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무서워 견딜 수 없다.
장강수로채는 본래 장강수로십팔채.
총채의 위치는 동정호 중앙 쪽에 위치한 작은 섬.
열두 척의 쾌속선이 섬에 도착하자, 수적들의 함성이 떠나갈 듯 울려퍼졌다.
모두가 이번 임무를 들은 터.
천공단이라고 했던가?
항마삼난이 무례한 행태를 보이고 돌아간 후 천공단이 쳐들어온다고 들었다.
이에 부채주가 직접 지휘에 나섰고, 긴급히 호출된 다섯 채주와 엄선된 정예가 동행한 열두 척의 쾌속선.
그 결과가 눈앞에 보인다.
천공단을 모조리 생포해 에워싼 채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니 함성을 지르게 된다.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게 된다.
덕분에 부채주 은야천의 안색은, 안 그래도 창백했는데 더 하얗게 되어갔다.
“천공단주, 오해 마십시오. 지금 이거 환영하는 겁니다.”
“욕이 섞여 있습니다만?”
“저희만의 환영 방식입니다.”
“거친 사내들이로군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은야천이 대답하고는 우렁차게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작다. 천공단주시다. 더 큰 목소리로 환영하라!”
더 큰 목소리를 내라고 했지만,
함성 소리는 순식간에 잦아들어갔다.
그제야 수적들은 보았고, 알아들었다.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밝은 얼굴인 줄 알았는데, 부채주며 다른 채주들의 혈색은 실상 매우 창백해진 것이었다.
잡아온 줄 알았는데,
‘허…….’
‘시발…….’
‘잡혔던 거야.’
다함께 창백해졌다.
“부채주, 환영의 함성이 멈췄습니다만?”
“네, 단주. 과유불급이 아니겠습니까. 장강수로채는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압니다.”
“하하하, 멋지군요.”
“감사합니다.”
후공은 다시 웃고 말았다.
녹림이든 장강이든 도적놈들이 말하는 방식은 특이해, 대화를 나누다보면 언제나 즐거웠다.
그때 앞쪽에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얼굴선이 굵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은야천이 전음을 보내왔다.
- 총채주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장현일입니다.
“오! 이렇게 자란 건가?”
동정용왕 장천의 아들.
후공은 아기 때 보았다.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
“네? 이렇게라니…….”
은야천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하게 바라봤다.
새파랗게 젊은 건 천공단주도 마찬가지건만 어째 말하는 투가 마치 어린아이 때 보고 다시 만난 어른처럼 말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공이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크흠, 누구나 다 자라는 것이니까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은야천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크게 웃었다.
어느새 다가온 장현일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천공단주를 뵙습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편히 왔습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 한데 여기 먼지가…….”
후공은 장현일의 어깨를 손으로 털었다.
점혈이 예약되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알 수 없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저 의외로 친절한 사람이라 여길 뿐.
**
접객실로 안내될 때, 은야천은 동정용왕 앞에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 느낀 것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정용왕의 얼굴은 벌겋게 변해갔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네?”
은야천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말했다.
상대가 물 위에 떠 있었노라고.
등평도수를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라고.
잠영 중인 다섯을 눈에 담지도 않고 수중을 타격해 혼절시켰다.
또한 30여 장(약 백 미터)을 단번에 도약해 쾌속선에 내려섰다는 이야기까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어째서 용왕의 반응이 ‘그래서?’가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또르르 굴리며 바라보니 동정용왕의 눈에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순순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은야천이 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 상태로 충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용왕이시여!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오늘 그를 보건대 북교산의 일이 사실인 듯합니다.”
북교산의 일.
유령곡이 제갈혜를 납치해 학 위에 올라간 뒤, 높은 하늘에서 집어던졌다.
그때 허공을 가르고 날아든 여우가 제갈혜를 받아냈다.
화산이 보았고, 종남이 보았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보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로 강호가 들끓었기에 동정용왕도 천화서고 대공자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동정용왕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잘 들어라. 놈과 천공단을 죽인다.”
은야천이 고개를 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몰살.’
물론 몰살의 대상은 천공단이 아닌 장강수로채.
오늘 천공단주는 아량을 베풀었다.
무위를 드러내 경고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무위를 보건대, 이건 마치 화산의 검선이 장강수로채를 방문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검선도 죽이려 들 것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평소에 알던 동정용왕이 아니다.
하지만 은야천은 용왕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동정용왕의 계획을 들은 은야천은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샌가 은야천의 눈에도 독기가 차올랐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동정용왕은 책장을 젖혔다.
그로인해 드러난 벽의 한 지점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벽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모습을 보인 건 세 칸의 선반. 선반 위에 놓인 여러 옥병 중 붉은 옥병을 집어들었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냐! 누가 함부로…….”
소리치던 동정용왕이 말을 멈췄다.
들어선 건 중년 여인.
새하얀 피부에 순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부인.”
여인은 소미.
동정용왕의 부인이었다.
“당신…… 뭘 하려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시선은 붉은 옥병에 닿았다가 동정용왕을 향했다.
동정용왕이 무심히 답했다.
“들었나 보군. 그리고 들은 대로.”
“당신은…… 우릴 다 죽일 생각인가요?”
그녀가 들은 건 계획만이 아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드러낸 놀라운 신위도 들었다.
강호에 무성한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고, 그 소문은 형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종남파를 잠식한 섭혼의 공능자를 멸했고, 흡성대법을 다루는 이도 그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고 했다.
천공단주.
그는 한번 결정하면 머뭇거리는 이가 아니다.
정파의 절세고수들이 살의를 품으면 뒤가 없다.
그래서 떠오른다.
아버지의 말.
‘잘못된 판단. 단 한 번의 오판. 그로 인해 장강은 언제라도 피에 물들 수 있다. 딸아, 그땐 결코 머뭇거려선 안 된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무조건 도망쳐라.’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말했던 날이 바로 오늘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천공단의 면면을 봐도 뒷감당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데 남편은 왜 이런 선택을 하려는 건가?
“우리가 죽을 리가.”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짓밟았다.
“내려놓으세요. 당장!”
“여인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동정용왕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소미의 눈이 붉어지며 젖어들어갔다.
“그건 아버지가 제게 주신 거예요. 이럴 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도 하고요.”
“지금이야.”
“당신은 억지를 부리는군요. 왜 모른 척하나요?”
“내가?”
“독으로는 정점에 설 수 없어요. 독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면 독문이 천하를 제패했겠죠. 그리고 천하제일인의 칭호도 아버지의 몫이 되었겠죠. 하지만 어떤가요? 독문이 구대문파에 들어본 적이 있던가요? 어느 경지 이상이 되면 독은 무용지물이에요. 화를 불러올 뿐이란 사실을 왜 보려 하지 않죠?”
“이건 달라. 특별해.”
동정용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그 모습에 부인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날이…… 오늘이구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 이야기해 봐요. 무슨 일에 연루된 건가요? 무엇에 홀린 건가요?”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물었다.
동정용왕의 목소리는 무심히 흘러나왔다.
“아무 일도.”
“좋아요.”
“?”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 않아 동정용왕이 갸웃했다.
부인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지만 저는 떠나요.”
“…….”
“현일을 데리고 독문으로 돌아가겠어요.”
“…….”
붙잡지 않아 부인은 흐느꼈다.
그녀가 돌아서 나갈 때까지 동정용왕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혼자가 된 동정용왕은 나직히 중얼거렸다.
“적허독…… 이것이면 돼. 이것이면…….”
누구든 끝낼 수 있다.
**
그 대화를 멀리서 후공이 들었다.
그러자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동정용왕의 처는 단순히 독문 출신이 아니다.
독왕 소하의 딸.
이름은 소미.
**
소미는 아들을 불렀다.
접객실에서 접대하고 있던 장현일은, 다가온 수하의 귓속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가?’
바로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자는 괜찮다며 껄껄 웃어준다.
그렇게 마주한 어머니와 아들.
현일은 보자마자 당황해 달려갔다.
“어머니! 무슨 일이신가요?”
어머니의 눈이 퉁퉁 부어있고, 그럼에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에 현일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지금 바로 떠나야 한다. 이 어미와 함께 외가로 가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접대하느라 현일은 아직 계획을 듣지 못해, 얼떨떨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너의 아버지가…….”
그렇게 들려준 이야기에 현일이 기함했다.
“아버지께서 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천공단이 모두 죽고 대공자만 살아남는다면 그 후로는 이곳의 누구도 살아남지 못해. 나는 널 죽게 둘 수 없다.”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
“안돼! 그럴 시간이 없다! 조금이라도 멀리 벗어나야 해!”
어머니가 거의 울부짖고 있기에 현일은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달려나갔다.
수채의 수하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달리며 쾌속선 한 척을 바로 준비하라 소리쳤다.
누구의 말이라고 거부하겠는가.
누구의 말이라고 되묻겠는가.
그저 얼떨떨해하면서도 한 척의 배를 출항시킬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소미가 먼저 쾌속선에 몸을 싣고, 아들을 향해 손짓할 때였다.
두득.
아들이 멈췄다.
“어머니?”
“왜 그러니? 어서!”
“어머니…….”
아들이 서 있는 채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에 소미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아들의 마음이 변한 것일까.
아버지를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저러는 것인가.
그럼 나는.
아들을 잃게 되는 이 애미는.
“아들, 제발…… 내게 오렴. 난 널…… 잃을 수 없다.”
아들을 보며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 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혈도가…… 점혈되었습니다.”
넋이 나간 표정의 아들을 보며 소미도 넋이 나갔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바로 배를 벗어나 물었다.
“누가 널 점혈했단 말이냐?”
곁에는 아무도 없다.
뭔가 날아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다.
“이 소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틀림없이…… 점혈입니다.”
“설마…… 후혈이라고?”
소미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후혈(後穴).
전설적인 점혈수법.
후혈의 점혈은 그 순간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 작용한다.
하지만 누가 후혈을 구현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널 만진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거라.”
“아……. 있습니다.”
떠올랐다.
“누구냐?”
“천화서고…… 대공자.”
“뭐라고?”
“대공자가…… 제 어깨를 만졌습니다. 그 외에는…….”
소미는 경악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순 없다. 바로 해혈을 시도했다.
하지만 점혈한 이는 천하제일인.
해혈할 수 있을 리가.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소미는 결국 허물어져 주저앉았다.
점혈된 아들을 배에 태우고 도망간다 해도 멀리는 갈 수 없다. 후혈을 구사한 이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기에, 그녀는 절망에 사로잡혀 서럽게 흐느꼈다.
그녀는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
그리고 시작되었다.
접객실에 놓인 탁자는 세 개.
상석 쪽에 천공단주와 동정용왕이 자리했고, 다른 두 탁자에는 천공단이 착석해 있었다.
방 안에 그윽하게 다향(茶香)이 번져갔다.
감미롭고 달콤한 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