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너희는 하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 갈린다.
삶의 출발점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태어나보니 사막…….
태어나보니 북해…….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태어나보니 어머니가…….
부모가 누구냐, 어떤 환경이냐가 일생을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난 제법 괜찮지. 클클클.’
쿠르르르르르르르.
땅속을 헤쳐나가며 군보는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은 그 멍청한 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년의 이름이 초유라고 했던가?
하필 점창 장문인의 딸로 태어난 탓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부모를 탓해야 한다.
그에 비해 자신은 지천주의 아들.
쌍둥이로 태어난 건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그 와중 먼저 나와 형이 된 건 다행이었다.
‘밤낚시나 다니는 멍청한 놈 같으니.’
동생 군호를 비웃어준 후에도 군보는 희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크게 상심한 점창의 검수들.
시신을 찾는다며 방을 붙이고 다니는 모습은 그도 보았다. 상심한 그들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 코웃음칠 뻔했다.
정파놈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노라면 웃겨 죽는다.
단순한 놈들이다.
하나를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처럼 상심한다.
핵심 인질 하나만 잡고 있어도 초상집.
문제는 그렇게 당하고도 야비한 수를 쓸 줄 모른다는 점이다. 미친 새끼들. 강호를 거닐면서, 강호인이라 말하면서 정면승부를 논하다니.
비겁하면 안 된다고?
비열한 술수를 부리면 안 된다고?
개소리다. 그러니 당하는 거다.
점창은 이제 끝이다.
아버지가 옳다.
적을 공략함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쉬운 길이 있다면 돌아갈 이유가 없다.
상대의 정신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길이 뻔히 보인다면 그 길로 가야 한다. 비열한 짓이다, 야비한 짓이다, 짐승만도 못한 짓이다. 그런 말들은 패배자의 부르짖음일 뿐.
죽고 죽여야 하는 적이 아닌가.
혼이 흔들릴 정도로 정신을 들쑤셔놓은 다음, 숨통을 끊어버려야 한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아버지도 흔들릴까? 만약 내가 점창의 인질이 된다면, 아버지는 날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내놓을까?’
나오는 건 웃음.
의미 없다.
애시당초 ‘만약’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땅을 파고들며 자유자재로 지하를 이동할 수 있는 자신을 누가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나이에 화경의 예에 이른 자신을 누가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강호에 이름난 후기지수들 누구도 화경에 이른 자가 없다.
소림의 무종, 무당의 운학, 화산의 현조, 남궁세가의 남궁연까지도.
‘아……!’
한 놈이 있긴 하다.
천화서고 대공자.
들리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놈은 화경에 들었을 것이다. 상관없다. 머릿속에 먹물로 가득 찬 놈 따위 위협이 될 리가. 언젠가 목을 따주마.
희열이 들끓어서인가.
생각은 어느샌가 옮겨간다. 여인을 떠올렸다.
특이한 여자였다.
몇 번이나 잠자리를 함께하고도 지겹지 않은 여인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지겨워지면 피를 빨고 죽였을 텐데 어처구니없게도 지겨움이 없었다. 놀랍도록 빼어난 미인도 아니고, 몸매가 남다른 것도 아닌데 빠져든다.
그렇게 여인의 모습을 떠올려가던 순간,
군보의 미소는 사라졌다.
땅을 뚫고 가던 그의 움직임도 뚝 멈췄다.
‘……?’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분명 스윽, 스윽, 땅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또 들리지 않는다.
‘뭐지?’
친이었다.
친은 상대가 멈춰 파악하려 들었기에 숨죽였다.
들키면 안 된다. 그것이 주인의 뜻.
주인은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친은 흙 속에 파묻힌 채 빛마저 갈무리했다.
스스스슷.
다시 들려온 소리.
군보는 이내 피식 웃었다.
이젠 알 수 있었다. 두더지가 곁을 지나가기에 지풍을 날려 머리를 꿰뚫어 죽여버렸다.
거의 다 왔다.
속도를 올려 순식간에 여인의 방, 침상 밑바닥에서 몸을 드러냈다.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니, 여인의 들뜬 음성이 들려왔다.
“오셨어요?”
“그래. 기다렸나 보군.”
“네……. 보고 싶었어요.”
여인이 수줍게 말했다.
여인은 방이 어두워 자신의 뺨이 붉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당신도…… 내가 보고 싶었나요?”
군보는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여인이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격하게 입술이 닿았다. 여인은 놀라 눈이 커졌다가 이내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격한 입맞춤인데 왜 감미로운가. 이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아 눈을 감으려던 여인은 다시 눈이 커졌다. 사내 때문이었다. 사내가 눈을 부릅뜨더니 자신을 밀어내고 몸을 돌린 것이다.
‘왜?’
여인이 의문을 떠올린 순간,
파아앙!
군보의 몸이 날아갔다.
벽을 뚫고 나뒹굴었다가 순식간에 신형을 일으켰다.
군보는 경악에 차 자신을 공격해 온 상대를 바라봤다.
경악은 커졌다.
고작 청년.
그것도 단아한 서생 차림.
“누, 누구냐?”
“반갑구나. 군보.”
나직한 음성. 대답 대신 자신의 이름이 불렸기에 군보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함정.’
위험하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있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니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점혈해오는 상대의 지풍을 호신강기로 막았지만 그 반동만으로 자신이 날아가버렸다는 것…….
더 고민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대로 신형을 흩어 지면을 파고들려 할 때, 밑에서 자줏빛 섬광이 번뜩이며 짓쳐들었다.
“헉!”
놀라 튕기듯 신형을 솟구쳐 올라 천장을 뚫고 나아가려 할 때, 군보는 다시금 경악성을 토해냈다.
“으헉!”
위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자줏빛 검광이 맹렬히 쏘아져왔기에 신형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며 떨어져내렸다. 이대로면 꿰뚫린다. 호신강기를 극대화해 막아내려 할 때, 두 검은 그저 몸을 스치듯 교차했다.
그 순간이면 후공에겐 충분했다.
터억!
후공의 손이 호신강기를 뚫고 그대로 군보의 목의 맥문을 움켜쥐었다.
축 늘어진 채 들린 군보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누, 누구?”
“다, 당신…… 누구길래.”
군보뿐 아니라 여인도 물어왔다.
대답은 들을 수 없다.
후공이 한쪽 소맷자락을 뒤로 펄럭인 순간, 여인은 그대로 잠들었고 뒤이어 군보도 고개를 떨궜다.
뚫린 천장을 통해 은앙개와 언교운이 내려섰다.
손에 든 검은 보자기에 군보를 밀어넣었다.
촤악.
끈으로 단단히 묶은 후 은앙개가 떠들었다.
“하하, 한 놈은 잡았고, 다른 한 놈은 언제 오려나!”
**
다른 한 놈은 막 시비가 붙었다.
호숫가 늘 자리하던 곳에서 시비가 털린 군호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새끼야, 재수없으니까 꺼지라고! 푸르딩딩한 얼굴 때문에 술맛이 안 나잖아.”
자신은 조용히 낚시 중이었을 뿐인데 갑자기 술병을 들고 나타난 도객이 꺼지라고 하면 할 말을 잃게 되는 건 당연했다.
“안 가냐! 안 들려! 귀가 먹었어?”
“내가 먼저 왔다만.”
“그래서 뭐? 나랑 해보자는 거야?”
“그냥 가라. 낚시할 땐 누굴 죽이고 싶지 않아.”
“뭐가 어째! 이 상놈의 새끼가 당연히 이길 것처럼 말하네?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딴 소리를 떠드는 거냐!”
“누군데?”
“내가 인마, 낭인왕이야! 들어봤냐?”
“오호!”
군호가 눈동자에 이채를 띠며 탄성을 발했다.
어찌 들어보지 않았겠는가.
낭인들의 우상.
도법이 뛰어나 그의 삼도(三刀)를 받아내는 자가 드물다고 알려져 있으니 반갑기까지 했다. 살심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클클, 그럼 넌 죽일 가치가 있겠다.”
“응?”
낭인왕이 갸웃한 사이, 군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뭐야? 어디 갔어? 야, 도망쳤냐?”
쿠르르르르르르.
땅의 울림이 들렸다 싶은 순간, 낭인왕의 발밑을 뚫고 시커먼 창날이 솟아올랐다.
“으엑!”
화들짝 놀란 낭인왕이 훌쩍 뛰어 간신히 벗어났다.
낭인왕이 서 있던 자리로 검은 연기로 화한 군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죽 웃었기에,
낭인왕이 술병을 던지고 서둘러 말했다.
“너 뭐하는 새끼야? 두더지야? 야, 내가 그냥 갈게. 내가 잘못했다. 그냥 없던 일로 하자.”
“후후, 늦었지.”
“야이 새끼야, 한 번만 봐줘!”
“하하하하하!”
꼴사납기 짝이 없어 군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사이 낭인왕이 뒷걸음질쳤다.
“나 칼 안 뽑는다. 칼도 안 뽑는데 공격하기 있기 없기?”
“미친 새끼.”
오늘 낚시는 여기까지.
오늘은 물고기 대신 낭인왕의 목이다.
강호의 명성이 과장된 듯하지만, 그래도 기념할 만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또 이 정도면 굳이 땅속을 헤집을 필요도 없을 듯했기에,
스스스슷.
군호는 늘어뜨린 지면의 흙을 당겨 토검을 만들어 쥐었다. 목을 썰기 좋게 검날은 날카롭게 다듬었다.
“너…… 그, 그거…… 어, 어떻게 한 거야?”
그 말과 함께 낭인왕이 술병을 던지고 도주했다.
후후, 도망칠 수 있을 리가.
군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신형을 날렸다.
간격은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고작 이 정도로 그런 명성이라니. 우습기 짝이……?”
군호의 말은 끊어졌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몸이 굳어지고 꼼짝도 할 수 없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점혈? 어, 어떻게……. 왜……? 누가……?’
점혈 당하고도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낭인왕이 아니다.
낭인왕은 저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야! 왜 안 쫓아오냐? 혹시 점혈당한 거야?”
“…….”
“이런, 점혈당했나 보네.”
“어, 어떻게?”
군호가 더듬거렸다.
그 물음에 답한 건 풍경.
곁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풍경에 세 사람이 드러났을 뿐.
모산의 오행기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항마삼협이 낄낄거렸다. 낭인왕이 경로로 유인했고, 곁을 지날 때 점혈한 터.
그제야 함정에 빠진 걸 깨달은 군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너흰…….”
물었지만, 항마삼협과 어느샌가 다가온 낭인왕은 떠들기 바빴다.
“오행기, 이거 되게 재밌네.”
“오행기보다는 내가 유인을 잘한 거지.”
“하긴, 빌빌거리는 연기는 교운이보다 낫긴 하더라.”
“누가 빌빌거려. 이놈을 내가 쳐죽일까 봐 그런 거잖아!”
“아, 네네.”
“진짜잖아!”
군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
“너희는…… 날 노린 거냐?”
“너만 노렸겠냐!”
“설마…….”
“그래. 너희는 하나, 우리는 둘. 이제부터다.”
그것이 답이 되었다.
하나를 가리키는 건 점창 장문인의 딸.
우리는 둘의 의미는 형인 군보도 잡혔다는 것.
절망이 엄습할 때, 눈도 가려졌다.
아혈이 점혈되는 동시에 보자기가 머리를 덮쳐왔다.
**
“왜 이렇게 늦어요?”
항마들과 낭인왕이 도착하자, 기다리던 언교운이 반겼다.
“우리 제법 빨리 온 건데. 여긴 벌써 끝났나 보네?”
“끝낸 지 몇 년 됐어요.”
“흐흐, 하긴. 형님이 누구신데. 근데 형님은?”
낭인왕이 둘러보다가 물었다.
“두목은 이곳 장주와 이야기 중이에요. 어, 지금 나오시네요.”
두목의 뒤로 딸의 아버지가 하얗게 질린 채로 따라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부탁합니다.”
“네! 그, 그리하겠습니다.”
장주가 연신 머리를 숙였다.
우당탕 부서지는 소리가 난 후 뛰쳐나왔다가 상황 설명을 듣게 되었기에 그로선 날벼락 같은 밤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장원이 재앙을 면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과연 진실일까?’
장주의 머리에 떠오른 의문은 이내 사라졌다.
인사가 끝났다 싶은 순간,
서생과 그와 함께 온 이들이 어느샌가 까마득히 저 멀리 허공을 가르며 뒷모습이 작게 보이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귓가로 들려온 말.
- 따님은 곧 깨어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
그렇게 날이 밝았다.
두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천주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장성했고, 또 강하기도 했다.
아들이기도 하지만 화경의 고수이기에,
걱정은 솔직히 사치.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없던 두려움을 끌고 왔다.
사흘째가 되자, 비로소 심각해졌다.
금원장으로 신검을 찾으러 갔던 수하들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점도 한몫했다.
사흘째 밤.
지천주는 직접 움직였다.
먼저 호수 쪽에 갔다가 별 소득을 얻지 못한 그가 이동한 곳은 태음장. 아들이 최근 만나고 있다는 여인의 처소에 든 순간,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장이며 벽이 뚫려 있었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태음장 전체를 둘러봐도 개미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전각, 모든 처소, 모든 방을 훑다가 손을 덜덜 떨었다.
누군가를 발견해서는 아니었다.
발견한 건 하나의 서신.
벽에 붙어 있는 서신의 글귀가 문제였다.
- 너희는 하나. 우리는 둘. 곧 연락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