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그렇게만 되면 원이 없겠다.
여우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여우가 된 채로 후공은 머물러 동정호를 눈에 담았다.
수적들의 노랫소리를 귀에 담았다.
그러자 떠오른 건, 동정용왕 장천과의 추억.
그 추억 안에는 제갈혜의 아버지이자 의제가 함께했다.
장천이 아직 동정용왕이 아닐 때,
한창 어릴 때였다.
하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독보적으로 뛰어난 면모를 보여 차기 동정용왕으로 내정되어 있을 때이기도 했다.
잠수 실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말에 의제는 승부를 겨뤄보고 싶어 했다.
물 속이라도 자신이 더 오래 버틸 수 있다고 자부했다. 늘 흥미로운 일을 좇고, 흥미로운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흥미를 쫓는 의제다운 발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잠수 대결.
승부의 결과는 장천의 승리.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동정호 수면을 튀어오르며 ‘이겼다’라며 소리쳤다.
의제의 ‘시발놈’이라는 욕에 껄껄 웃으며 ‘솔직히 죽을 뻔했습니다.’라고 하던 근육질의 청년.
한데 이 밤, 그날의 청년은 없었다.
의제도 없었다. 그저 피칠갑을 한 채 무릎 꿇고 있는 중년인이 있을 뿐이었다.
추억이 칼보다 무섭다.
‘나이가 든 것인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누가 그랬을까.
맞는 말이다.
살아본 자는 누구나 알 것이다.
여우가 된 채 후공은 동정호를 따라 흘러가는 장강수로채를 눈에 담았다. 선미에 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장천을 바라봤다.
**
장천도 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고, 또 점점 멀어져 가지만 장천은 여우를 볼 수 있었다. 여우의 눈동자에 담긴 무심함까지 볼 수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여우는 누구일까?
천화서고 대공자는 누구일까?
왜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왜 끝도 없는 아량을 베푼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리고 나의 친구.
금취객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지워주려는 것일까.
수하들의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목소리가 작다! 더 크게! 우리가 누구냐!”
부채주 은야천의 목소리에 노랫소리는 더 커졌다.
“우리는 장강수로채! 우리는 무적! 우리는 주인! 장강은 대지의 핏줄, 동정호는 대지의 심장! 장강을 차지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 장강의 주인은 우리! 누가 있어 장강수로채를 대적할 것인가! 누가 있어 장강을 그저 지나갈 것인가! 장강은 대지의 핏줄, 동정호는 대지의 심장! 장강수로채가 세상의 주인!”
노랫소리가 쩌렁쩌렁 동정호에 울려퍼졌다.
동정호를 휩쓸었다.
이 밤 이 노래를 듣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누구는 움츠리고, 누구는 기백에 감탄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다.
대다수는 노래 이전에 오간 말을 들었다.
“시발놈들, 신났네 아주.”
“처맞고 감사합니다 하고 온 주제에 노래는 왜 부르는 거냐고!”
부근 유람선에 타고 있는 이들은 이제 조금은 용기를 얻어 소리 내 욕했다.
유람선까지 들렸다.
비장한 표정이라서 싸우러 간 줄 알았는데, 장강수로채는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이에게 감사를 전하러 간 것이었다. 조용, 이 한마디에 조용해져버려 놓고 이제 와서 노래라니. 무적이라니.
“상놈의 새끼들, 누가 보면 꼭 이기고 온 줄 알겠네.”
“목소리가 커!”
“노랫소리가 더 커서 괜찮아!”
그랬다.
수적들의 노래는 노래라기보단 고함에 가까웠다.
어쩌면 모두는 이 밤을 씻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악을 지르며 무적을 외쳤다.
목이 터져라 세상의 주인이라 외쳤다.
그러면서 누구는 웃었고, 누구는 울었다.
살아남아서 웃음이 났고, 살아남아서 눈물이 났다.
동정용왕의 피칠갑된 모습을 보면 웃게 되고, 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친다.
“장강은 대지의 핏줄, 동정호는 대지의 심장! 장강수로채가 세상의 주인!”
한 번도 세상의 주인이 되어본 적이 없지만, 괜찮다.
이 밤, 그저 함께 외치는 이 순간만큼은, 동정용왕이 함께하고 동료들이 함께하는 이 시간만큼은 장강수로채가 세상의 주인이었다.
여우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목청은 더 높아진다. 동정용왕이 피를 씻겨내지 않은 채여서 이 함성으로 씻어내주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 염원을 동정용왕이 모를까.
그 함성들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위로해주려 다가왔다.
곁에 말없이 서 있어준다.
작은 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여인. 이젠 어느덧 시간이 지나 다른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아내를 바라보자니, 아내도 바라본다.
“후회하나요?”
“아니, 결코.”
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가랑이를 길 것이다.
잊고 있던 문장을 더 빨리 깨달으리라.
“현일의 점혈이 방금 풀렸어요.”
동정용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이 시간이었나.”
“네.”
동정용왕도 소미도 시간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 시간.
아마도 이 시간이 전멸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찾아가지 않았다면 대공자가 다시 찾아왔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치밀한 자인지 모를 일이다.
가장 소중하게 여길 보물이 무엇인지 인지하자마자 보물을 묶어두었다. 그렇게 하여 모두를 묶어두었다.
천재여서 그런가. 그럴 리가. 이런 대처는 강호의 생리를 꿰뚫고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다. 냉정함을 갖추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
더불어 수많은 강호 경험을 쌓은 이조차 쉽게 할 수 없는 행동. 수없이 많은 피를 봐온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더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동정용왕은 금취객의 생사가 걱정되었다.
“후우…….”
동정용왕은 자신도 모르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소미는 그 한숨의 의미를 이해했다.
누굴 걱정하는지, 한숨 소리 속에 이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금취객.
이름은 강유.
남편의 의형제.
그가 후공의 신검을 훔쳤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그제야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금취객은 남편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말해보았나요?”
“그래. 은신처를 말하고 부디 살려달라고 빌었지.”
“…….”
소미는 침묵을 지켰다.
결과가 어땠는지 물을 수 없었다.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의 눈이 젖어들고 있는 것이다.
여태 남편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것이 답이었다.
“대공자가 그러더군.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불행을 미리 상상하지 말아요. 오늘의 일을 보건대, 그리고 들려왔던 그의 행적이 사실이라면 대공자가 손속에 사정을 둘 여지는 충분해요.”
“그렇게 되면 좋겠군. 그렇게만 되면 원이 없겠다.”
“한데 이상한 일이에요. 대공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걸까요? 무흔신투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도 아닐 텐데요.”
“어쩌면 무흔신투가 잡혔을지도.”
“가능한 일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건 무흔신투 스스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 후공 사후가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내가 해냈어! 다들 들었지? 내가 동정용왕의 머리를 후려갈겼단 말씀이야! 그때 가슴이 저릿저릿하는 거야. 와아, 이런 거구나. 이런 게 천공단이란 생각이 막 드는 거야. 후려갈기면서도 믿기질 않더라니까!”
지붕 위 떠드는 천공단 곁에서 조금 떨어져 혼자 쓸쓸하게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언교운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후려갈기면서도 덜덜 떨었던 건 모용세가의 이공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나 보구만.”
“그건 내가 일부러 떤 척한 거지.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절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 네네. 그러셨겠죠.”
“근데 교운이 너는 따로 연습 같은 걸 하는 거야? 아니면 천공단에 있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야?”
“맞아, 나도 감탄했어. 그 서늘한 목소리, 어떻게 죽여줄까? 하하하, 멋졌어. 지붕에서 소리칠 뻔했잖아!”
소천개의 말에 이어 너 나 할 것 없이 언교운을 칭찬했다. 그렇게 되자 다시 평소 쑥스러움을 잘 타는 본래의 언교운으로 돌아왔다.
“다들 너무 띄워주니까 좀 무섭네요.”
“뭐라는 거냐. 니가 제일 무서워.”
“그 무서운 얼굴로 쌍웅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뭐가 어째!”
“야, 우리 얼굴 잘 먹혀. 여자들이 줄을 서.”
“그건 화공신타고요.”
“여기서 화공신타를 언급해버린다고?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하하하!”
‘재밌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흔신투가 눈살을 찡그렸다.
‘시발놈들이 난 안 보이는 것처럼 모른 척하네.’
은신도 안 했는데 투명해져버린 것 같아서 무흔신투는 내심 쌍욕을 내뱉었다.
한마디 정도 말을 걸어주면 좋겠는데 다들 관심이 없었다.
원래 말없이 한쪽에 있으면 누구 한 명 정도는 이리로 오라고, 거기서 뭐하냐고 같이 이야기 나누자고 하는 것 아니던가.
그럼 한 번은 거절하고, 두 번째는 못 이기는 척 곁에서 이야기 나눌 텐데, 서운하기가 말로 할 수 없었다.
‘도망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천화서고에서 출발할 당시, 대공자가 손을 잡았었다.
아무 설명도 없었지만, 그것이 다정함의 표현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손에 남겨진 것도 없었지만 뭔가 남겨졌을 것이란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강호인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가 없는 건 없다.
특히 천화서고 대공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도망칠 수 없다.
그럼 옹기종기 이야기라도 끼고 싶은데 어찌된 게 투명해졌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쯤이면 풀어주지 않을까.
금취객의 은신처도 알아냈을 테니 희망을 품고 달을 바라봤다.
“어…… 뭐여?”
달을 보려다 걸려든 희한한 광경에 무흔신투는 눈을 비볐다. 달을 등진 새가 검은색이었다가 한순간 흰색으로 변하면 놀랄 수밖에 없다.
놀라움은 이어졌다.
굉장히 멀다 싶었는데, 눈을 비볐다가 다시 떴을 때는 이미 지척이었다.
‘빨라!’
그러곤 알아차렸다.
대공자의 영물.
“색관조가 깃털 색을 바꿀 줄 아는 것이었네.”
[까르르르르르르, 멍청이 천공단! 내가 왔어!]
[그으으으윽!]
“하하하하, 우리 묵언이가 왔구나!”
“어서 오시고요!”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빨리빨리 좀 못 다니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천공단이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걸 내가 말할 것 같아! 까르르르르르르르.]
[극극극!]
그대로 지나쳐 날아가버렸다.
“야, 형아 어디에 있냐면…….”
[알아, 멍청아!]
“어…….”
그 꼴을 지켜보던 무흔신투가 속으로 ‘새도 지 멋대로야’라고 중얼거릴 때, 이미 색관조는 주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주인님, 저희가 왔답니다. 까르르르르르르. 어떻게 지내셨어요?]
[극극극극!]
고요함이 깨졌지만 후공은 이것도 좋았다.
어떤 소란스러움은 반갑기도 한데 지금이 그때였다.
“수고했다. 쉬지 않고 날아왔을 테지?”
[네, 한 번도 쉬지 않았어요. 금섬이 잠자리를 잡아먹고 싶다고 했지만 제가 무시했어요. 까르르르르르르.]
[큭큭큭!]
후공이 여우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검이 그대로 있었어요.”
“그렇구나.”
후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제갈 소저가 뭐라고 하더냐?”
“모조품이라고요.”
“그래, 알아봤을 테지.”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색관조가 금섬 머리 위를 빙글빙글 날며 소리쳤다.
[금섬아, 내 말이 맞았지? 주인님은 놀라지 않으실 거라고 했잖아. 주인님은 다 알고 계셔. 까르르르르르르.]
[그으으으으윽.]
금섬이 창피한지 앞발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떨궜다.
**
어느 곳. 어느 동혈.
사방이 금덩어리었다.
중년의 곱추가 금덩어리 위에 누워 웃음 지었다.
웃을 때 들창코가 일그러졌지만 상관없었다.
누운 채 두 팔로 단검을 들어올리며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했다.
단검의 검집에 승천하듯 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