니까?”

“하하하, 당연한 걸 묻는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동정용왕의 대처가 과하다.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일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상황.

“마중나온 것으로 보인 건 제 착각일까요?”

“하하, 넌 서생이라면서 개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제 유람선은 절반이 잠겨간다.

천공단이 하나둘 물속으로 뛰어들고 후공 곁의 무흔신투도 물에 뛰어들었다.

침몰해 가는 배 위에 남은 건 오직 후공뿐.

그런 후공도 뛰어내렸다.

하지만 첨벙 소리가 없었다.

두 발이 물에 닿지도 않았다.

물 위로 한 뼘 정도 떠오른 채 서 있었다.

순간 열두 척의 쾌속선이 고요해졌다.

모두 놀라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무흔신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도대체 누구와 함께인 건지 머리가 어질거릴 정도였다.

그 상태로 후공은 우수를 들어올렸다.

떠오른 건 다섯 개의 하얀 빛줄기.

능오침.

잠수 중인 다섯의 위치는 명확하다.

소매를 떨쳐낸 순간, 다섯 개의 빛줄기가 물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 속에 잠영 중이던 수적들이 빛줄기를 보았다 싶은 순간, 격중당해 몸이 출렁거렸다.

“우웁!”

“크으윽!”

“꼬르르륵!”

그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건 후공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것. 관통 직전 타격으로 그친 탓에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꼬르륵거렸다.

그다음 후공은 신형을 날렸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내려선 곳은 은야천이 몸을 싣고 있는 쾌속선.

은야천이 하얗게 질려 주춤 물러났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너는 날 마중나온 것이겠지?”

은야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천공단주시다! 인사드려라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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