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36화 (236/460)

236화. 깃털 하나를 잃었다고?

사천 남동부 평중의 모처.

술잔이 아쉬움과 함께 비워져 간다.

‘대사부를 놓치다니.’

죽였어야 했는데…….

확실히 목숨을 끊었어야 했는데…….

제자는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상관월은 사부를 죽이지 못해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이미 술 한 병이 비어 가는데도, 그럼에도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누가 그랬던가. 술은 기분이 좋을 때 마셔야 한다고. 그 말대로였다. 술 기운에 기분만 더 더러워졌다.

사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떻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릴 수 있지?

다 죽어가는 몸으로 어떻게?

그곳으로 다시 가봤어야 했나?

그놈, 선우진이라던 놈을 다시 만나 확인했어야 했나?

생각도 잠시,

상관월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천금서고 선우진의 겁에 질린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눈을 보면 안다. 놈의 눈에는 두려움 외에 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몸짓도 그렇다.

주춤하며 물러난 다음 애써 침착하게 대답하면서도 손은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향하고, 마른 침을 삼키느라 목젖도 한 번 출렁였다.

병신 같은 모습이었다.

결코 꾸며낸 모습일 수 없었다.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후후, 그러고 보니 요즘은 서생 놈들이 날뛰는군.”

천화서고 대공자가 강호를 떠들썩하게 하더니, 천금서고의 서생까지 검을 들고 다닌다. 그것도 두 개나.

“강호가 미쳐 돌아가는군.”

잘난 놈들이 너무 많다.

잘난 척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

하찮은 놈들.

인정할 수 없다.

스스로 잘난 것이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놈들.

훌륭한 가문, 태어나 보니 수저가 금이고, 젓가락이 은이다.

하지만 난?

그래, 난 다르지.

상관월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네 살 때의 기억.

네 살 이전의 기억은 없다.

이 전의 기억이 없는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부모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기억의 시작은 늘 같다.

어두운 밤. 뒷골목의 풍경.

어린 그는 누군가 먹다 버린 더러운 만두를 먹고 있었고, 만두는 식었지만 맛이 좋았다. 그곳은 반점의 뒤편이었고, 뒷골목에서 웅크린 채 길가를 지나는 사람들을 한 번씩 흘깃거렸다.

술 취한 사람들, 아름다운 여인들, 노랫소리.

그중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은 건 부모의 손을 잡고 깔깔대는 또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내 곁엔 아무도 없어.

난 혼자야.

내겐 부모가 없어.

난 이렇게 어린데, 왜?

너희는 왜?

그렇게 뒷골목을 전전하며 여섯 살이 되었을 때, 행운이 찾아왔다. 내밀어진 손길과 함께 들려온 목소리.

‘우리와 함께 가자.’

‘…….’

‘이름이 무엇이냐?’

‘…….’

뒤늦게 상관월이라고 답했다.

상관월은 지어낸 이름.

이름은 없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렇게 말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민 손을 붙잡은 순간,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굶지 않게 되었고, 안락한 잠자리가 제공되었다. 두 명의 사부에게 무공도 전수받았다.

고마운 사람들.

다정한 사람들.

그리고,

머저리 같은 놈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제자에게 당할 줄은 몰랐겠지.

사람을 믿어? 웃겨 죽는다.

하나는 놓쳤지만, 하나는 손아귀에 있다.

그 꼴사나운 면상을 보러 가자.

상관월은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하 석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 석실에 이르자, 석실에서 사부가 반겼다.

“으으으으…….”

인사말 대신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상관월은 이해했다.

피투성이에 쇠사슬에 매달려 양쪽 비파골이 꿰뚫린 채 둥실 허공에 걸려 있으면 반갑게 인사하는 건 무리다.

이런 신세가 된 것이 1년 반 세월.

그러니 ‘으으으으’도 꽤나 다정한 말이었다.

“사부, 기쁜 소식을 들려주지.”

“…….”

“도망쳤던 대사부를 찾았어. 한데 내가 놓치고 말았네.”

“…….”

쇠사슬에 매달린 노인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상관월이 갸웃하며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서운하게. 사랑하는 제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심하잖아. 기쁘지 않은 건가?”

“어, 어떻게…… 된 거냐?”

노인이 힘겹게 물었다.

흑전주는 둘.

그리고 형제.

눈앞의 제자에게 동시에 암습을 당했지만, 형은 부상을 당한 채로 빠져나갔다.

그것이 일 년 반 전의 일.

부상에서 회복한다 해도 찾아오지 않길 바랐는데, 기어코 돌아온 모양이다.

제자는 미쳐버렸고, 스스로가 미친 걸 모른다. 또한 멈추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터.

충성스러운 심복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지금의 흑전은 패악과 욕망에 가득 찬 이들뿐.

마주하고 쫓겼다면 무사할 수 없다.

“어떻게라……. 솔직히 나도 얼떨떨해. 사라져버렸거든.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테지. 어느 음습한 동굴에서 이를 갈다 죽어갈지도. 아, 이런 이런! 말하고 보니 기쁜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이었네.”

“나도…… 죽여다오.”

그 말에 상관월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 알잖아?”

“…….”

노인의 눈에 진한 슬픔이 깃들었다.

제자는 원래 이렇지 않았다.

구유마공.

상관월이 마공에 닿은 것이 문제였다.

마공이 본성의 취약점을 증폭시켰다. 비약적으로 힘이 커지면서 원망과 파괴에 사로잡혔다.

“상관월…… 이대로면…… 너의 끝도…… 처참해진다.”

“하하하하! 그건 사부의 희망이겠지.”

“넌…… 강호 정파의…… 절세고수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누구?”

상관월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부, 건망증이 늘었군. 후공은 죽었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그가 없는 강호는 별것 없어. 운남의 점창도 지천에 의해 궤멸 직전이지.”

“…….”

“기대해. 이번 경매는 꽤 근사할 테니. 그리고 보여주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그들도 태어나 버려졌다면 얼마나 하찮은 삶을 살게 되었을지.”

“다…… 죽일 생각이냐?”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관월이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죽이지 않아. 실험을 할 생각이거든. 통과하는 놈은 살게 되겠지. 하지만 누구도 통과할 수 없을 거야. 물론 단 한 명이라도 통과한다면…… 흐흐, 난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대가를 지불해야겠지.”

몸을 돌려 나가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는 절망이 깃들었다.

십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흑전의 경매.

이번 경매는 이전과 다르다.

죽음의 경매다.

상관월이 말한 실험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그때 그 길로 가지 않을 텐데.

손을 내밀지 않을 텐데.

그날의 친절이 수많은 죽음을 불러오려 한다.

하지만 알고 있기도 하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만큼 커다란 유혹이었다.

아이의 근골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또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자신들을 뛰어넘을 기재였고,

뛰어넘길 바랐던 시간들.

모든 걸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

처소로 든 상관월이 벽을 향해 손짓했다.

정확히는 벽에 걸린 초승달 형태의 독문 병기인 월적하.

한 쌍의 초승달이 손짓에 날아와 등에 결착되었다.

그와 동시에,

스윽, 스윽, 슥!

붉은 실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초승달을 단단히 동여맸다.

이제 남은 건 이틀.

경매장으로, 파멸의 장소로 출발해야 할 때였다.

밖으로 나오자, 호법들이 따라붙었다.

정오의 햇살을 뚫고 신형을 날렸다.

방향은 서남쪽.

그렇게 야산 하나를 돌파할 즈음 들려왔다.

[그윽, 그윽.]

‘두꺼비?’

상관월이 갸웃하며 미간을 좁혔다.

이내 신형을 멈추고 돌아서 하늘을 바라봤다.

늦게 멈춘 두 호법이 되돌아와 주군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다 물었다.

“주군, 무슨 일이십니까?”

“두꺼비.”

“네?”

“두꺼비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두 호법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꺼비 소리는 듣지 못했고, 하늘에서 두꺼비 소리가 들려올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저기다.”

“……아!”

손으로 가리키니 그제야 두 호법도 확인했다.

아스라이 멀었다. 흰 새 위에 두꺼비가 보였다. 구름을 뒤에 두고 있어서,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터였다.

“비수.”

“네!”

호법 중 하나가 비수를 건넸다 싶은 순간, 이미 비수는 쏘아져갔다.

시야와 청각이 좋은 건 색관조도 마찬가지.

[꽉 잡아!]

[그윽!]

금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 비수가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색관조가 우측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깃털 하나를 잃었다.

하지만 끝은 아니었다.

이기어검.

비수가 방향을 선회하면서 쫓아왔기에 색관조는 기운을 최대한 끌어내 위로 솟구쳐올랐다.

[그윽, 그윽!]

더 빨리!

금섬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걱정 마. 나 색관조야!]

그냥 색관조가 아니다. 공청석유까지 흡수했다.

비수를 꼬리에 달고 색관조는 하늘을 돌파할 듯 치솟았다. 구름을 뚫고 들어가 비수가 방향을 잃게 한 뒤에도 계속 솟구쳤다. 그쯤 비수가 힘없이 추락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압력이 높아지는 탓에 이기어검의 한계가 빨리 찾아온 것이다.

색관조가 안력을 돋워 구름을 꿰뚫고 아래쪽을 바라봤다.

추락하던 비수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구름 아래쪽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돌아가자. 주인님이 이럴 땐 도망치라고 하셨어.]

[그으으으으으으으으윽!]

금섬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색관조는 구름 위로만 날아 연거푸 깃털 색을 바꾸며 도주했다.

‘영물인가?’

상관월이 내뻗은 손을 당겼다.

손짓에 따라 비수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로 향한 채였다.

깃털 색을 자유자재로 바꾸고, 두꺼비와 함께 다니는 새.

말도 하는 듯하다.

저 영물들의 주인은 누구인가?

언제부터 따라붙은 건가?

도대체 자신은 누구에게 관찰당하고 있는 건가?

언짢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상관월은 웃음 지었다.

기괴한 일을 연달아 겪는다.

죽어가던 대사부가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추적당했다.

‘누군가 날 노리고 있다.’

같은 놈일지도.

하지만 괜찮다.

상관월의 미소는 짙어졌다.

‘내 눈에 띄면 누구든 죽는다.’

**

그날 해질 무렵,

‘관허법사, 염라삼살, 설응자, 일지노괴…….’

후공은 사천 남단을 훑었다.

그 결과 여러 고수들을 파악했다.

어느 누구도 손쉬운 상대는 없다.

그들이 초대장을 받은 건 아니다.

초대장을 받은 유수의 가문들이 절세고수들을 초빙해 동행한 상황. 당연한 광경. 보물은 가치가 클수록 위험을 수반한다.

관허법사는 화경의 예에 이르렀고,

중원칠괴 중 하나인 일지노괴는 화경의 중에 이른 이. 뚱뚱한 놈인데 탄지신통에 정통해, 열 손가락에 내뻗는 강기가 일품이다.

염라삼살과 설응자도 화경에 이르렀다 알려진 이들.

그 외에도 강호에서 한가락한다는 이들이 호위격으로 가문들을 보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흑전은 이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예상되는 답이라면…….

흑전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호의 가문들이 절세고수들을 초빙하는 걸 흑전이 모를 리 없다.

물론 정면 승부를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면승부라면 흑전이 몰살당한다.

무엇일까?

‘……응?’

신형을 돌려 돌아가던 중 후공은 갸웃했다.

천향의 연계가 둘.

점점 강렬해졌기에 후공은 빙긋 미소지었다.

신형을 나아가 맞이했다.

[주인님, 주인님!]

[그윽, 그윽!]

색관조가 날아와 지면에 내려앉았고, 금섬이 등에서 내려와 펄쩍펄쩍 뛰었다.

“찾았나 보구나.”

[네, 찾았어요. 근데 있잖아요…….]

그렇게 들려준 이야기에 후공은 분노했다.

“깃털 하나를 잃었다고?”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큭큭큭!]

주인이 자신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해 주고,

별것도 아닌 일에 분노해주자 색관조와 금섬은 기분이 좋아져 한바탕 주변을 날고, 뛰었다.

[주인님이 너무 좋아! 까르르르르르르르!]

[그윽, 그윽, 그윽!]

*

그 시각,

지귀객은 울고 싶어졌다.

쥐가 된 기분이었다.

천공단 놈들 때문이었다.

자신은 쥐가 아닌데, 쥐잡듯 잡아대는 것이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