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선물.
누가 흑전의 초대장을 거론하나 했더니,
‘소소, 너였구나.’
후공의 미소는 더없이 짙어졌다.
은앙개가 찾았다면서 알려올 때만 해도 나이가 어려 보인다는 말에 미심쩍었는데, 얼굴을 확인하면서는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인 터.
은소소.
할아버지가 사천의 대부호인 태왕전장의 장주이고, 외할아버지가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명이다.
당명은 강호를 종횡할 당시 오랜 시간 함께했고, 성격이 유쾌한 데다 여러 특기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땅을 잘 판다는 것이었다.
쥐잡듯이 누군가를 잡고 있으면,
당명은 파묻으려고 땅부터 파기 시작했다.
그런 당명이기에 무림맹을 제집 드나들듯이 한 건 당연했고, 그럴 때마다 당명 곁에는 소소가 있었다.
친손주들보다 외손녀를 아낀 건 소소가 예쁘고 귀여워서만은 아니었다.
가히 최고의 재능.
소소의 근골이 워낙 뛰어나 당명은 아끼면서도 늘 아쉬워했다.
‘후공, 너무 아쉽습니다.’
‘아쉬울 게 뭐냐. 예쁘면 그만이지.’
‘은소소보단 당소소가 훨씬 낫지 않습니까.’
왜 외가 쪽에서 이런 재능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고 탄식하다가도, 소소를 보면 들었다 놨다 하며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게 당명이 아낀 탓에,
출가외인에겐 비전을 전수하지 않는다는 당가의 오랜 전통과 규범에도 소소는 예외가 되었다.
물론 거기엔 천하제일인의 충고가 있었다.
‘쓸데없는 규칙과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해라.’
그 결과 소소는 대부호의 손녀인 동시에 당가의 외손녀라는 규격 외 상태에서 당가의 비전을 전수받게 되었다.
소소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년도 되지 않아, 모습은 그대로. 아니, 그때보다 더 성숙해져 더욱 빛나는 외모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자리의 당초는…….
‘흐음…….’
보긴 봤는데 가물가물.
당명이 손주들 중에 심성은 좋은데 모자란 놈이 하나 있다고 했는데 그놈 같았다.
그 와중 은소소와 당초는 여전히 멍한 상태.
처음 보는 사내가 거침없이 합석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천화서고 대공자라고 말해오니 이게 뭔가 싶었다.
- 누님, 제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요? 장난이겠죠?
당초가 물었지만 답은 없다.
대신,
“아가씨!”
“공자님!”
뒤늦게 두 검수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각각 은소소와 당초의 호위였다.
같은 층에 있었으면서도 둘은 대응이 늦은 터라 스스로에게 화가 난 상태.
상대가 걸어가는 건 봤지만, 의자를 빼고 앉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 해 잠시 넋을 놨다가 다급히 달려온 터였다.
두 검수가 끌어내려 할 때, 은소소가 제지했다.
“괜찮으니 너흰 자리로 돌아가.”
“하지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착 가라앉은 은소소의 눈빛이 책망해온 터라, 두 호위는 더 주장하지 못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은소소의 시선은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에게로 향했다.
상대는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여유로운 미소까지.
정말 천화서고 대공자라고?
그녀의 머리로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그의 명성이 떠올랐다.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응시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천화서고 대공자인지 아닌지는 알 길 없으나 자신감 하나만큼은 인정해야겠군요.”
“네, 남자는 자신감이니까요.”
“푸흡!”
대화에 귀 기울이며 술을 입에 가져가던 당초가 뿜어버렸다. 은소소가 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보자, 당초가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은 재밌는 사람이군요.”
“네, 그런 말 많이 듣는 편입니다.”
“으읍…….”
당초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딱히 웃긴 말은 아닌데 그냥 웃음이 터져버렸다. 무엇보다 눈부신 미모를 지닌 사촌 누님 앞에서 이렇게 편하게 말하는 사람을 당초는 처음 보았다.
은소소가 꾸지람을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의 일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는데, 사촌 동생은 강호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기 온 목적이 뭐죠? 당신이 천화서고 대공자가 맞다면 수작을 부리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만약 그를 사칭해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면 무사히 돌아가긴 힘들 거에요.”
“지나는 길에 우연히 들었습니다.”
“……?”
“흑전의 경매, 흑전의 초대장. 가능하다면 제가 소저께 초대장을 사고 싶습니다.”
은소소에겐 뜻밖의 말이었기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당초도 의외의 상황에 눈을 또르르 굴리며 후루루룩, 소리 내면서 술을 마셨다.
“나와 내 아우가 누군지는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하지만 흑전의 초대장을 받았으니 필시 대단한 가문의 자제분들일 테죠.”
“두렵지 않나 보군요.”
“겁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이 말에는 분위기가 묘해 당초도 웃지 못했다. 하지만 은소소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양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빼앗을 건가요?”
“그냥 갑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은소소가 터져버렸다.
사촌 누님이 웃음을 터뜨렸기에 당초도 조금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한참이나 웃었다.
나름 멋지게 등장한 주제에 그냥 간다는 말을 할 때는 뚱한 표정으로 말하니, 그 간극이 너무 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진정한 은소소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흥정이든 대화든 시작해볼 순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사이에는 선결해야 할 과제가 있어요.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걸 어떻게 믿느냐.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짝짝!
후공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주루 안으로 남궁연이 들어서 곁에 섰다.
은소소와 당명이 이건 또 뭔가 하고 바라볼 때, 남궁연이 예를 갖췄다.
“남궁세가의 장자 남궁연입니다. 현재 두목 밑에서 천공단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은소소가 실소를 머금었다.
“당신이 남궁세가의 대공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의 소개가 증명이 될 수도 없고요.”
그러면서 은소소가 술병을 집어들어 잔에 술을 따랐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손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맺히며 술에 녹아들었다.
그녀가 술잔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이 술을 마실 자신이 있나요?”
그녀가 손끝으로 떨어뜨린 건 독.
교묘한 손놀림 탓에 눈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술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모두가 인지하는 상황.
이건 시험이었다.
그대는 어떤 대처를 보여줄 것인가?
명성대로 천화서고 대공자라면 이 정도는 거뜬히 해소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내포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후공은 독의 종류까지 간파했다.
학정홍.
체내에 들어간 순간 신경이 마비되고, 장기의 기능이 즉시 멈춘다.
대수로울 것이 없었지만 이미 기경팔맥을 맴도는 삼악은 그럼에도 정화시키려 발작을 일으켰다. 삼악에겐 그저 음식.
“소저,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은소소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마셔보면 알게 되겠죠. 왜 겁이 나나요?”
“네, 조금 무섭…….”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술잔을 집어들고 마셨다.
탁!
술잔을 내려놓자, 은소소와 당초의 놀란 시선이 남궁연에게로 향했다.
“무, 무슨?”
정작 마셔야 할 사람은 가만히 있고, 난데없이 남궁연이 주저 없이 술잔을 비워버린 것이다.
당초가 멍하니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남궁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대공자가 바로 역정을 냈다.
“아니, 남궁 형! 내가 마시려고 한 건데 그걸 마시면 어떡합니까. 내가 두목인데 미인 앞이라고 혼자 잘난 척하려고 독을 그런 식으로 멋지게 마셔버리는 겁니까!”
“죄, 죄송합니다.”
남궁연이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전음으로 마시라는 두목의 말을 듣고 마신 것뿐이었다.
은소소는 안심하는 한편으로 대강 상황을 이해했다.
상대가 말해온다.
내가 부리는 수하가 이 정도다.
나는 어떻겠느냐? 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제법이군요. 그럼 암기는 어떨까요? 이 간격 안에서는 두 분이 제 암기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당신은 심장, 그쪽은 눈을 잃게 될 거에요.”
차례차례 한 사람씩 시선을 던지며 경고한 은소소가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천화서고 대공자라면, 그의 명성대로라면 이 거리에서도 암기를 파훼할 수 있겠죠. 어떤가요? 자칭 천화서고 대공자께선 도전해보시겠습니까?”
“소저, 왜 자꾸 무서운 말씀만 하십니까?”
“흥, 자신 없으면 이만 일어나세요. 듣기로 천화서고 대공자는 북교산에서 날았다고 하던데, 고작 암기일까요?”
“아하!”
“아하?”
은소소가 갸웃했다.
우스워?
내가?
‘아하라고? 까불지 마라!’
그 생각이 떠오른 동시에 소매를 휘둘렀다.
빛살처럼 발출된 암기는 셋,
거리는 코 앞이다.
둘은 전면으로, 하나는 측면으로.
암천비(暗穿飛).
당가의 비전 암기술이다.
피할 수 있을 리가.
손속에 사정을 두긴 했다.
전면으로 날아가는 암기는 어깨와 팔.
측면으로 날린 하나의 암기는 옆구리를 파고든다.
하지만,
‘귀엽구나.’
후공에겐 귀여울 뿐.
파앙!
남궁연이 움찔해 벗어나려 할 때는 이미 그 앞에 하나의 환명이 떠올랐다. 옆구리 앞쪽으로 몽글몽글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가운데, 작은 은빛 바늘이 허공에 정지한 채 바들거렸다.
‘두목…….’
어느샌가 두목이 자신의 방패가 된 것에 놀라 바라보니, 두목 앞에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목의 어깨와 팔 앞으로 두 개의 은빛 바늘이 허공에 틀어박혀 있었다.
놀란 것이 비단 남궁연뿐일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당초는 눈이 왕방울만 해졌고, 은소소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더듬거렸다.
“왜…… 어, 어떻게……?”
후공이 손을 내밀어 허공에 머물러 있는 암기를 하나씩 떼어냈다. 그렇게 세 개의 암기를 회수해 탁자 위에 내려놓은 다음, 빙긋 미소 지었다.
“소저의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귀한 물건 같기에 다시 돌려드립니다.”
“어, 어떻게 한 거죠?”
“그보다…… 이제 제가 선물을 드릴 차례 같습니다만.”
그 말에 당초가 기겁해 사색이 되었다.
암기를 선물이라고 칭했으니,
선물은 의미는 명확하다.
반격.
‘주, 죽어…….’
되돌려 받는다.
누굴 건드린 건가.
이 정도 고수일 줄은 몰랐기에, 이제 받을 공격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은소소도 마찬가지.
‘내, 내가 섣불렀나.’
천화서고 대공자여도 문제고, 아니어도 문제였다.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해도 이런 자가 분노한다면…….
‘선물…….’
소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그 잠깐 사이에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져버린 터.
‘어, 어디?’
“여기.”
돌아본 순간, 점혈되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경악에 차 바라볼 때, 허리가 감겼다.
그리고, 날았다.
창밖으로 나아가 방향을 틀어 하늘로.
하나의 환명, 두 개의 환명, 세 번째 환명을 딛고, 밤하늘 높이 솟구쳐 일곱 번째의 환명을 디뎠을 때는 어느덧 구름 위.
“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던 은소소가 눈을 떴을 때, 주변 풍광은 달라져 있었고,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발밑에 구름이 흐른다.
달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든 구름이 넘실거렸다.
그제야 그녀는 이해했다.
북교산에서 날았다는 이야기에 왜 ‘아하’라고 했는지,
그리고,
‘선물이란 게…….’
“당신…… 천화서고 대공자로군요.”
후공이 미소 지었다.
“소저, 천화서고가 선물하는 방식이 마음에 드십니까. 선물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림맹을 방문하던 어린 꼬마에게 멋진 풍경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