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나의 검.
‘아…….’
뒤늦게 강유도 땅의 진동을 느꼈다.
이어 들려온 청진자의 외침. 누군가를 크게 부르는 소리가 점점이 멀어져간다.
이리되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지천이…… 왔구나.’
또 알게 되는 것이 있었다.
지천은 도주 중.
지천은 금원장 부근을 스쳐갔을 뿐이다.
누가 지천을 쫓고 있는가? 무당의 청진자가 ‘이보게’라고 부른 상대는 대체 누구인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천화서고 대공자.
지천은 금원장에 닿지 못했다.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쫓기고 있다.
- 지천은 너에게 닿을 수 없다.
대공자의 말대로였다.
대공자의 모습이 떠오른 탓에 강유가 멍하니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자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아버지!”
들어선 건 운학이었다.
“……어.”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
괜찮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어떤 자인지 몰라도, 사부님께서 나서셨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럴 테지.”
그래, 그럴 것이다.
별일 없을 것이다.
대공자가 쫓고 있으니.
*
청진자가 신형을 끌어올려 곁에 이르렀다.
“대공자,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누굴 쫓는 겐가?”
이야기는 나중에, 라고 했지만 청진자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천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지천?”
청진자는 갸웃했다가 이내 떠올렸다.
“아! 두더지!”
지천을 만난 적은 없지만 청진자도 듣긴 했다. 땅속을 두더지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오래전에 사라지지 않았나?
지금 다시 나타난 건가?
의문은 이어진다.
한데 대공자는 왜 지천을 쫓는 것인가?
그렇게 묻자, 대답 대신 들려왔다.
“신형을 위로.”
“……!”
생각이 많아진 탓에 눈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가옥을 그대로 뚫고 지나갈 뻔한 청진자가 급히 신형을 위쪽으로 솟구쳤다.
이제 번화가였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걷던 이들이 쿠르르르르르, 땅이 울리는 소리에 놀라 눈이 커졌을 때는, 땅의 울림은 어느샌가 빠르게 멀어진 뒤였다.
지붕을 딛으며 뒤쫓는 후공과 청진자의 모습은 거센 바람과 같아, 아예 알아보지도 못했다.
“지천이 땅속에서 이리 빠를 줄은 몰랐군.”
“동감입니다.”
“셋인가?”
“하나입니다.”
“응?”
**
지천은 셋이 아니라, 하나.
둘은 하나를 쫓고 있을 뿐이다.
둘에 쫓기는 지천 삼당주의 초조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땅속에서 추격당하는 경험은 그로선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것도 검에게 쫓기다니.
사람이 아니어서 더 무서웠다.
검을 떨쳐내기도 어렵지만, 어찌어찌 검을 떨쳐낸다 해도 검의 주인이 남아있는 것이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였는데…….
모습만으로는 나무토막 하나 분지르지 못할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눈빛만큼은 기이했다.
휘도는 자줏빛 광채 속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눈길은 극도의 무심함.
나른하고 따분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서웠다.
그는 누구일까?
생각은 날아갔다.
카르르르르르르르릉!
뒤쪽에서 쇄도하는 두 자루의 검이 포악한 소리를 내며 근접해오고 있었다.
삼당주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우수를 뒤로 뻗어 지경을 운용했다. 손길에 따라 뒤쪽의 흙더미가 순식간에 뭉쳐 굳어졌다.
지경(地硬).
지경이 운용되면 굳어진 흙의 단단함은 돌을 넘어 쇳덩이와 같아진다. 또 여러 형태를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두껍게 만드는 데 총력을 다했다.
막을 수 있는가?
아니다. 오래 버틸 수 없다.
이미 여러 차례 시도했고, 매번 돌파당했다.
카가가가가가강!
지경으로 형성한 철의 방패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에 갈려나간다.
지경은 그저 잠시 시간을 버는 용도.
조금 거리를 벌릴 여유를 줄 뿐이다.
소름 돋는 소리를 뒤로하고, 삼당주는 시냇가 바닥을 관통하고 또 다른 산으로 향했다.
산의 정기가 흡수되었다.
하지만,
‘피가…… 피가 필요해.’
갈증이 심하게 올라왔다.
매 순간 극심하게 소모되는 내력은 토(土)의 기운으로 빠르게 보충되고 있지만, 무한하진 않다. 피가 없이는 몸이 굳어진다.
‘이대로면 오래 버틸 수 없어.’
도주는 한계가 있다.
숨어야 해.
제발, 제발 통하길…….
쿠르르르르르르르.
산을 뚫고 들어갔다가 아래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뚫고 내려갔다.
삼십 장, 오십 장, 칠십 장.
멈춘 건 백이십여 장에 이르러서였다.
더 아래까지는 무리였다.
몸을 짓눌러오는 땅의 압력을 버틸 수 없다.
급격한 방향 전환과 깊이 파고든 탓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를 이용해 삼당주는 기척을 지웠다. 호흡마저 멈춘 채 자줏빛 검광이 자신을 놓치길, 그저 지나가길 소망했다.
카르르르르르릉.
거친 소리를 내며 땅을 뚫고 쫓아온 두 자루의 검은 이내 고요해졌다. 기운이 증발하듯 끊어졌기에 부근을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찾아다녔다.
그러는 한편 주인의 의식에 의지했다.
너무 깊은 탓일까.
주인도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지 못한다.
하지만 주인의 의지가 전해져 온다.
부근에 있다.
주위를 쓸어라!
그 의지를 따라 검령과 친이 광채를 발했다. 그 부근을 난도질하듯 갈지자의 형태로 막무가내 휘젓기 시작했다.
‘무, 무슨…….’
삼당주는 비명이 터질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아악!
자줏빛 광채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고, 다른 하나는 허리 곁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삼당주는 식은땀으로 등이 척척해졌다.
검이 회수될 것이라는 건 오산이었다. 아예 부근을 휘젓고 다닌다. 이러다 보면 얻어 걸리겠지란 식으로, 무작위로 주위 방원 십여 장을 사방팔방 쓸어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촘촘히 쓸어가는 탓에 당장이라도 꿰뚫릴 것 같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한순간,
스아악!
흙을 뚫고 눈앞으로 자줏빛 섬광이 짓쳐들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자줏빛 섬광은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덕분에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가라앉혔던 내력이 끌어올려졌다.
스치듯 지나쳤던 검령과 친이 그 기운을 읽었다.
우뚝 멈춰선 다음,
카르르르르르릉.
돌아왔다.
삼당주는 황급히 기운을 가라앉혔다.
흙더미를 천천히 뚫고 나온 두 개의 자줏빛 광채가 눈앞에서 확인하려는 듯 어른거렸다.
당장이라도 두 자루의 검이 그대로 질주해 자신을 난도질할 것만 같았기에…….
꿀꺽.
삼당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덜덜 떨었다.
‘제발…… 돌아가……. 제발…….’
그 간절함이 통했음인가.
카르릉.
한차례 울더니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어 쓸어갔다.
겨우 한숨 돌리긴 했지만 이대로 안도하고 있을 순 없었다.
여기 그대로 머물다간 결국에는 관통당할 터.
삼당주는 검의 위치를 가늠한 다음, 최대한 멀어졌다 싶은 순간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내 폭발적으로 질주했다.
그에 검령과 친이 반응했다.
휘저어가다 멈춰 방향을 돌렸다.
카르르르르르릉!
사납게 울면서 다시 뒤쫓았다.
‘시발 것들…….’
삼당주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자신의 한쪽 팔을 물어뜯어 피를 빨았다. 자기 자신의 피는 큰 효용이 없다. 그저 임시방편. 몸이 굳어지려 하기에 버티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산의 암석층을 만난 것도 다급해진 원인이었다.
쿠르르르르릉!
암석을 두부처럼 부수며 미친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흙을 뚫고 갈 때와 달리 속도는 줄어들기에 초조함이 커졌다.
암석은 한동안 이어졌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건가.
이대로면 따라 잡힌다.
그러던 한순간,
암석층에서 벗어났다.
콰아앙!
암석을 돌파했다 싶을 때, 햇살이 눈으로 쏟아졌다.
“아!”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어디를 뚫고 나온 것인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몸이 허전하다. 발이 허전하다.
발 밑은 허공.
절벽 너머였다. 질주하던 속도가 있어 그대로 절벽을 뚫고 허공을 쭉 돌파하고 말았다. 눈을 떠 내려다보니 발밑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그것도 놀라웠지만, 더 큰 문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기에 절망했다.
‘아침이었어…….’
*
기척을 따라 추적하던 청진자가 절벽 끝에 이르러 멈췄다.
지천의 이동방향은 절벽 쪽.
이 방향을 유지한다면 절벽의 암석을 뚫고 나오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콰아앙!
폭음과 함께 절벽이 뚫리며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뚫고 나온 속도 탓에 한참을 나아갔고, 또 그 속도 탓에 허공에 뜬 채였다. 그 상태로 지천이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날개가 없으니 끝이었다.
날개가 없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
지천을 사로잡으면 좋겠지만 거리가 제법이다. 무리하면 닿을 수는 있을 듯한데, 다시 돌아오는 건 장담할 수 없었다.
“대공자, 이제 어쩔 수……?”
시선을 돌려 곁의 대공자에게 말하던 청진자가 멍해졌다.
바람이 일더니 그대로 대공자가 절벽 너머로 신형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대, 대공자! 돌아오게!”
무모하기 짝이 없어 청진자가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청진자는 눈을 부릅떴다.
대공자가 허공을 한 차례 딛더니 그대로 쭉 나아가, 추락해가는 지천을 붙잡은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게…… 무, 무슨……?”
지금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맞나 싶어 청진자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대공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천을 붙든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때 절벽 아래쪽에서 두 개의 자줏빛 광채가 튀어나왔다. 대공자를 향해 쇄도해가더니 그대로 하나는 검집으로 돌아가고, 다른 하나는 대공자의 소맷자락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제야 청진자는 이해했다.
‘지천이 셋이 아니라 하나라고 한 것이…….’
답을 듣지 못했는데 비로소 대공자의 말을 이해했다.
지천은 하나.
둘은 대공자의 검.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땅속까지 이기어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부분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경지인가?
북교산에서 여우가 되어 날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보다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런 청진자의 예측은 빗나갔다.
화르르르르르.
지천이 대공자의 손아귀에서 불타올랐다.
지천의 머리가 타들어가고, 옷에 불길이 일고, 얼굴이, 손이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친 듯이 꿈틀대며 불길에 휩싸이더니 이내 잿가루가 되어 흩어졌기에,
“어…………………….”
청진자는 주춤 물러났다.
너무나도 잔혹한 손속이었다.
대공자는 지천과 원한이 있었던 것인가?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길래 삼매진화를 펼쳐 산 채로 태워죽인단 말인가?
청진자로선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삼매진화도 화극의 염화도 아니었다.
후공은 죽이지 않았다.
지천은 그저 스스로 타버렸다.
그래서 후공은 갸웃.
잿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다 한순간 이해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빛이로구나.’
지천은 극복했지만, 잃기도 했구나.
해 아래 다닐 수 없는 몸이 되었구나.
타버리는 몸이 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본래 오행의 토는 일(日)과 상극이 아닌데, 중간에 뭔가 작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되는 일.
환명을 딛고 절벽으로 돌아왔다.
“대, 대공자…….”
잔혹한 손속에 하얗게 질린 청진자가 더듬거렸다.
후공이 미소 지었다.
“지천은 햇살에 타들어간 것입니다. 지천의 본거지며 캐물어야 할 것이 많았던 터라 저도 많이 아쉽군요.”
진실과 거짓말을 섞어 말했다.
햇살에 타들어간 것도 맞고, 타버린 놈이 우두머리였기에 되도록 살려두려 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아쉬울 건 없다.
“자네는…… 검을 찾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혹시 지천이…….”
“네, 지천이 검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체 어떤 검이길래…….”
후공은 친이 맴도는 소맷자락을 슬쩍 바라봤다.
‘나의 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시선을 들어 청진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인의 신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