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그대는 누구인가?
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셋.’
지천주는 땅속을 추격해오는 세 자루의 검을 감지했다.
하나가 앞서고, 둘이 뒤따르고 있다.
아직 거리가 있지만, 이 속도라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 문제.
천화서고 대공자가 추격할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추격의 경로는 예상 밖.
검이 지하로 자신의 이동 경로를 따라 추격해오다니.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쯤이면 놈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천하제일인의 신검을 다루고, 이기어검이 지하까지 유지되는 무학의 기이함은 지천의 무학 못지않다.
그렇다해도,
‘문제없다.’
땅속에 있는 한 토기(土氣)는 무궁히 보충된다. 내력의 고갈이란 있을 수 없다.
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이내 세 자루의 검이 근접해왔다.
지천주는 의식을 뒤쪽에 두고 ‘지경’을 구사했다.
그가 지나온 길로 흙이 뭉쳐지며 경화되었다.
쇠보다 단단하게 굳어져 길목을 차단했다.
카카카캉!
제일 앞서 있던 번이 먼저 파고들고, 친과 검령이 뒤따라 힘을 더했다.
하나같이 강철도 두부처럼 베어내는 예기를 지녔다. 거기에 주인의 기운이 더해져 있으니 뚫지 못할 건 없다.
그저 속도가 줄었을 뿐 그대로 돌파해나갔다.
하지만 막아서는 단단함이 계속 이어지는 탓에 추격의 속도는 현격히 줄었다.
‘우회.’
주인의 의식이 전해졌기에 번과 친, 검령이 흩어지며 방향을 달리했다. 굳이 막힌 길을 돌파할 필요는 없다. 번은 아래로, 친은 좌측, 검령은 위로 상승했다가 선회하면서 추격에 속도를 높였다.
그사이 지천주는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어느샌가 돌파지점은 번화가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수많은 가옥들과 아침을 걷는 이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목소리를 지천주는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많다.
여기서라면 사람들을 땅속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
토령(土靈)을 구사한다면 햇살 아래 몸을 드러내지 않고도 수십 명, 수백 명도 지하로 끌고 올 수 있다.
하지만 살심은 일지 않는다.
끌어내린 자들을 죽일 수도, 인질로 삼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을 보내고 왔다.
아들을 버리고 왔다.
지금은 그 직후.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누군가를 인질로 삼아야 한다면 첫 번째는 천화서고와 관계된 인물이어야 한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아끼는 자여야 한다.
물론 가장 최선은 천화서고 대공자를 죽이는 것이다.
아니, 아니다. 놈을 죽이면 안 된다. 죽음 직전에 멈춰야 한다. 그 죽음을 천화서고의 모두가 지켜볼 수 있게 해야 한다.
한순간,
‘……?’
주변 기운이 달라졌기에, 지천주는 갸웃.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지천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밤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운이 따른다.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오전인데, 오늘의 밤은 잠시 후면 찾아온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
지천주는 속도를 높였다.
*
‘흐음…….’
후공의 추적은 지상.
어느덧 번화가를 지나쳐 외곽을 질주하는 가운데 후공의 시선은 하늘로 향했다.
멀리 구름이 짙어지고 해무리가 드러났다.
나아가는 방향으로 바람에 실린 습도가 차츰 높아져 간다.
산 하나를 빠른 속도로 돌파하면서 낮게 나는 제비들도 볼 수 있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 여러 징후가 폭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 속도로 일각이면 빗속에 있게 되리라.
그때가 되면 해는 사라진다.
낮인데도 지천주에겐 밤과 같아진다.
그때가 되면 놈은 튀어나올까?
그럴 테지.
밤이 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테니.
‘환영하는 바다.’
반각이 지나며 지천주의 이동 방향은 다시 산.
멀리 나무와 풀을 찾아보기 힘든 붉은 토양의 산은 이미 폭우 속에 있었다. 천둥이 치고,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작렬했다.
저곳이다.
생사결의 장소.
대화를 나눈 건 아니나, 서로는 대화를 나눈 것처럼 격전지를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산에 도달하게 되면서 후공은 산을 올랐고, 지천주는 땅속 깊이 파고들었다.
땅속 깊이 들어가 기운을 충만히 채운 지천주가 다시금 산 위로 향했다. 올라오는 속도는 내려갈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콰앙!
땅을 뚫고 그 속도 그대로 솟구친 지천주가 잠시 허공에 체공하며 한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뒷짐을 진 채 태연히 마주해오는 눈길.
천화서고 대공자.
폭우가 쏟아지고 있지만, 거센 빗줄기는 몸에 닿지 않고 모두 튕겨나간다.
그건 지천주도 같았다.
빗방울은 몸을 두른 호신강기에 부딪혀 일부는 튕겨나가고, 일부는 수증기가 되어 피어났다.
지천주의 신형이 천천히 내려서 지면을 딛었다.
여전히 바라볼 뿐, 서로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
말은 필요없다.
서로의 사정과 목적은 명확하다.
오직 하나의 죽음.
상대의 죽음.
오늘 이 자리에서 서로가 원하는 건 그뿐.
결국 마주해야 할 상황.
밤이 일찍 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분노도 없다.
지천주의 동공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텅 비었고,
후공의 눈길은 무심하기 그지없어 오만해 보일 정도.
그 모습에,
‘겸허해지자.’
지천주는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저 오만한 눈길을 그대로 인정하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천화서고 대공자. 그의 외적인 모습은 그저 애송이. 그저 후기지수. 하지만 그것이 함정이 될 수 있다.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
복수를 위해선 다르게 보아야 한다.
다른 시선을 가져야 한다.
상대의 나이를 잊어야 하고, 상대의 외모도 잊어야 한다. 놈의 경지가 더 높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만한 표정을 짓는 이유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화경의 극인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
화산의 검선, 무당의 검존, 그리고…… 그리고…….
그런 이들,
현경에 도달한 이들.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현경에 이미 도달한 자와 마주하게 되었노라 생각해야 한다.
결과가 우습게도 간단히 끝날 수도 있지만,
비록 놈의 수준이 그와 같은 수준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지금은 높게 보아야 한다.
어쭙잖은 시험을 해선 안 된다.
그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카르르르르릉!
지면을 뚫고 나온 세 줄기 자줏빛 광채가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방향을 선회하며 쏘아져온다.
셋 중 둘은 분명 천하제일인의 신검.
그런데 왜 천화서고 대공자의 검마저 자줏빛 광채인가.
왜 모두 그의 것 같은가!
의문은 밀어두자.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적은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이라 할 만하다.
셋은 자줏빛 광채를 발하며 허공을 찢으며 날아들고, 하나는 지면을 박차고 질주해온다.
그렇기에 나 또한…….
지천주는 지면을 향해 우수를 내뻗었다.
‘토령(土靈).’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궁!
땅이 일어났다.
열두 개의 흙 기둥이 솟구쳤고, 이내 꿈틀꿈틀 뒤틀리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눈이 없고, 코가 없고, 입도 없지만 저절로 움직인다.
십이토령.
자신이 펼쳐낼 수 있는 가장 지고한 공능.
자신이 아닌 자신.
이제 자신도 하나가 아닌 열셋.
의식은 공유되고, 공유된 의식에 따라 토령들은 스스로 움직이기에 또 다른 지천주다.
쐐애애액!
세 줄기 자줏빛 검광이 토령들을 쓸어갔다.
단번에 토령 셋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뻗어나가려는 순간, 토령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여 번을 움켜쥐었다.
카르르릉!
번이 난폭한 기동으로 몸부림치며 빠져나가 손을 뻗은 토령의 몸을 휘감아버렸다.
퍼서석!
흙이 무너지듯 허물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토령은 심장이 없다. 토령은 죽지 않기에 이내 다시 뭉쳐져 기운을 쏟아냈다.
마치 절세고수가 장력을 내뿜는 것과 같았기에 번이 튕겨져나갔다.
그와 같은 상황은 친과 검령도 다를 것이 없었다.
형체도 없이 쓸어버린다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허물어뜨리나 다시 형상이 맺히며 반격해오니 끝이 없고, 정녕 목표에 다가갈 수 없다.
그것이 폭주를 불러왔다.
번과 친에게 있어서는 굴욕.
그리고 분노.
주인의 경지가 예전과 다르다.
과거 어느 때, 어느 시점과 비슷할 뿐.
그렇기에 분발해야 했다. 주인을 지켜야 한다. 주인을 다시 잃을 수 없다.
모든 걸,
그 무엇이든,
박살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번과 친이 폭주했고, 검령 또한 미쳐 날뛰었다.
죽지 않는다 해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쓰러뜨린다.
그렇게 십이토령과 세 줄기 자줏빛 검광이 뒤엉키는 사이, 후공은 지천주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깊게 가라앉아 있던 지천주의 안광이 한순간 무섭게 빛을 뿜어냈다.
‘와라! 기다렸던 바다!’
세 개의 검이 십이토령에 묶여 있는 지금이 기회. 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손아귀에서 묵빛이 피어났다.
묵빛은 휘돌며 점점 커져간다.
쏘아진 후엔 분열한다. 두 개로, 네 개로, 여덟 개로, 최후엔 열여섯 개로 폭사해 들어간다.
검을 운용할 수 없는 네놈이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이내 전력을 기울여 장력을 내뻗었다.
‘죽어라!’
파아아앙!
묵빛의 구체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이제 끝이다.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지천주는 확신했다.
짓쳐드는 놈의 속도가 그만큼 빨랐고, 자신의 장력은 그보다 더 빠르다. 방향을 전환하는 건 무리.
하지만 아니다.
상대는 한낱 서생이 아니다.
천하제일인.
경험이 다르고, 상대했던 이들이 다르다.
비록 십이성의 경지라 아니라 해도,
‘환명.’
파파파파파파!
나아감을 멈출 필요는 없다.
묵빛의 구체가 분열하여 사방으로 쏘아진다 해도 소용없다.
떠오른 건 서른두 개의 투명한 환명.
분열한 열여섯 개의 묵빛의 구체는 그대로 늪에 빠져들었다.
신법은 기묘하게 틀어지며 이어져 간다.
그다음은,
스윽!
오른손에 떠오른 건 능오침.
다섯 줄기의 햐얀 빛줄기.
그대로 발출.
지천주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확장된 동공에 다섯 빛줄기가 가득 들어찼다.
‘허억!’
절체절명의 순간, 지천주가 손을 휘둘렀다.
흙 기둥이 솟구치며 방패가 되었다.
하지만 의미 없다.
능오침은 호신강기를 뚫는다.
그깟 흙 기둥.
제아무리 경화되었다 해도 마치 나무토막이나 다름없기에, 그대로 지천주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양쪽 어깨와 가슴, 복부와 목을 스치듯 뚫고 나아간 뒤, 능오침은 소멸.
지천주가 허물어지자, 십이토령도 함께 허물어졌다.
카르르르릉!
상대를 잃은 번과 친, 검령이 선회하며 피를 울컥대는 지천주의 주위를 맴돌았다.
“커헉, 컥!”
주저앉은 지천주가 피가 쏟아지는 목을 움켜쥔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퍼붓는 빗줄기가 온몸을 적셔온다.
이제 빗줄기는 그의 몸에 닿는다.
비를 맞아본 적이 얼마 만인가.
피를 흘려본 것이 얼마 만인가.
피 흘림은 언제나 타인의 몫이었는데,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언제까지나 나의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맞이했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어야 했나.
더 많은 피를 마셨어야 했나.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아니, 부질없다.
결국 이런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파의 절세 고수, 그 누구의 손길이든.
언젠가는…….
천하제일인이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했기에, 그가 없는 강호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지천주는 시선을 내려 대공자를 바라봤다.
원망보다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그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그대는…… 누구인가?”
들려줄 가치가 없기에,
후공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크아아아아아앙!
세 줄기 자줏빛 광채가 지천주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광경은 이제 막 도착한 점창의 장문인과 장로들의 눈에 들어왔다.
“……!”
“……!”
“……!”
너무 놀란 나머지 부를 수조차 없어 그저 바라볼 뿐.
그리고 그들도 지천주와 같아졌다.
똑같이 떠올랐다.
‘대공자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