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모든 걸 자백한 지천은 다시 땅에 묻혔다.
이번엔 생매장이 아니었다. 정상적으로 묻혔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단 나았기에 천공단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죽음을 맞이한 지천이 거기에 동의하느냐는 천공단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천공단의 관심사는 하나.
이제 단주를 따라 운남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래서 내심 오들오들 떨었다.
자백에 따르면 지천의 경지는 위험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총 규모는 50명 내외.
지천주 아래 세 명의 각주, 그 아래 당주가 다섯.
당주 휘하 일곱 명씩 배정되어 있다.
인원은 소수라 할 만했지만 문제는 당주급이라도 경지가 화경의 중에 이르렀고, 각 당주 아래 속한 이들도 모두 화경 초기인 예에 이르러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각주들은 화경의 극에 진입했으며, 지천주는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하니 아무래도 단주가 홀로 나아가 상대하려 할 것 같았다.
동정호에서 생떼를 쓸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
돌아가라는 말이 떨어지면 이번엔 군소리 없이 몸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멍한 얼굴로 다들 뭐하고 있습니까? 출발하죠.”
동행한다는 말이 떨어졌기에 모두는 더욱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방방 뛰었다.
두려움 따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천공단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
밤을 내달리는 천공단은 고요했다.
원래 말이 많은 천공단으로서는 이례적인 상황이었지만, 진실은 달랐다.
- 사형, 우리 저녁 안 먹었지 않아?
- 야, 분위기 깨지 말고 닥치고 있어. 까닥 잘못하면 여기서 안녕이야.
- 어……. 그럼 육포 남은 거 있어?
- 다 먹었지.
- 개새끼.
- 사실은 남았는데.
- 개형님. 제가 개새끼였습니다. 조금 나눠 주십쇼. 부탁드립니다.
- 하하, 거짓말이지 멍청아.
- 사형, 너 진짜…….
- 우냐?
거지들이 배고픔을 참아가며 전음을 나눴고,
- 형님, 운남 가보셨습니까?
- 아니, 처음이지.
- 운남도 한번 안 가보시고 뭐하셨나요?
- 넌 가본 거야?
- 저도 처음입니다.
- 흐흐, 너도 천공단 다 됐구나.
모용진과 남궁연이 뻘소리를 나눴다.
그런 가운데 다른 한쪽에서는 나름 진지한 이야기가 전음으로 오갔다.
- 신검을 다 찾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 어떻게 되긴?
낭인왕의 물음에 항마 중 이열이 갸웃했다.
- 아깝잖아. 무림맹에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게.
- 뭔 소리야! 그걸 왜 돌려줘?
- 응?
- 찾은 사람이 가져야지. 당연한 걸 묻네?
- 그런가?
- 잃은 놈들이 잘못이지. 형님이 이 고생을 해서 찾았는데 그걸 달라고 하면 미친놈들이지.
- 우리야 그게 당연한데, 형님 성향이 문제라서 하는 소리지.
- …….
그 말에는 이열도 입이 콱 막혔다.
여태 봐온 형님은 탐욕을 부리는 성향이 아닌 것이다.
모든 걸 같잖게 보는 경향도 심해서 객잔에서 누군가 소란을 피운다 치면 가서 두드려 패라는 것이 아니라, 돈 좀 쥐여주고 내보내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으면 싶었다.
- 그래도 신검은 형님이 가져야지.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없다며. 그리고 생각해봐. 천하제일인의 신검이 천공단주의 손에 있는 거야. 끝내주게 멋지지 않아?
- 크으, 생각만 해도 죽이네.
- 무림맹이 강하게 나오면 무림맹과도 한판 붙는 거고.
- 크으으으으…… 그건 무섭구만.
- 하하하!
- 그나저나 금적선생은 뭐하고 있으려나.
무림맹을 말해서일까. 낭인왕은 제갈혜, 설영과 함께 무림맹으로 떠난 금적선생이 떠올랐다.
- 아마도 피리 불고 있겠지.
- 흐흐, 아마도…….
*
그랬다.
금적자는 무림맹에 아직 머물러 있었고, 피리를 불었다 멈췄다 했다.
멈출 때면 말하곤 했다.
“아, 심심하네. 되게 심심하구만.”
처음 무림맹에 도착할 때만 해도 오랜만이라 반갑고 좋았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제 이곳엔 맹주 후공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천공단이 그리워졌다.
천공단과 뚝 떨어져 있어 보니 삶이 이렇게 무료할 수가 없었다. 함께 온 것이 하필 제갈혜와 설영이라서 더 그런 느낌.
과거 멸살단에 합류해 무극살부를 박살 내던 때는 그래도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함께여서 노닥거리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심심해. 다들 보고 싶구만.”
천공단과 정이 많이 들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여기 주문이요!”
그로부터 이십여 일.
천공단은 운남 중북부 낙화현 부근 반점에 들었다.
점창산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신법을 펼쳐 달린다면 반나절이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태 쉼 없이 달려온 수고에 대한 보상의 시간.
주문한 요리가 나오자, 천공단이 걸신들린 것처럼 숨도 안 쉬고 무섭게 먹어댔다.
대화는 없다.
대화고 뭐고 누군가 말을 걸면 그게 누가 됐든 한 대 칠 기세여서, 주위 손님들이 뭐하는 자들인가 하고 한 번씩 힐끔거렸다.
똑바로, 오랫동안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천공단의 반절은 인상이 반듯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험악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예외는 언제나 존재한다.
일단의 무리가 반점 안으로 들어서더니 시선을 훑다가 천공단을 지나쳤다가 다시 천공단 쪽으로 시선이 돌아왔다.
다섯 명으로 모두 젊었으며, 등에 검을 매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도 잠시, 이내 천공단 앞에 섰다.
“너희! 어디에서 온 누구냐?”
인사는 생략되었고, 말투는 고압적이었다. 얼핏 살기까지 드러내니 천공단의 젓가락질이 뚝 그쳤다.
“…….”
“……?”
“……!”
먹을 땐 개도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오랜만에 맞이한 식사를 방해받으니 다들 표정이 좋을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금 들려왔다.
“귀가 먹은 거냐!”
이젠 거의 고함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바라보며 외친 대상이 무산쌍웅이었다.
이 정도면 싸우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먼저 칼을 뽑느냐의 문제.
무산쌍웅이 의자를 살짝 뒤로 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잘 안 들려서요.”
주눅 든 목소리를 냈다.
“다시 묻는다. 어디에서 온 누구냐?”
“네. 전 이름이 무산이고…… 광서에서 왔습니다. 제가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이렇게 생겨서…… 죄송합니다. 근데 이렇게 태어나서 저도 늘 슬픈 마음으로…….”
“흐음…….”
목소리를 냈던 청년 검수가 침음성을 흘렸다.
상대가 바짝 엎드리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거기에 빙 둘러 훑자 하나같이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모욕에 민감한 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지만 강호인들은 특히 더하지 않던가. 힘이 있는 자가 굳이 체면을 구길 이유는 없는 것이다.
“미안하게 됐다.”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돌려 다섯 검수가 반점을 빠져나갔다. 험악한 분위기에 일순 고요해졌던 반점은 다시금 활력을 찾았다.
그건 천공단도 마찬가지였다.
바쁘게 젓가락질하며 떠들어댔다.
“와아, 점창파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
“그러게. 완전 눈이 돌아갔어.”
“모두 사실이었잖아.”
상대가 점창파임은 모두가 한눈에 알아봤다.
청년 검수들의 의복이 동일했고, 가슴 부위에 부서져 내리는 햇살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으니 점창이었다.
“근데 우리 쌍웅! 주눅 든 모습 너무 잘 어울리던데?”
“맞아. 늘 해오던 모습 같더라고.”
항마삼협과 낭인왕이 무산쌍웅을 놀렸다.
쌍웅은 그저 실실거렸다.
“우리가 하면 또 잘 하지.”
“이렇게 생긴 게 죄는 아니잖아? 흐흐흐.”
이미 점창파임을 확인한 순간, 그리고 살기등등 다가오는 와중에 모두에게 단주의 ‘대응하지 말라’는 전음이 전해졌던 상황.
이유는 물으나 마나였다.
상황의 확인이자, 유추.
구대문파 중 하나인 점창이 외지에서 온 듯한 강호인에게 아무 이유 없이 무례함으로 도발할 리 없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음이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
모두를 의심하고 있다.
점창은 아직 ‘그녀’를 찾지 못했다.
점창이 와서 건넨 말은 단순히 ‘어디에서 온 누구냐’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커다란 문제에 직면해 있고,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고 외치고 간 셈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가 무엇인지 천공단은 이미 지천의 자백을 통해 들은 터.
분명 점창의 태도는 몰상식했지만,
이해의 범주.
하나를 잃는 건 하나만이 아니다.
점창의 별 하나가 지면 모두의 별이 진다.
그럴진대 장문인의 딸이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
점창 장문인의 눈동자는 죽어 있었다.
평소, 아니 몇십 년 이래 이토록 생기 없는 눈동자의 장문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함께한 점창의 여섯 장로의 목소리는 극히 조심스러웠고,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려 애썼다.
“장문인, 백방으로 찾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불행을 미리 예단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의 일도 웃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뻔한 말. 허공을 움켜쥐는 것처럼 공허하다.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말을 꺼낸 장로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함께 울 수는 없다. 누군가는 희망을 말해야 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장문인의 딸이 실종된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간다.
그야말로 하늘로 솟듯,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운남에서 점창은 그야말로 무소불위.
어느 곳을 가든 점창의 이름은 통했고, 삼대제자라 해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럴진대 장문인의 딸이 사라졌다.
그녀의 평소 행실도 고요해, 홀로 먼 길을 떠났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니, 답은 나와 있다.
이제 희망은 없다.
여전히 제자들이 사방팔방 운남을 휘저으며 찾고 있지만 소득이 없다.
대가를 얻기 위한 납치라면 이미 제안이 왔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연락도 없으니…….
남아있는 건 시신이라도 찾는 것.
어딘가에 참담하게 버려져 있는 건 아닐까. 그 참혹한 주검을 장문인이 보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금은 그런 새로운 두려움을 기다리는 시간일 뿐.
하지만 장문인에게 말할 순 없다.
저 죽어가는 눈동자를 보면 입을 뗄 수가 없다.
그때,
“장로들의 말씀…….”
느릿하게 장문인의 말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말이 이어졌다.
“모두……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받아들여야 할 때란 건 본 장문인도 알고 있습니다.”
“…….”
“…….”
“…….”
여섯 장로의 마음에는 큰 한숨이 터져나온다.
“하오문을 찾아…… 의뢰해보도록 합시다. 지금은 점창의 명성이나 본 장문인의……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닌 상황입니다.”
무엇을 의뢰한다는 것인지는 알고 있다.
딸의 시신.
그렇기에 장로들은 옅게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할 수 없었다.
내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기 힘든 분위기 아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문인,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오라.”
“네.”
들어선 건 장문인의 대제자 곡명이었다.
곡명이 예를 갖춘 후 입을 열었다.
“손님이 찾아와 장문인을 뵙고자 합니다. 밝히길 천화서고 대공자라 하였습니다.”
장문인이 미간을 좁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천화서고 대공자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최근 명성이 자자했으니 모를 수 없고, 관심도 가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를 맞이할 상황이 아니다. 예를 갖춰 대하고 다음을 기약하도록 해라.”
“송구합니다만…… 그가 이상한 말을 건넸습니다.”
“……?”
장문인이 갸웃했다.
“그가…… 현 본파의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초유 사매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죽어있던 장문인의 눈이 살아난 건 순간이었다.
불길을 뿜어냈다.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 테두리에 황금빛이 떠올라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지금 당장 모셔라! 아니, 아니다. 내가 가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 장문인의 신형이 쏘아졌고, 멍해 있던 점창의 여섯 장로들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희망과 함께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