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남긴 건 너만이 아니다.
신투와 색관조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보낸 다음,
후공은 천천히 숲을 거닐었다.
달빛이 부서져내리는 숲은 운치가 넘치고 고요했다.
작게 우는 곤충들의 소리.
귀뚜라미, 여치들.
새들은 잠들었다.
잠든 새들의 둥지를 살폈다. 새들의 숨결을 따라 숫자를 파악하니 반경 오십여 장 내 새들은 서른일곱.
‘새들을 깨우자.’
어린 새들도 있으니 놀라지 않게.
천향사주를 운용, 향을 발산했다.
천향의 공법이 삼주에서 사주가 되면서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점혈하듯 허공을 찍지 않아도 된다.
향의 발산이 그렇다는 건, 누군가를 추적하는 목적으로 향을 남길 때 손을 맞잡는 과정이 생략되어도 된다는 의미.
삼주에서는 손을 맞잡기 위해 웃음 짓고 대화하는 기초작업이 필요했으니, 그 과정이 사라지는 건 대단한 편의다. 애초에 상대가 의아해할 여지를 남기지 않게 된다.
끼이이! 끼이이!
향은 은은하면서도 매혹적인 꽃향기.
향이 퍼져나가면서 새들이 하나둘 소리내기 시작했다.
이 향은 뭐야?
처음 맡아 봐. 너무 좋아.
그런 새들의 감상이 끼이이, 하는 울음과 날갯짓으로 나타났다.
이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 새들이 후공 주변을 날기 시작했다. 곤충들의 울음소리도 커졌다.
새들은 점점 많아졌다.
부근에 있던 새들만이 아니라 향이 바람을 타고 흐른 탓에 그쪽에서도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칠십여 마리.
향선이 곤충들과도 연결되었지만, 후공은 곤충들과의 연결은 바로 끊어내고 새들과만 연결을 유지했다.
새들이 움직일 때마다 향의 선도 따라 움직인다. 그 선들은 누구도 볼 수 없지만 후공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새들이 이리저리 나는 탓에 수많은 선들이 교차하며 겹쳐졌다가 분리되었다가 여러 갈래로 꼬이기도 했지만, 후공은 그 혼잡함 속에서도 명확히 연계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선을 하나씩 정리했다.
선이 지워져가고, 남은 건 다섯.
그 상태에서 신형을 날려 칠백여 장 너머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다섯 가닥의 향선은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된다.’
결과가 흡족했기에 후공의 얼굴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밤, 새들을 놀라지 않게 깨우려 꽃향기를 발산했지만 적을 맞이함에는 무향이 운용된다.
추적은 용이해졌고,
암살도 한결 쉬워졌다.
암살기는 이미 색관조를 통해 시험해본 터.
능오침은 향선을 따라 이동하고 적을 원거리 타격한다.
잠든 밤, 혹은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 적은 죽음에 이른다.
천향이 사주에서 오주로 나아간다면?
그땐 친이 향선을 타고 날아가 타격할 수 있을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후공은 생각했다.
신형을 날려 객잔으로 돌아갔다.
술자리는 이미 파한 후였다.
시간은 한참이나 지난 터. 공청석유를 받아들인 무흔신투의 호법을 선 것만 해도 세 시진가량(약 여섯 시간).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려 하니 당연했다.
어느 곳에 숙박을 했는지는 찾을 필요가 없었다.
술을 마셨던 허름한 객잔 앞에 살벌하게 생긴 두 놈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오셨습니까!”
무산쌍웅이었다.
후공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험악한 놈들.
못생긴 놈들.
그리고 의외로 다정한 놈들.
*
그로부터 이틀째 저녁.
일행의 이동 속도는 여유로웠다.
명첩에 적힌 날자는 아직 닷새가 남았고, 목적지인 서창의 목양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으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누구 할 것 없이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당초만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당초는 점점 더 신경이 쓰여 지금은 견디기 힘든 수준.
그런 초조함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기에 은소소가 전음을 발했다.
- 초야, 왜 그러니?
- 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속이 불편한 거니?
- 그게 아니고…….
- 답답하구나. 그냥 말해보렴.
- 다름이 아니라…….
- 그래. 뭐든 이 누님이 해결해줄 테니 걱정 말고.
- 천화서고 형님이…… 불편합니다.
- 응?
은소소가 미간을 찡그리며 갸웃하자, 당초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 아, 그러니까 천화서고 형님이 싫다는 것이 아니고, 검을 들고 다니셔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허리에 차고 있는데, 하나는 계속 들고 다니시니까 이 아우는 점점 미칠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은소소가 전음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 조금 쉬었다 가는 건 어떤가요?”
“그럴까요?”
현재는 산야의 중턱쯤.
이 산을 넘고서 하룻밤 묵으려 한 터.
애초에 급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다시 은소소와 당초의 전음이 이어졌다.
- 넌 또 이상한데 꽂혔구나. 거지들은 안 불편하니?
은소소가 싱글벙글 놀리듯 물었다.
사촌 동생은 맹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한번 꽂히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는 다른 걸 보지 못하는 성향이었다. 그런 동생이 하다하다 검을 들고 다닌 걸로 불편해할 줄은 상상치도 못한 은소소였다.
- 개방은 원래 그러니까요. 하지만 천화서고 형님은 하나는 허리에 차고 있으면서, 하나는 들고 있으니 이 아우는 너무 이상합니다. 마치 개방이 몸 절반은 깨끗하고 몸 절반은 더러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 하하하, 나도 네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신경 쓰이긴 하는구나.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니?
- 제가 가지고 있는 천잠사 중 한 가닥을 주고 싶습니다. 한데 천화서고 형님이 싫다고 할 수도 있고, 주제 넘은 것 같기도 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 네가 직접 말을 건네 봐. 아마 대공자는 좋아할 거야.
- 그럴까요?
- 물론이지.
당초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었다.
이게 뭐라고 진지한 것인지 은소소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당초가 일어나 대공자 앞에 섰다.
“저기…… 천화서고 형님.”
“무슨 일인가요?”
당초가 숨을 또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저기 제가…… 천잠사 한 줄을 드려도 될까요?”
“응?”
“어, 그게…… 그러니까요. 다름이 아니라 검을 들고 다니시는 것이 불편해보여 제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후공은 미소.
“불편해보이던가요?”
“네, 아무래도 들고 다니시니까요.”
“하하, 그렇기도 하군요.”
사실 불편한 건 없었다.
번은 검연으로 이어져 들고 다니긴 해도 든다고 볼 수 없었다. 가끔 손에서 놓아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붙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하하, 당초 형아!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
“이야아~~ 우리 당초 섬세한 것 좀 봐! 어른이네. 어른.”
“난 생각지도 못했네!”
“아니 근데 천잠사를 가지고 다녀? 독문 병기인 건가?”
“형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겠는데요?”
천공단이 한마디씩 쏟아냈다.
후공도 물론 성의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웃음이 날 뿐.
쾌를 찾으면 번과 함께 등에 매려고도 했던 터라 잘된 일이기도 했다.
“당 형, 제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호의를 기쁘게 받는 겁니다. 하지만 천잠사가 당 형의 병기라면 받기 곤란합니다. 제가 불편해보이지 않도록 다른 방법을 취하도록 하죠.”
당초의 얼굴이 밝아졌다.
“천화서고 형님, 제 병기는 맞는데 드리는 건 여분입니다.”
“그래요?”
“네!”
그러면서 당초가 소매에서 반장 길이의 천잠사를 뽑아냈다. 은빛을 입혀 한 번씩 달빛에 반짝였다.
건네 받은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하기 힘든 천잠사 중에서도 가히 특등품이었다.
바로 천잠사로 번을 휘감은 다음, 등 뒤에 걸쳤다.
이어 허공섭물의 묘를 발휘해 천잠사를 움직였다.
스윽, 스윽, 슥!
실이 살아움직이며 옷을 뚫고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면서 제멋대로 매듭을 짓고 옷을 휘감아 돌며 체결되어 갔다.
그걸 지켜보는 당초의 입은 당연하게도 쩍 벌어졌다.
그건 은소소도 마찬가지.
그녀는 이미 놀라운 경험을 했음에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가에 천잠사를 운용하는 무공이 있고, 사촌 동생도 천잠사를 운용하지만 이렇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천잠사가 대공자 손에 들어간 순간 마치 살아있는 뱀과 같이 스스로 움직이니, 도대체 어떤 경지에 오른 건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 모습에 또 놀란 이는 지귀객.
천공단이야 본 것이 넘쳐 실실거렸지만 지귀객은 목이 사라질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당 형, 선물 감사합니다. 덕분에 손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어…… 아니…… 저야…….”
당초가 여전히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더듬거릴 때, 후공이 갸웃했다.
“천화서고 형님…… 왜 그러시나요?”
“조용.”
당초가 움찔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한순간 천화서고 형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기에 당초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뭔가 온다.’
‘뭔가 있다.’
흩어져있던 천공단은 단주 곁으로 모였다.
각자가 기감을 끌어올려 탐지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은 어떤 소리도 기운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셋!’
후공은 감지했다.
쫓기는 자가 하나, 쫓는 자가 셋.
어느 쪽이든 속도가 가공할 만큼 빨랐다.
최소 화경의 중.
달려오는 방향대로라면 이곳을 지난다.
이제 숨결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쫓기는 자의 숨결이 거칠다. 부상을 당한 건가? 거의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주파해가는 탓에 그쯤 천공단도 하나둘 감지하기 시작했다. 항마삼협이 미간을 찡그렸고, 낭인왕과 무산쌍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로부터 고작 세 번의 호흡.
그쯤엔 모두가 인지했다.
그리고 다시금 숨을 들이마셨다 싶을 때는 거의 지척.
후공이 시선을 들어올린 순간, 위에서 하나의 신형이 떨어져내렸다.
후공은 신형을 날려 마주해갔다.
상대는 노인이었고, 이미 피범벅.
허공에서 그를 낚아채 낭인왕을 향해 던진 후, 품에서 오행기를 꺼내 뿌렸다.
파파파팟!
오행기가 꽂힌 순간, 그 영역 안 천공단과 노인의 모습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그와 때를 같이해 세 개의 인영이 위쪽 봉우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산 중턱에서 올려다보는 후공의 시선과 그들의 시선이 마주했다.
거리는 멀지만 마치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두 노인과 한 중년인.
그들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럴만하다. 분명 이곳으로 떨어져내렸는데 쫓던 이는 증발한 듯 종적이 묘연하고, 검을 차고 있는 새파란 애송이만 덩그러니 보이는 것이다.
‘사라졌다고?’
‘어떻게?’
‘산 중턱에서 아예 밑으로 추락한 건가?’
셋은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이내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주변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먼저 살피다 미간을 좁혔다.
점점이 흩뿌려진 핏자국이 보였지만 그것도 이어지지 않고 중도에 끊어져 있었다.
셋 중 중년인의 시선이 후공을 훑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절벽 위에서 볼 때도 연신 눈을 깜박이며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바라보더니 눈앞에 서자 청년 검수가 아예 주눅들어 한껏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보았나?”
“뭘…… 말씀하시는지……?”
“떨어져내린 노인.”
“아! 뭔가 휙 지나가긴 했습니다. 그, 근데 그게 너무 빨라서…….”
중년인의 시선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번에는 손이며 옷을 살폈다. 하지만 핏자국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곁의 노인이 전음을 발했다.
- 주군, 바로 추적해야 합니다.
- 그래야지.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인 후,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 아래 살기가 넘실거렸다.
“넌 어디에서 온 누구냐?”
“저는…… 천금서고의 선우진입니다.”
“여기 온 이유는?”
“흑전의 경매에 참여하려…….”
“천금서고가?”
단순한 의문이었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당연하게도 후공은 숨겨진 뜻을 알아차렸다.
천금서고에는 초대장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흑전이구나.’
바로 더듬거리며 해명했다.
“그, 그러니까 그게…… 제가 태왕전장의 은 소저와 친분이 있어 함께 가기로…….”
“아…… 그런건가.”
중년인의 미소는 사라졌고, 그 아래 깔린 살기도 사라졌다.
그와 함께 신형이 흐릿해졌다 싶은 순간, 세 인영이 산 중턱 아래로 쏘아져갔다.
“선우 공자, 언제 또 볼 수 있길!”
신형은 사라졌지만, 중년인은 말은 남겨졌다.
하지만 남긴 건 그만이 아니다.
후공도 남겼다.
셋 모두에게 남겨진 건 천향사주의 무향.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선이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