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하나.
사람의 마음에는 각각의 문장이 있다.
어떤 형태로든 문장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
어떤 각오.
어떤 좌절.
마음의 다짐이 문장으로 남아 삶을 끌어간다.
‘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혹은 자신의 삶을 무력하게 하는 좌절의 문장들.
‘난 할 수 없어.’
‘난 안 돼. 해낼 수 없어. 자신이 없어.’
누구에게는 하나의 문장.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러 문장.
‘최고가 되겠어.’
‘멋진 삶을 살겠어.’
‘널 지킨다!’
‘단 한 번. 너의 소원을 들어줄게. 그것이 무엇이든.’
문장은 자라온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겠어!’
‘난 결코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어!’
그렇게 각자가 살아간다.
문장은 바뀌기도 하고, 추가되거나 삭제되기도 한다.
어느 날은 잊어버릴 때도 있다.
아무리 다짐했어도.
제 아무리 소중하게 여겼어도…… 잊고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장천은 잊지 않았다.
동정용왕이 되어서도 금취객에게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
금취객.
금취객이 되기 전의 이름은 강유.
고아로 떠돌던 어린 시절, 의형제를 맺으며 약속했다.
‘강유! 너의 곤란함은 나의 곤란함이 되고, 너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될 거야. 난 그렇게 살아간다.’
‘하하, 멋진데?’
‘넌?’
‘난 달라.’
강유가 웃으며 말을 잇는다.
‘난 그냥 좋은 친구. 너에게 곤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기뻐할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해줘. 난 부자가 될 거야. 세상을 훔칠 거야. 그때마다 기뻐해줘. 때론 비웃어줘.’
그것이 강유의 문장.
강유는 다르다고 말했지만, 장천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 문장대로 강유는 세상을 훔치며 금취객이 되었고, 자신은 동정용왕이 되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동정용왕의 마음 속 문장은, 선명하다.
마주한 눈 앞의 서생.
천화서고 대공자가 강유를 찾고 있는 걸 알고 있다. 금취객을 찾고 있음을 알고 있다.
금취객이 말했다.
후공의 신검을 훔쳤노라고.
천화서고 대공자는 고절한 무공의 소유자.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어떻게 신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걸까.
상관없다.
중요한 건,
비밀은 다시 비밀이 되어야 한다는 것.
‘강유, 너의 곤란함은 나의 곤란함.’
마음 속 문장이 큰 목소리를 낸다.
‘내가 끝내주마. 대공자의 손이 너에게 닿기 전에.’
두려움이 문장에 닿아 옅어져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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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접객실.
그윽하게 다향(茶香)이 번져간다.
감미롭고 달콤한 향이었다.
이 안에 독왕의 적허독이 있다.
적허(赤噓)라는 이름의 전갈.
영물이라 할 만큼 희귀해, 채독하는 것이 어렵다.
그 독을 기본 바탕으로 독왕이 배합했다.
내력으로는 밀어낼 수 없다.
내력을 흩어버리는 산공의 요소가 섞여 내기를 타고 장기와 뇌에 잠복한다.
잠복까지 걸리는 시간은 서른 번의 호흡.
그 호흡 수가 생의 마지막 호흡이다.
신경이 마비되어 더 이상의 호흡은 불가.
만독불침이라 자부해도 적허 앞에서는 평범할 뿐이다.
누구라도 적허 앞에서는 평등하다.
장인인 독왕이 했던 말을 동정용왕은 잊지 않았다.
‘공청석유’를 복용한 자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런 자가 어디에 있겠냐고도 말했었다.
그러면서도 독왕은 경고의 말도 잊지 않았다.
정파든 마도든 절세 고수들이 지닌 수단은 상상할 수 없으니, 그런 이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함부로 하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따라왔다.
‘이 젊은 놈이 그런 수단을 갖췄을 리가.’
갖췄다.
마주한 이는 후공.
동정용왕이 알 수는 없는 일.
공청석유가 문제가 아니다.
후공의 기경팔맥을 맴도는 삼악이 치명적인 독을 감지하고 정화시키려고 발작적으로 요동쳤다.
그저 후공에겐 간식일 뿐.
또한,
‘적허독.’
후공은 어떤 독인지도 알아차렸다.
천향의 공법은 이제 삼주에서 사주로 나아간 터.
향을 맡는 것만으로 맛본 것처럼 느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허독 또한 이미 접한 바가 있다.
과거 독왕과 마주했을 때였다.
당시 독왕은 적허독을 완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그렇기에 어디까지, 누구에게까지 통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했다. 시험해보고 싶어 했다.
‘후공, 적허라는 전갈이 있습니다.’
‘그래서?’
‘적허를 바탕에 두고 제가 최고의 독을 배합해냈습니다.’
‘내게 시험해보고 싶나 보군.’
‘네, 기회를 주십시오.’
‘해독제는?’
‘없습니다.’
‘뒤가 없네?’
‘네.’
‘나 죽을지도.’
‘하하하하!’
그렇게 응해주었다. 이미 당시에도 후공에게 독은 음식의 조미료 같은 것에 불과했기에 흔쾌히 허락하고 맛을 보았다.
처음에는 달콤하고, 이어지는 맛은 난초향이 감돌며, 끝에 가서는 정갈하게 마무리되어 뒷맛마저 깔끔했다.
정녕 독이 맞긴 맞나 싶어 갸웃하며 독왕을 바라보니 숫자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스물둘, 스물하나…….’
‘소하, 왜 숫자를 세는 것이냐?’
‘적허에 닿은 이가 숨쉴 수 있는 횟수가 삼십 번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가. 한데 그걸 소리내서 헤아린다라……. 넌 독백을 할 줄 모르나보구나.’
‘죄송합니다. 속으로 헤아리겠습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독왕은 침통함에 빠져 한참이나 시무룩해져 있었다.
내가 죽었어야 했냐는 타박을 듣고 나서야 겨우 미소를 되찾았었다.
“동정용왕, 차향이 좋습니다.”
그 독왕의 적허가 이 찻잔에 담겨 있다.
독왕 소하가 동정용왕에게 딸을 보내면서 손에 쥐어 보냈을 적허.
차향에 살의가 가득하다.
이미 기회를 주었건만 애써 외면하며 어리석음을 보인다.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허허…… 대공자, 드셔보시게. 향은 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너털거리는 동정용왕을 바라보며 후공도 마주 웃었다.
찻잔을 들어올렸다.
한 모금을 음미하며 맛을 느꼈다.
“정녕 훌륭하군요. 장강수로채에서 이런 차를 대접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알아주니 고맙군.”
뒤이어 천공단도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찻잔을 들어올리지 않은 건 오직 무흔신투뿐.
무흔신투는 미간을 좁힌 채 입모양만으로 ‘시발’이라고 중얼거리며 찻잔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남은 건 서른 번의 호흡.
그건 후공도 알고, 동정용왕도 아는 사실.
그렇기에 숫자를 헤아리게 된다.
후공도, 동정용왕도.
서로 미소 지은 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숫자를 헤아려갔다.
‘스물아홉.’
‘스물아홉!’
간절함이 다르기에 마음 속 외침은 동정용왕이 훨씬 크다.
동정용왕의 눈에 비친 천화서고 대공자는 다시 한 모금.
눈까지 지그시 감고 향을 음미한다.
그건 천공단도 마찬가지.
‘스물셋…….’
대공자가 다시 찻잔을 내려놓는다.
대공자의 왼손이 허리로 내려갔다.
검을 매만졌다.
동정용왕은 그 시선을 따라가 바라보면서 태연함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왜 왼손인가? 좌수검이었나? 그런 것이라면 검의 위치는 오른쪽에 있어야 하지 않나? 머리로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들.
다 쓸데없다.
좌수든 우수든 저 검이 뽑히면 죽는다.
종남제일검 태을진인의 앞을 가로막고 벽이 되어 지키며 검강을 구사했다는 이가 눈앞에 있다.
그래서 떨려온다.
제발, 제발.
‘스물……. 열아홉…….’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원래 이리도 더뎠던가.
그런 마음은 동정용왕만은 아니었다.
접객실 밖에서 숫자가 ‘하나’가 되면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던 부채주 은야천도 마찬가지였다. 그 곁 여섯 채주도 같았다.
은야천과 여섯 채주의 마음 속에도 시간이 흐르고, 숫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물론 죽음도 떠오른다.
‘열하나……. 열……. 아홉…….’
등은 이미 흠뻑 젖었다. 코 끝에 맺힌 땀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그렇게 숫자를 헤아려갔다. 도를 움켜쥔 손에도 진득히 땀이 맺혀 있어, 제대로 쥐려 애를 써야 했다.
‘여덟……. 일곱…….’
숫자를 헤아리는 한편 거칠어지는 심장을 다독였다.
‘괜찮아. 이제 곧……. 이제 곧……, 이제 곧.’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알아차렸다면 대공자는 이미 손을 썼을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강호인들 중 동정용왕의 부인이 독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 독왕에게 딸이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강호에 노출된 적이 없다.
동정용왕도 떠벌리는 성격이 아니다.
또한 용왕은 독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태 독왕의 독에 의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방심하기 좋다.
장강수로채 따위가 차에 독을 탄들 얼마나 대단한 독이겠냐며 마음 놓기 좋다.
그러한 방심에, 자부심이 실리면 당할 수밖에.
이제 거의 왔다.
‘넷…….’
바깥의 마음들이 헤아려가고,
접객실 내부에서는 동정용왕의 마음도 외친다.
‘셋…….’
이제 곧.
‘둘…….’
이제 끝이다.
둘 다음엔…….
그렇게 동정용왕이 마음 속에서 하나를 외치려는 순간, 대공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나?”
“……!”
동정용왕이 소스라쳐 눈을 부릅떴다.
이어지는 건 태연한 음성.
“맞나 보군.”
“……………….”
입이 열릴 리가.
갑자기 존대가 사라져서가 아니다.
왜 멀쩡한 건가? 왜 하나를 대공자가 외치는 것인가? 왜 천공단조차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인가?
그런 의문들이 샘솟듯 솟구치면 대답할 수 없다.
그저 대답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대신할 뿐.
이제 곧…….
의미는 달라졌다.
죽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공자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왜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지 동정용왕은 알 수 없다.
본 대로였다.
후공은 크게 실망했다.
“동정용왕. 이제 남은 건 없다.”
남은 아량은 없다.
옛 정은 여기까지.
바로 일어나 옷을 펄럭이며 접객실을 나서자, 그 뒤를 천공단이 뒤따랐다.
접객실 밖 칼을 빼든 채 굳어버린 은야천과 채주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던 건 소미.
아들 곁에서 넋이 나가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던 소미가 정신을 차리고 바라봤을 때는, 이미 후공과 천공단이 쾌속선에 몸을 싣고 있었다.
‘어, 어떻게…… 천공단까지?’
쾌속선은 빠르게 멀어졌다.
소미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곧 달려오는 남편을 보며 착각했다.
‘아! 독을 쓰지 않은 것이었어.’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남편의 얼굴이 창백한 것과 대공자와 천공단이 찬바람을 일으키고 지나쳐간 것을 떠올리고 깨달았다.
“다, 당신 결국…….”
“그가…….”
동정용왕은 멀어져가는 쾌속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허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소미는 들은 것이나 같았다.
적허는 통하지 않았다.
소미도 멍해져 쾌속선을 바라봤다.
대공자는 떠난 것일까?
그럴 리가.
그는 분명 다시 온다.
아마도 그때는 혼자일 것이다.
이 자리를 벗어난 건 천공단에 어린아이가 있어서일지도……. 피를 너무 많이 보게 될 테니.
독왕인 아버지의 적허가 통하지 않는 자.
전설적인 점혈수법인 후혈을 구사하는 이.
아들 현일을 점혈해놓은 것만 봐도 도주를 염두해 둔 것일 터. 그가 얼마나 치밀한 자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파의 절세고수들이 분노하면 자비가 없다.
자비는 이미 여러 차례 지나간 다음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그랬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천룡의 가문들이, 소요파와 종남이 그를 은인으로 여긴다는데 왜 한낱 장강수로채 따위가 그와 원수를 맺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도대체 남편은 누굴 지키려는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래서 흐르는 건 눈물뿐.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에도, 그 모습에도 동정용왕의 마음은 견고하다. 마음에 문장을 담고 사는 이는 견고한 법이다.
한데……
한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떠올랐다.
잊었던 문장.
어느 날부터인가 잊어버렸던 문장이었다.
몇 번이고 다짐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문장이 떠올랐다.
그 날의 약속.
‘소미, 나와 살자. 앞으로 맞이할 세상의 모든 아침을 너와 함께하고 싶다. 널 평생 지켜주겠다. 누구에게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그건 기쁨의 눈물이 될 것이다. 이 다짐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우습군요.’
‘무엇이?’
‘천하제일인이 나를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할 건가요?’
‘후공? 문제없다.’
‘그와 싸울 건가요? 당신의 재주로는 그의 발끝에도 닿지 못할 텐데요?’
‘문제없다.’
‘좋아요, 말해봐요. 어떻게 할 건가요?’
소미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난 후공의 가랑이 밑을 기어갈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려달라고.’
‘하하하하하하!’
그때 소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 봐오며 들었던 웃음소리 중 가장 큰 웃음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승낙.
‘당신이 내게 했던 말 중 가장 멋진 말이에요.’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문장을 새겼다.
한데 잊고 있었다.
동정용왕은 부채주 은야천을 바라봤다.
“은야천, 모든 채주들을 불러들여라. 장강수로채의 모든 병력을 불러들여라.”
은야천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태 동정용왕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던 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용기를 내야 할 때였다.
“정녕 대공자와 대적할 생각이십니까?”
모두가 동정용왕을 바라봤다.
죽음이 떠올랐다.
이어 들려온 음성은,
“아니. 나는 대공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러 간다.”
당당한 목소리였다.
잊고 있었던 문장이 모든 문장을 뒤덮으며 그렇게 큰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