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13화 (213/460)

213화. 지천.

“깨워라.”

[네, 주인님!]

강유는 돌아갔다.

다음은 흑청색 매의 차례.

색관조가 축 처져 널브러져 있는 흑청색 매에게 다가가 발로 걷어찼다.

[야, 일어나.]

[…….]

[너 진짜 계속 기절한 척할 거야? 자꾸 그러기야?]

[끼이…….]

흑청색 매가 실눈을 슬며시 떴다. 아까부터 깨어나 있었다. 하지만 마치 이제 깨어난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냐는 식으로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봤다.

[주인님, 이놈 연기하는데요?]

“후후, 그럴 수 있지. 이제 보내주어라.”

[넵!]

호쾌하게 답한 색관조가 흑청색 매를 향해 일장연설을 토해냈다.

[너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다녀. 다음에 만나서도 또 내 앞에서 끼이이이익, 이러면 죽어! 명심해!]

[…….]

[운도 좋지. 가 봐.]

색관조가 왼쪽 날개를 펼쳐 창을 가리켰다.

흑청색 매가 진짜 가도 되는 건지 고민하느라 머뭇거렸다.

[가라고! 답답아!]

호통소리에 흑청색 매가 창을 빠져나갔다.

날면서 뒤를 돌아봤다. 영롱한 빛깔의 새와 그 주인이 보고만 있을 뿐이라, 속도를 올려 장원을 벗어났다.

멀어져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었을 때, 금섬이 색관조의 등에 올라탔다.

[그윽.]

[주인님, 그럼 저희도 다녀올게요.]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았음에도 금섬과 색관조는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하고 있었다.

주인을 안다.

주인은 만사 무관심.

그런 주인이 무언가를 하면 의미가 담긴다.

괜히 새를 잡고 또 놓아주는 수고로움을 하실 리가.

그래서 이번 놓아줌은 유령곡 때와 같았다.

흑청새 매를 추적한다.

적의 위치를 파악한다.

“다녀와라.”

후공도 기특하게 여겨 미소를 머금었다.

색관조가 흑청색 매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날아가며 깃털 색은 먹물처럼 검어졌고,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린 밤하늘을 나는 새와 두꺼비~~ 주인님의 명을 완수해내는 천공단의 추적자~~~. 언제나 그렇듯~~ 누구도 벗어날 수 없지~~. 새든, 돼지든~~. 우린 밤하늘을 나는 새와 두꺼비~~~.]

[그윽, 극극극~~~.]

후공은 피식하고 말았다.

깃털 색은 바꾸면서 소란스럽게 노래라니. 그래도 노랫말은 제법 그럴싸했다.

맞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흑청색 매는 목숨이 위협당했으니 더는 부근을 맴돌지 못할 것이다. 귀소본능이 일어 돌아갈 것이다. 안전한 곳으로, 자신의 주인에게로.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로.

그렇게 흑청색 매가 그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면 일은 쉽게 마무리 될 것이다.

기다리지 않고 마중갈 수 있다.

후공은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보물은 가끔 사람을 망친다.

감당할 수 없을 때는 화를 불러온다.

심할 땐 쉽게 죽지도 못한다.

모처의 석실.

야명주 불빛 아래.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쇠사슬에 사지가 묶여 비명을 질러대는 오십 대 사내도 그런 경우였다.

벗겨진 사내의 상반신에 꽂혀 있는 길고 굵은 바늘은 스물네 개. 바늘이 뚫고 지나간 모든 부위는 사람이 가장 크게 통증을 느끼는 통점들.

그렇기에 매질이 없어도,

채찍질이 없어도,

사내는 고통 속에 놓였고, 울부짖었다.

“제발 그만……. 제발 죽여줘어어어. 다 말했지 않느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그러니 제발, 죽여……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몸부림치지 않았음에도, 그저 외치는 것만으로도 통점이 자극된 탓에 사내는 죽음을 갈구했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석실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매달린 사내 앞, 의자에 긴 머리카락의 중년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시체와 같다.

어둡고 푸름스름했다.

여인은 그저 심드렁하니 손을 놀려댄다.

그에 따라 여인의 손바닥 위에 놓인 한 줌의 흙은 형태가 바뀌어갔다.

스르륵.

조그만 토끼였다가 허물어졌고, 다시 회오리친 다음에는 호랑이 형태가 되었다. 호랑이는 전갈이 되었다가 다시 거북이로 바뀌었다. 그렇게 각종 동물을 손바닥 위로 조형해내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사내를 향해 나아가 앞에 섰다.

어느새 여인의 손아귀에 놓인 한 줌의 흙은 날카로운 송곳의 형태.

송곳으로 사내의 뺨에 가져가 천천히 내리그었다.

분명 흙일진대 부서지지 않는다. 대신 사내의 얼굴이 찢기며 피가 배어났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당주.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어려울 때는 특히.”

“…….”

“우릴 배신하지 말았어야죠. 지귀객이 되지 말았어야죠.”

“으으으…….”

푸르스름한 얼굴만큼이나 새파란 여인의 눈동자를 보며 지귀객은 몸을 떨었다.

여인의 말도 송곳의 그어내림도 이어졌다.

“그랬다면 당신도 화경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 텐데…… 더 높은 곳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몽랑……. 제발…… 죽여줘. 제발…….”

“너무 재촉하지 말아요. 곧 소망이 이루어질 테니. 후공의 세 번째 신검만 회수하면 죽여줄게요. 갈기갈기 찢어줄게요. 물론 그 전에……”

여인이 혀를 내밀어 지귀객의 뺨에 맺힌 피를 핥았다.

황홀한 듯 눈을 파르르 떨었다.

“……당신의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먹어줄게요.”

“으으…….”

지귀객이 이를 부서질 듯 깨물었다.

눈앞의 여인은 과거 자신의 수하.

지천을 떠나며 품은 소망은 현실이 되었지만, 늘 품어왔던 두려움도 현실이 되었다.

지천이 찾아왔다.

지천은 극복해냈다.

토의 기운을 무궁히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

과거 자신의 수하였던 보잘것없던 여인조차 까마득히 높은 경지로 나아가 화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후회가 밀려들었다.

먄약…… 만약…… 만약……. 수많은 만약들.

그리고 최소한…… 최소한…… 최소한…….

최소한 금취객에게 만리향만 남기지 않았어도 실토할 것이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 하나만으로 끝났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후회는 늦다.

**

얻은 것이 있으면 어떤 건 잃게 된다.

지천이 그랬다.

동이 터올 무렵,

서서히 대지가 밝아오자, 지천의 삼당주는 신형을 멈췄다.

뒤따르던 일곱 명의 수하들도 멈춰 명을 기다렸다.

“기운을 보충한다. 장소는 저곳. 해가 뜨고 있으니 땅으로 이동한다.”

서 있는 장소는 언덕 위.

삼당주가 가리킨 곳은 언덕 아래 커다란 장원.

삼당주의 신형이 연기처럼 화하며 지면을 뚫고 들어갔다. 이어 수하들도 땅속으로 꺼지듯 스며들었다.

모두가 사라진 뒤 남은 건 여덟 개의 작은 구멍.

지천은 그들의 무학을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극복해냈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다면 잃은 것도 있기 마련.

토의 기운을 끝도 없이 취할 수 있었지만, 햇빛을 잃었다.

햇빛에 닿으면 타버리는 몸이 되었다.

그뿐 아니다.

잃은 건 하나 더.

“허억! 이, 이게 무슨?”

이제 막 잠에서 깨 침상 위에서 내려오려던 대연장주가 기겁했다. 방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리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면 놀랄 수밖에 없다.

연기는 빠르게 짙어지며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누, 누구?”

지천의 삼당주.

대연장주로선 알 수 없다.

삼당주가 장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장주의 몸이 자석처럼 손아귀로 끌려왔다.

누군지 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삼당주가 장주의 목을 깨물었다.

피를 빨았다.

“흐어어어업!”

대연장주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져갔다.

그것도 잠시, 서서히 눈을 감으며 축 늘어졌다.

반면, 삼당주의 안광은 강렬해졌다.

한참 동안 피를 빨아마신 뒤, 늘어진 장주를 내던졌다.

“흐어어어억!”

“흐으으으으……”

“커억, 컥컥!”

장원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들.

수하들이 순조롭게 기운을 보충하고 있었다.

삼당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마음에 떠오르는 말,

지천이 또 무언가를 잃었냐고?

아니. 지천은 잃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 따위 의미없다.

잃은 건 없다. 그저 강대한 힘을 얻었을 뿐.

고작 햇빛.

고작 선의.

문제될 것 없다.

힘은 햇빛보다 따사롭고,

선의의 평가는 힘에 의해 언제나 뒤바뀐다.

.

.

.

.

지천은 정오까지 머물렀다.

운기하며 기운을 회복했다.

일찍 운기를 끝마친 삼당주는 한참이나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한순간 바닥이 뚫리며 수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신조는?”

“시도해보았지만 아직 소리가 닿기엔 거리가 있는 듯 합니다.”

손가락만 한 작은 피리가 있다.

사람은 들을 수 없는 소리는 멀리까지 퍼지고, 신조는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반응이 없기에 아직 금취객의 곁, 혹은 금원장 주변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삼당주가 몸을 일으켰다.

“장원을 불태운 다음 출발한다.”

**

한낮에 대원장이 불길에 휩싸이자, 마을 사람들이 놀라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한탄했고, 또 누군가는 빨리 불을 꺼야 한다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그 가운데 장원 위 하늘에 흑청색 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청색 매가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니, 색관조에게 이 불길은 의미로 다가왔다.

불타는 장원 안으로 날아들어가 곳곳을 살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공통점들.

주검마다 하나같이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채였고, 처소는 어느 한 곳 빠짐없이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윽, 그으으으윽!]

[그러게. 이놈들 땅을 파고 이동해. 주인님이 말씀하시던 지천이 틀림없어. 돌아가자.]

[그으으윽!]

[죽이자고?]

[그윽.]

[좋아.]

불과 연기를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배회하던 흑청색 매가 그제야 발견하고 도주하려 했지만, 늦었다.

스쳐가며 금섬이 입을 벌려 독연을 뿜어냈다.

[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공청석유를 흡수한 색관조는 영향이 없었지만, 흑청색 매는 가버렸다. 즉사해 너풀너풀 장원의 불길로 떨어져내렸다.

[쯧쯧, 그러게 주인을 잘 만나야지.]

[그윽!]

그대로 선회해 하늘을 질주했다.

**

그로부터 나흘.

금원장에 천공단과 무당이 도착했다.

맞이하려 강유를 비롯 신투와 대공자가 나서니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대공자! 자네…… 여기 와 있었나?”

“대공자,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잘 됐습니다.”

무당의 청진자와 운학이 놀라워했고,

“형아!”

“형님이 왜 여기에?”

“하하, 형님! 저흰 어디 멀리 가신 줄 알았습니다.”

“두목, 제발 어디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해주라고!”

천공단은 놀란 척했다.

*

그 밤,

운학은 아버지와 마주앉았다.

“아버지, 근심이 많아 보이십니다. 멍 자국은 또 뭐고요?”

“근심은 무슨. 너 기다리느나 진이 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냐. 멍 자국은 계단에서 굴러서 그런 거다. 그래도 운이 좋았어.”

“운이 나쁜 게 아니구요?”

“이만한 게 얼마나 다행이냐. 천운이다, 천운. 천화서고 대공자를 만난 것도 행운이고.”

“대공자가 뭘 했기에…….”

“아무것도. 그냥 그런 사람이 있지 않느냐. 곁에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강유는 이미 들었다.

지천의 흔적.

지천이 다가오고 있는 중.

하나의 장원을 피로 물들이고 불태웠노라 했다.

대공자가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사실.

지천은 극복해낸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오면 신검을 빼앗기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 하나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무당의 이인자인 청진자가 있다해도 장담할 수 없을 터.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운학. 내 아들 강선.

강유는 눈물이 터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내가 잘못했다.

널 잃을 뻔했다.

그러니 대공자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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