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성장하고 싶지 않아!
당했다.
점창에 당했다.
- 너희는 하나, 우리는 둘.
하나가 누구이고, 둘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점창이 방을 붙인 숨은 의도도 지천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점창은 지천이 비웃길 바랐을 것이다.
조롱하며 마음을 놓길 바랐을 것이다.
점창의 바람대로 지천이 하나를 붙잡고 있는 것에 통쾌해하고 있을 때, 점창은 둘을 빼앗았다.
이제 같아졌다.
아니다. 지천은 불리해졌다.
하나와 둘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그렇게 지천의 각주들이 상황을 분석하며 탄식을 토해냈다.
하지만 지천주의 생각은 달랐다.
“점창이 아니다.”
무겁게 흘러나온 지천주의 목소리.
둘러앉은 각주들의 얼굴에는 누구 할 것 없이 의문이 떠올랐다.
지천주는 탓하지 않았다.
각주들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대조해 분석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급작스러웠을 뿐이다.
지천주가 말을 이었다.
“점창이 본천을 인지했다 해도 군보와 군호의 동선까지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이 정보는 지천의 내부에서 흘러나갔다.”
각주들은 반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내부에서라니?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지천주의 말이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지천은 점창 장문인의 딸을 납치한 후 활동을 멈췄다.
유일한 활동이라면,
‘외부에 있는 건 금원장으로 향했던 삼당주와 그 휘하의…….’
생각은 거기까지.
다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 각주들의 눈은 커졌다.
“설마 삼당주 쪽에…….”
“그럼 무당파가……?”
생각은 그렇게 흘러갔다.
지천은 지귀객을 심문하며 많은 것을 알아냈던 터.
신검의 탈취와 지귀객의 보물, 그리고 금취객에 대한 모든 것. 금취객의 아들은 놀랍게도 무당파의 제자였다.
하필이면 무당의 고수가 금원장에 와 있었다고?
그렇다면 이해된다.
하지만 그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본시 삶은 공교롭지.”
지천주가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무당은 아닐 것이다. 다른 누구다.”
“……?”
“상대의 실행력이 너무도 빠르고 거침이 없다. 이는 도사들의 방식이 아니다. 적은 마치 우리와 같다.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약점을 파고드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비난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자이며, 사람의 심리를 뒤흔들고, 속임수에도 능한 자이다. 점창이 그의 뜻대로 움직여 방을 붙였으니 그자는 점창이 신뢰할 만한 큰 명성도 지닌 자일 테지.”
의문을 품었던 각주들은 그제야 이해했다.
그리하여 떠오른 결론은,
상대가 좋지 않다.
차라리 상대가 무당이라면 나았겠다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본천의 약점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고 있을 것이다.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
약점은 햇빛과 피.
반드시 그래야 한다.
빼앗긴 지 이미 사흘이 지났다.
사흘의 간격. 피를 채워줘야 할 시간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끔찍해진다.
지천주며 각주는 역설에 그렇게 빠졌다.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결코 밝혀져서는 안되는 자신들의 약점이지만 지금은 부디 적이 파악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치밀한 자이니 대비할 것입니다.”
누가 누굴 칭찬하는가.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기대할 수밖에 없다. 바랄 수밖에 없다.
“목광!”
지천주의 부름에 각주 중 하나가 눈을 빛냈다.
“네가 사신으로 점창에 간다.”
“존명!”
남겨진 서신에는 연락하겠다는 글귀가 남겨졌지만, 이미 사흘이 지났다.
이건 연락하라는 의미다.
너희는 하나, 우리는 둘이라는 글귀가 없었다면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굳이 문장을 남겼으니 서신을 발견한 즉시 점창으로 찾아오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제 해야 할 일은 교환.
이대 일의 교환.
또 다른 점창의 제자를 잡을 시간은 없다.
가능성도 희박하다.
상대는 치밀한 자. 이 부분에 대해서도 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규칙은 상대가 정했고, 지천은 이제 그 규칙대로 따라야만 하는 입장.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목광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목광은 보았다. 모든 각주가 보았다.
지천주의 손이 내내 떨리고 있는 걸 보았기에 망설일 수 없다.
지천주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손이 떨리고 있다.
*
점창은 환호성 속에 있었다.
소리는 없다. 침묵 속의 환호일 뿐.
아직 끝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 빛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하나둘 미소를 되찾아갔다.
방을 붙이러 떠날 때만 해도 울었는데, 돌아온 뒤에는 웃게 되었다. 사매가 살아있다. 사저가 이제 돌아온다. 이제 반격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외쳐댔다.
여러 이야기도 들었다. 지천이란 존재를 알게 되었고, 지천주의 두 아들을 사로잡은 이야기까지.
어떤 전술, 어떤 전략.
말은 언제나 쉽다.
하지만 그걸 누가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가 해냈다.
‘어쩌면 그가?’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긴 했어도 그야말로 실낱에 불과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희망의 빛줄기를 잡아와버렸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만, 그건 지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평 형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
“웃긴 누가 웃었다고…….”
“이상하네. 그럼 방금 미소 짓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지?”
“소천개, 넌 나이도 어린데 벌써부터 헛것이 보이나 보구나.”
“그런가? 그나저나 나 입이 심심해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말씀이야.”
“기다려. 금방 온다.”
“많이.”
“그래, 많이.”
진평은 거의 천공단의 하인으로 전락했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죽일 듯했다가, 두 번째는 고개를 떨궜고, 이제는 거의 몸종.
신분이 빠르게 수직하강했지만 좋기만 했다.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그래서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물을 갖다 바치고, 간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간식을 대령했다.
불만이 있을 리가.
첫 만남의 무례함의 대가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받은 것이 너무 컸다. 천공단은 절망에 빠진 점창을 그야말로 아무 대가 없이 끌어올려버린 것이다.
*
그 밤,
“늦는군.”
“곧 올 겁니다.”
점창 장문인 초광은 대공자와 함께 차를 나눴다.
장문인도 달라졌다.
이제 그는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시간은 더디고 기다림은 초조하지만, 이제 숨이 쉬어졌다.
“장문인, 여유를 가지십시오. 숨이 막혀오는 건 지천주입니다.”
“그럴테지.”
맞다. 지천은 점창과 같아졌다.
아니, 도리어 이 지점에선 막 절망에 접어든 이가 더 힘들 수 밖에 없다.
“대공자, 고맙네.”
“인사는…….”
“알고 있네. 이제 시작일 뿐이지. 하지만 그냥 나오는 걸 어떡하나.”
대공자가 미소 짓기에 초광도 따라 웃었다.
왜 젊은 나이인데 대공자의 미소가 푸근해보이고, 자신보다 더 어른 같아 보이는 건지 초광은 알 수 없다.
모든 계획을 들었을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다.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그러다 자칫 어긋나면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불안에 떨었다.
한데 대공자와 천공단은 어디 맡겨놓은 물건 가져오듯 지천의 두 아들을 보따리에 싸매고 들고 왔다.
턱, 하고 내려놓은 다음 천공단이 했던 말은,
“장문인, 가져왔습니다. 무겁네.”
그 말과, 보따리를 보고도 바로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한동안 말을 잃었었다.
그리고 이제 기다림.
향후 이어지는 계획들.
자신이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실행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대공자는 태연히 하려한다.
과연 될까?
이런 의문은 이제 없다.
그저 결과가 기대될 뿐.
천공단이 왜 대공자를 따르는지도 알게 되었다.
적으로 대공자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얼마나 두려운 자가 될 것인가. 그가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모두 잘되겠지. 잘될 것이다.’
중도에 기괴한 일이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
그 밤,
무흔신투가 움직였다.
점창의 지하 석실로 향했다.
점창파 내에 천공단은 무소불위의 권력.
대공자와 일행이 무엇을 하든, 어딜 가든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무흔신투가 지천의 두 아들이 갇혀 있는 각각의 지하석실로 드나드는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나?”
석실 벽에 기대어 있던 군보가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보는 추레한 노인이어서는 아니었다. 노인의 손에 들린 호리병에서 피냄새를 맡아서였다.
“흐흐, 눈만 감고 있었던 거네?”
“…….”
아혈이 점혈된 건 아니라 말을 할 수 있었지만, 군보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만 봤다.
“여기 나름 괜찮네. 지낼 만하지?”
창살도 없고, 경비도 없다.
몸이 묶여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점혈되어 옴싹달싹 못할 뿐.
점혈을 절대 풀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처음엔 비웃었는데,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속에 수십 개의 심지가 틀어박힌 것 같아서 어떤 수단으로도 풀어내지 못했다.
“자, 이거.”
“뭐냐?”
“내 피라네. 방금 짜냈어. 좀 아프드만.”
“…….”
“자, 입 벌려보게.”
군보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입을 벌렸다.
피는 오후에도 충분히 보충받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점창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젊은 서생이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
피가 당장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른다. 일단은 받아두자. 그렇게 피를 섭취했다.
무흔신투가 아무도 없는 주변을 다시 한번 훑었다.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에 군보가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무흔신투.”
“뭐?”
군보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별호였다. 금취객, 지귀객과 함께 천하 삼대 대도로 불리는 도둑놈이 왜 자신을 잡은 일당과 함께 있는 것인가.
무흔신투가 그 마음을 헤아렸다.
“나도 같아. 나도 잡혔어.”
“…….”
“누구에게? 그 서생에게? 그자는 누구냐?”
“천화서고 대공자.”
“아…….”
비로소 듣게 되면서 군보는 탄성을 토해냈다.
강호 후기지수들 중에 자신과 견줄 수 있는 자라면 그자가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망상이었다.
자신이 마주한 경악스런 고수가,
천화서고 대공자였다니.
그의 검, 그의 태연함.
그의 지풍에 몸이 날아가고, 다섯 줄기의 하얀 광채를 머금은 그의 손이 호신강기를 터무니없이 뚫고 들어오던 광경은 아직까지 생생했다.
“천공단주라고 불리지. 강호에 도는 소문보다 무서운 자라네.”
“그래서……?”
용건이 뭔가.
군보는 한줄기 기대를 품고 물었다.
무흔신투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난 천공단주보다 지천주가 더 대단하다고 보네.”
“우리 쪽에 붙겠다?”
“물론이네.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그다음은 뭐겠나?”
“숨을 고르겠지.”
“그다음은?”
“전면전.”
“그래, 그거네. 난 그때가 되면 점창이고, 천공단이고 쑥대밭이 된다고 보네.”
“당연히.”
“그때 난 빼주게. 나 좀 살려줘. 난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
“후후, 넌 우리에게 뭘 줄 수 있지?”
군보가 거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흔신투가 속삭였다.
“정보. 천공단주와 천공단에 대한 모든 것. 내가 반쯤은 천공단이니, 전면전이 발생할 때 내부에 첩자 하나 심어두었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나.”
“후후후, 이 늙은이가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군.”
“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 물어보게.”
“넌 어떻게 잡혔지?”
“아…… 그게. 그날……. 떠올리니까 갑자기 울화가 치미네만…….”
대화는 거의 한 시진.
무흔신투는 군보와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석실을 빠져나왔다.
처소로 돌아가려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자고 뭐해요?]
색관조였다.
무흔신투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하긴. 알면서 그러냐. 피곤해 죽겠다. 나 피도 뽑았잖아.”
[까르르르르르르. 주인님이 전해달래요.]
“응?”
[수고했다고요.]
“어…….”
[얼른 들어가 쉬어요.]
“야, 나 이러다 진짜 천공단 되는 것 아니냐?”
[까르르르르르르, 난 이미 천공단인 줄 알았는데.]
[그윽, 그윽]
새든, 두꺼비든.
위로가 되지 않는다.
무흔신투는 억울함 반, 시무룩함 반의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처음에는 포로였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천공단과도 친해져버렸고, 이제 임무도 받을 정도로 성장해버렸다.
‘난 성장하고 싶지 않아! 이미 늙었다고!’
외치고 싶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