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여우 가면을 쓰면 기분이 좋아지기에.
즉시 용왕채에서 전서매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밤,
쏴아아아아.
어둠에 잠긴 동정호를 가르며 세 척의 거대한 함선이 나아갔다.
그 위용이 놀랍다. 배 위로 무장한 이들의 그림자는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보였다. 당연하게도 동정호에 떠 있던 유람선이며 낚싯배들이 동요했다.
“뭐야, 뭔데?”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건가?”
“저건 동정용왕의 용왕선이잖아!”
“저게 왜 뜨는데?”
“누가 장강수로채를 건드린 거야!”
알아본 이들이 기함했다.
가까이 다가오자, 주변 배들은 기동을 멈췄다.
근접하여 지나쳐가는 중에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지켜봤다.
이제 더 잘 볼 수 있었다.
장강수로채 수적들이 평소와 달리 함성도 지르지 않는 데다 누구 할 것 없이 비장한 얼굴이었기에, 모두가 지켜보는 것만으로 간이 쪼그라들었다.
돛대 위에 앉아 있거나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이들도 보인다.
어떻게 그 위에 태연히 서 있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각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임은 분명했다.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동정용왕을 분노하게 만든 건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생각은 하오문도 마찬가지였다.
세 척의 배가 지면에 가까이 다가오면서 보았고, 관할 고위층의 귀에도 들어갔다.
“루주님,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뭔데 소란스럽게 난리냐, 난리는! 상놈의 새끼야!”
뚱뚱한 중노년의 루주는 별채에서 강아지와 뛰놀다 신경질을 냈다.
“용왕선이 떴습니다. 지금 동정용왕이 직접 출정 나왔습니다.”
“뭐가 어째!”
바로 강아지는 뒷전이 되었다.
이 구역에서 용왕선이 떴다는 말을 듣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여태 용왕선이 뜬 건 두 차례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때도 험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 천화서고 대공자 때문이구나.”
“틀림없습니다.”
하오문 내에 천화서고 대공자의 인상착의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 탓에 천화서고 대공자와 천공단이 동정호에 도착했을 때부터 하오문은 알고 있었다.
다가가 접촉하진 않았다.
목적이 따로 있다면 거추장스럽게 되는 것이다.
필요하면 대공자는 다가온다. 대공자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아는 이고, 늘 그래왔으니까.
그래서 지켜만 보던 중, 천공단이 용왕채로 향한 것과 다시 돌아온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지금 이 밤 용왕선이 떠버렸다.
“장강수로채와 천공단이 한판 거하게 붙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장강에 있는 수채의 두목들도 모두 모여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 수하의 말에 루주는 갸웃했다.
하얀 강아지가 다가와 놀아달라고 머리로 다리를 툭툭 부딪쳐왔지만 떠오른 물음표가 더 컸다.
“근데 그게 되나?”
“동정용왕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신가요? 역대 동정용왕 중 최고의 무위로 평가되는 이가 현 동정용왕이 아닙니까. 금적선생과도 필적할 수 있는 자이고요.”
“멍청아, 그 대단한 금적선생이 대공자의 졸개니까 하는 말이 아니냐!”
“아, 맞다. 그렇네요.”
“멍청한 새끼야, 정신 안 차릴래!”
“그럼 우린 뭘 해야 하나요? 으음…… 할 게 없는 건가요?”
“너 설마 뭘 하려고 했던 거야?”
루주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자, 수하가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오문은 천공단의 친구니까요.”
“음, 그건 맞지. 틀림없지.”
“그러니까 저희가 뭐라도 해야…….”
“좋다. 해야지. 그럼 나는…….”
루주가 강아지를 바라봤다.
주인이 눈길을 주자 강아지가 폴짝폴짝 뛰었다.
이내 강아지를 들어올려 안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 와중에 어디 가시려고요? 백구는 왜 데려가시고요?”
“구경 간다. 동정용왕이 어떻게, 얼마나 처맞는지 봐야겠다. 분명 끝내주는 광경이겠지. 한동안 술안주가 없어도 될 정도일 테지. 후후후후!”
“저도요, 저도 같이 가시죠!”
**
탁, 탁, 타악!
“시발, 이게 뭔 일이야!”
“문 걸어잠가!”
“창문 닫아라, 서둘러!”
“불 끄고!”
동정용왕 뒤로 채주들과 수적들이 지상을 거닐게 되면서 동정호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일 년 내내 그 어느 밤도 등불이 꺼지지 않던 동정호 주변 주루와 객잔, 반점들은 기겁해 등불을 끄고 문을 걸어잠갔다.
주루의 손님들 중에는 술도 취했겠다 큰 소리로 불만을 토로하는 이도 있었지만, 창틈으로 지나가는 장강수로채 수적들의 험악한 기세와 대규모 병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두워진 주루 안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를 위로했고, 반점에서 늦은 식사를 하던 아버지는 아이가 울지 않도록 다독였다.
물론 모두가 움츠러든 건 아니었다.
몇몇 호기심이 넘치는 이들은 흥미로운 눈길로 수적들을 따라가기도 했다.
그중에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뚱뚱한 중노년인도 있었지만 장강수로채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멈춰선 곳은 태인객잔 앞.
태인객잔도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4층의 한 객실만은 환히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동정용왕의 시선이 그 객실을 올려다봤다.
그것도 잠시, 시선은 더 위로 올라가 지붕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 지붕 위에 서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항마삼협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우리랑 한판 붙어보게?”
“하하하, 니들 뭔데 이렇게 거창하냐!”
“하긴 이번에는 과거에 제대로 끝맺지 못한 승부를 겨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항마들의 조롱 섞인 웃음에 동정용왕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거두고 기다렸다.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공자는 의미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지붕에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항마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객잔의 문이 열렸다.
걸어나온 건 모용진이었다.
동정용왕에게 예를 갖춘 다음 입을 열었다.
“동정용왕, 제가 모시겠습니다.”
동정용왕이 고개를 끄덕인 후 모용진을 뒤따랐다.
계단을 올라 사층 객실로 들었다.
따라 들어가던 동정용왕이 갸웃했다.
객실 안에서는 오직 한 청년이 탁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진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그 청년이 천화서고 대공자가 아니면 갸웃해질 수밖에 없다.
‘왜?’
기다리고 있던 건 언교운.
언교운이 의자에 한껏 등을 기댄 채 염세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넌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지?”
그러면서 턱짓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진 동정용왕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 객실 위는 지붕.
감지되진 않는다. 하지만 대공자와 다른 천공단이 지붕 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같다.
눈앞에 다른 사람이 있다 해도 천공단주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맞은편 탁자에 앉았다.
언교운이 다리를 꼬았고 한참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건방지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진주언가의 언교운이라고 했던가.’
용왕채에서는 얌전한 애송이로만 보았는데 이런 면모가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한 터라, 당혹스러움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구도가 꼭 나쁘다고 볼 건 아니었다.
대공자는 이미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으니, 이는 정녕 마지막 기회였다.
그때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천공단주를 대신한다.”
“네.”
“들어보자. 무슨 생각으로 천공단을 몰살시키려 했지?”
“제가 잠시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소중함에 대한 무게를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너의 일이 용서가 될 일인가?”
“아닙니다.”
“모두 독살당했다면 장강수로채는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 했지?”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대공자께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면 몰살당했을 것이며, 모두가 독에 당했다 해도 그 뒤에는 여러 문파와 세가에 의해 저와 장강수로채는 멸절당했을 것입니다.”
“쯧쯧, 미련한 새끼. 빨리도 깨달았구나.”
“죄송합니다.”
“자, 그래서?”
“네?”
되묻는 동정용왕을 향해 언교운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죽여줄까?”
동정용왕은 멍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편하신 대로. 저 하나로 끝내주십시오. 저의 오판이었습니다.”
“후후, 확실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좋다. 그럼 맞아 죽는 건 어떠냐?”
“마음에 듭니다.”
“좋아, 좋아. 그렇게 하자. 모용진! 시작해!”
한쪽에 서 있던 모용진이 화들짝 놀라 언교운을 바라봤다.
언교운이 미간을 찡그렸다.
“뭐해?”
“죄, 죄송합니다. 그럼.”
모용진이 다가와 빈 의자를 들었다.
동정용왕이 바라본 순간, 그대로 머리를 찍어버렸다.
꽈작, 꽈작, 파아악!
의자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의자 다리만 남을 때까지 내려쳤지만 동정용왕은 눈을 감지 않았다. 내공도 운용하지 않았다. 머리가 터져 피가 얼굴로 주르륵 흘러내려 피칠갑이 되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리어 후려갈긴 모용진이 덜덜 떨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뭔가 찍을 것이 있나 하고 찾다가 의자가 안 보여 두 사람 사이의 탁자를 들어올리려 할 때, 언교운이 소리쳤다.
“이 새끼야, 이걸 왜 들어. 이건 놔둬!”
“……네.”
모용진이 시무룩해졌다가 또 뭔가 찍을 것이 없나 하고 방 안을 서성였다. 그러다 또 한 소리 들었다.
“너 뭐하냐, 정신사납게!”
“죄, 죄송합니다.”
“덜떨어진 새끼. 짖는 것만 잘하지. 영 쓸모가 없네. 나가 봐.”
“……네.”
모용진이 나간 뒤, 언교운이 입을 열었다.
“동정용왕.”
“네, 말씀하십시오.”
“동정호 북서쪽이다. 그곳에서 여우를 찾아라.”
동정용왕은 이해했다.
자신이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여우 가면.
대공자는 지붕 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정용왕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지붕 위 무산쌍웅이 신형을 날렸다. 여우에게 소식을 전했다.
**
홀로 동정호를 눈에 담고 있던 여우의 앞,
무산쌍웅이 왔다가 돌아간 자리에는 이제 동정용왕이 서 있었다.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건 장강수로채의 오백여 명의 수적들. 그 광경은 마치 한 사람을 포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부디…….
제발…….
간절히 동정용왕이 무사하길 바라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긴 침묵.
언교운과 마주할 때는 태연했던 동정용왕이었지만 지금은 땀을 비오듯 흘렸다. 왜 그렇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다. 아예 천화서고 대공자는 분위기가 다르다. 우스꽝스러운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웃을 수 없다.
적하독을 알고 있는 이.
‘하나’를 외친 이가 눈 앞에 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왜 여우 가면을 쓰고 계시냐고 물을까도 생각했다가 바로 떨쳐냈다.
그건 어차피 말했다 해도 듣지 못할 대답.
후공은 그저 여우 가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쓰고 있을 뿐이었다. 여우 가면을 쓰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떠올라서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동정용왕을 살린 것임을, 동정용왕이 알 길은 없다.
“용서하십시오.”
동정용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돌아오는 말은 없다.
동정용왕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아둔했습니다.”
“금취객.”
“네?”
“금취객의 위치.”
동정용왕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전음으로 금취객의 은신처를 고했다.
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꼴도 보기 싫으니 꺼져라.”
“…….”
동정용왕이 멍해졌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가.
왜 꼴도 보기 싫다는 말에 자신이 울컥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명 눈앞의 여우는 청년이거늘 왜 대종사를 보는 것 같은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은 단 하나.
“감사합니다.”
마음을 담아 크게 말했다.
그 뒤로 이어졌다.
간절히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강수로채의 모두가 곧바로 함성을 내질렀다.
“장강수로채가!”
쩌렁쩌렁 울리며 이어진다.
“천화서고 대공자께!”
“감사…….”
하지만 거기까지.
“조용.”
천화서고 대공자의 나직한 한마디가 멀리까지 나아가 모두의 귓가에 파고들었기에 함성은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 파고든 음성은,
“꺼져라.”
모두 굳어버린 것도 잠시, 동정용왕 이하 모두가 썰물처럼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는 이도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하오문 루주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크으……. 우리 천화서고 대공자 멋진 것 봐라.”
“크으으으으으…….”
수하도 따라했다.
루주가 수하를 바라봤다.
“천공단주가 누구라고?”
“하오문의 친구입니다.”
“하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을 들어도 좋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