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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228화 (228/460)

228화. 착각이었다.

- 장문인,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겁니까?

점창의 장로들은 넋이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천주는 화경의 극에 이른 고수.

거기에 지금은 폭우 속.

밤과 같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지천주가 세 줄기 자줏빛에 산산조각 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으면 넋이 나갈 수밖에 없다.

지천의 해괴한 공능까지 떠올려보면 이런 식의 결론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일대일의 승부였기에,

당연히 힘겨운 승부여야 했거늘…….

화경의 극에 이른 절세고수의 목숨을 취한 대가로 대공자도 몸 어디 한 곳은 내주어야 마땅하거늘…….

한데 대공자는 어떤 타격도 입지 않은 듯하니 점창은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도대체 대공자가 어떤 경지에 이른 건지, 어떻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 건지 의문을 떨치기 어려웠다.

크아아아아앙!

지천주를 조각낸 검들이 난폭한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솟구치며 유영한다.

점창은 저것들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공자가 차분한데, 왜 검들이 흥분해 날뛰고 있는 것인가.

운용되지 않고 따로 움직인다고?

그게 가능한가?

말이 안 되지만 왜 검들이 살아있는 것 같은가.

왜 흥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대공자가 몸을 돌려 신형을 날리니 자줏빛 광채가 엄청난 속도로 폭사하며 쫓아와 대공자에게 스며들었다.

하나는 검집으로, 하나는 소맷자락 안으로, 또 다른 하나는 대공자의 우수에 휘감겼다.

그리고 들려온 말,

“돌아가시죠.”

“그, 그러세.”

장문인 초광이 더듬거렸다.

원래도 멍해 있던 초광은 더 멍해져버렸다.

대공자가 어떤 경지냐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보다,

대공자가 보이는 태연한 태도가 더 충격적이었다.

‘감흥이…… 보이지 않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왜 승리를 쟁취한 자의 흥분이 없는 것인가.

무려 화경의 극에 이른 자를 조각내버렸음에도 대공자의 담담한 태도는 마치 한 끼 식사를 마친 후 돌아가자는 식.

심지어 그런 태도가 너무 자연스럽다.

몇 번이고 겪고 이뤄내본 사람처럼 보였기에, 장문인은 잠시 잠깐 강호의 대선배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자네 대체…… 누구인가?’

천화서고의 서생이란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이 경이로워 그렇게 되뇌게 된다.

그렇기에 대공자의 뒤를 따르는 점창은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웠다.

- 장문인, 대공자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겁니까?

- 언제부터 검을 들어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오?

- 검이 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단 말입니까?

바삐 오가는 전음은 모두 의문뿐.

점창의 누구도 천하제일인과 함께 달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장문인, 잠시 만날 사람이 있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지금 말인가?”

장문인이 갸웃했다.

이제 번화가를 지나는 중.

지천의 본거지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일다경 내에 도착할 텐데, 갑자기 누굴 만난다는 것일까?

“대공자, 운남에 친분을 나눈 이가 있었던 겐가?”

“네, 강호에서 사귄 친구를 보려 합니다.”

“자네의 친구라니 궁금하군. 함께 가세.”

이 와중에 친구를? 이라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곧바로 장문인은 의문을 떨쳐냈다. 대공자의 행사에 의미 없는 것이 있을 리가. 이젠 그저 믿게 된다.

*

“루주님, 루주님!”

“뭔데 난리냐! 별일 아니면 죽여버릴 거야!”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던 노파가 신경질을 부렸다.

“난리가 났습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왔어요!”

“뭐? 누, 누가 왔다고? 앗 뜨거, 시발!”

노파가 너무 놀란 나머지 허둥대다 뜨거운 물을 쏟았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전자를 바닥에 팽개치고 달려나갔다.

“진짜냐? 장난친 거면 넌 오늘 내가 아주 뼈를 갈아버릴…… 어?”

노파가 욕을 멈추고 멍해졌다.

“뭐, 뭐야? 진짜였어?”

눈앞에 보이는 젊은 서생.

노파는 한눈에 알아봤다.

곁에 점창의 장문인과 장로들도 알아봤지만 그녀에겐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우와아아아! 대, 대공자! 어째 그림보다 잘생겼구마아아안!”

흥분한 노파가 두 팔을 벌리고 끌어안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처억!

대공자가 내뻗은 손에 가로막혔다.

이마에 손이 닿은 터라 노파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팔만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그 자리에서 방방 뛰다가 뜰을 달리기 시작했다.

“대공자가 왔어! 시발놈들아, 대공자가 내게 왔다고! 이거 꿈이냐, 생시냐! 생시겠지? 내가 어제 돼지꿈을 꿨으니까. 날개 달린 돼지였어, 꾸에에에에엑! 하면서 그 돼지가 막 다 죽이고 다니는 거야. 무쌍이더라고! 그래서 우와, 시발! 오늘 운수 대박 터지겠다 싶었는데 진짜 대박이 나버렸네. 귀주에 있는 대주와의 승부에서 내가 이겨버린 거 아니냐고! 그 새끼가 호언장담했거든. 귀주에 난화서원이 있으니까 대공자가 귀주에 먼저 올 거라고 말이지. 근데 봐! 나한테 왔잖아. 꼴좋다, 개새끼! 하하하하하하!”

그 광경에 점창은 퀭.

노파의 상태가 미친년 같아서만은 아니었다.

오는 길에 이미 대공자로부터 하오문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 하오문이 대공자의 친구라고? 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이런 폭발적인 반응을 보일 줄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크흠…….”

하지만 후공은 이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반가워하는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해야지, 끝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꿈의 내용도 영 마뜩지가 않았다. 날개 달린 돼지라니, 꼭 꿈의 예지대로 자신이 온 것 같은 기분.

“루주, 진정하지 않으면 그냥 갑니다.”

날뛰던 노파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쪼르르 달려왔다.

“대공자, 내가 잠시 돌았네. 뭐가 필요한가? 뭘 도와주면 되나? 어떤 새끼들이야! 내가 아주 반 죽여놓겠네!”

그 말에는 후공도 그만 피식하고 말았다.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좋아, 오늘 일 안 해! 내가 오백 명까지는 모을 수 있네! 다 때려잡자고!”

“후후, 든든하고 듣기 좋습니다.”

어째서 하오문은 통으로 천공단 같은 건지.

어느 지역을 가도 유쾌하기 짝이 없다.

이어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공은 대강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부분부분 많은 이야기가 빠졌고, 점창 장문인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도 생략되었다.

하지만 지천에 대해서는 선명히 드러내주었기에, 씩씩했던 루주의 혈색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샛노랗게 변해갔다.

제아무리 하오문이라 해도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일.

지천의 행사는 땅속으로 은밀히 오가며 이루어졌고, 또 지천의 경지가 높았던 터라 하오문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던 것.

“지난 반년 실종자들이 많았던 이유가…….”

“네, 지천의 소행입니다.”

“하아,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어떤 상놈의 새끼들인가 했지 뭔가.”

루주는 지천의 악행에 경악하고, 그 지천이 모두 마무리된 것에 놀랐으며, 도울 수 있게 된 것에는 기뻐했다.

“사람을 모아 유림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물론이네! 감금된 백여 명의 사람들은 온전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네.”

루주는 장담했고,

대공자가 하오문을 찾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면서, 점창은 대공자의 세심함에 다시금 놀랐다.

**

“형아아아아아아!”

“형님!”

“두목, 엄청 빨라!”

“지천주, 저세상 가버린 거잖아!”

“내가 말했잖아. 걱정 같은 건 쓸데없다고!”

“걱정한 사람 아무도 없었거든요!”

유림원으로 무사귀환하자, 천공단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다들 걱정 안 한다면서도 걱정을 많이 했던 터라 목소리가 컸다. 몇몇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감격에 젖은 건 천공단만은 아니었다.

지하에 감금되었던, 지천의 비상식량으로 잡혀 온 백여 명도 마찬가지였다. 천공단이란 것도 들었고, 천공단주가 돌아온 건 지천주가 죽음을 맞았다는 의미이니 비로소 안도하고 감사한 마음이 되었다.

“두목, 여기.”

남궁연이 공손히 번의 검집을 건넸다.

후공은 미소 지으며 검집을 받았다. 쥐고 있던 번을 놓자, 번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검집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번과 친이 돌아왔고, 쾌만 남았다.

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뒷정리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보였다.

지하에서 끌어올린 듯한 보물이 산더미였고, 백여 명의 남녀노소들은 물과 음식을 취하고 있었다. 또 전각에 있던 시체가 보이지 않으니 거의 다 매장한 듯 보였다.

후공은 이열을 바라보며 물었다.

“심문해보았습니까?”

“네, 형님. 신검의 행방은 흑전이라는 놈들 손에 있다고 자백받았습니다. 흑전은 지천과는 동맹관계이고, 위치는 사천성 남단 숭양입니다.”

일차로 군보를 심문했고, 지하에 목숨이 붙어있던 놈을 고문해 교차검증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자백 내용이 상세한 것이,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없을 정도였다.

‘천공단도 제법 성장했구나.’

뒤처리며 심문 과정을 듣고 있자니 후공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다들 근본이 좋긴 하다. 과격하고 제멋대로인 점이 문제였을 뿐.

“지귀객을 보죠.”

이내 무산쌍웅이 지귀객을 끌고 왔다.

꿇어앉히고는 윽박질렀다.

“도둑놈아, 인사드려라! 천공단주시다!”

지귀객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혈색이 하얗게 질려 있고, 눈빛에 힘이 없는 것이 극심한 고문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다.

제대로 꿇지도 못해 몸이 무너진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후공은 다가가 지그시 내려다봤다.

지귀객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려던 순간, 날아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귀객은 비명을 내지르며 삼십여 장을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크으으윽…….”

꿈틀대는 지귀객의 모습에 천공단이 낄낄거렸다.

하지만 무흔신투만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전에 금취객 강유가 당한 그 미칠 듯한 험한 고문이 생각나, 벌써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또 땅을 파야 하나 고민할 때, 지귀객은 다시 무산쌍웅의 손에 끌려왔다.

“죄, 죄송…….”

퍼억!

“크아아아아악!”

다시 날아갔다가 또 돌아왔다.

그렇게 세 번.

그 이후 피를 울컥대던 지귀객은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이 올라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이…… 진짜다.’

직감했다.

얼마나 큰 고통이 찾아올 것인가.

무흔신투도 알 수 있었다.

그거다. 그거. 구겨져버린다.

이건 정녕 쳐다보는 것조차 무섭다.

순간 백회혈이 뜨거워졌기에 지귀객이 몸서리쳤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지귀객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웅혼한 기운이 전신경맥을 어루만지듯 휘돌았다.

내상을 입은 곳이 차츰 편안해지고 기운이 급격히 회복되어 가니 지귀객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왜……?’

천화서고 대공자는 신검의 회수자.

무림맹을 대리하고 있는 자라고 들었다.

한데 왜 자신을 치유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의문은 무흔신투도 마찬가지였다.

발작은 금방인데 발작이 없고, 도리어 지귀객의 혈색이 돌아오고 눈동자에 점점 힘이 실리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이윽고 손이 거둬졌다.

지귀객이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볼 때, 차가운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지귀객.”

“……네.”

“너도 함께 간다. 최대한 몸을 빨리 회복해라. 그때가 되면 진정한 고통이 뭔지 보여주마.”

“…….”

이해한 지귀객이 눈물을 글썽였다.

‘으으으으으…….’

자신의 착각이었다.

고쳐준 것이 아니라, 멀쩡해야만 제대로 된 고통을 안겨줄 수 있어서였다.

누굴 만난 것인가.

지천주를 쓸어버린 이.

지천을 멸살한 이.

점창을 구한 이.

결국 지귀객은 주륵 눈물을 쏟아냈다.

‘끌려다니면서 당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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