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꿈꿔왔던 강호가 곁에.
천공단은 무와산에 있었다.
목적지인 목양산까지는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산이었다.
그곳에서 천공단은 땅속 여행 중.
안내자는 당연하게도 지귀객이었고, 천공단은 언제나 그렇듯 불평불만이 가득했다.
“너 지천 맞냐? 속도가 너무 느리잖아!”
“땅을 넓게 파야 할 것 아니냐! 이 두더지 새끼야!”
“너만 빠져 나가면 어떡해! 파면서 동시에 무너지지 않게 땅을 다져야 할 것 아니냐고!”
“너 그냥 죽을래!”
지하 십여 장 아래에서 멈춘 천공단이 울화를 터뜨렸다.
“…….”
지귀객은 울상.
이놈들, 어떻게 된 게 고마운 걸 모른다.
땅을 파는 것도 자신이고, 수고를 마다 않고 신비한 여행을 시켜주고 있는데 누구 할 것 없이 꾸지람만 하는 것이다.
‘시발놈들.’
속으로 욕하고 애써 미소지었다.
“잘할게.”
“너 방금 속으로 욕했지?”
낭인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야. 안 했어…….”
“욕하면 죽어. 잘할 수 있어?”
“어…….”
“그리고 속도 좀 올려! 쿠르르르르르르르, 지천은 속도가 엄청나서 이런 소리가 났는데, 넌 대체 뭐냐? 지천 당주 출신이라며? 근데 왜 그 모양이야! 넌 왜 쿠르르르르르가 아니고 구르르르르르냐고!”
“원래 구르르르르야.”
“그런 게 어딨어!”
“…….”
지귀객이 축 처진 눈으로 천공단을 바라봤다.
땅을 넓게 파 다져놓은 터라 주변은 넓었고, 서 있을 수도 있는 상태. 그 상태로 다들 노려보며 단 한 명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거기에 왜 무흔신투 선배와 당문의 아이까지 함께 눈알을 부라리고 있는지는 모를 일. 특히 선배는 천공단 안 한다고 하더니만 어느샌가 아주 성골이었다.
‘시발…….’
난 쿠르르르르가 안 된다고!
지천이 한계를 극복한 대가로 햇빛을 잃고 피를 마셔야 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놈들이 쏘아붙이니,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대치 상태에서 유연한 성격의 은앙개가 나섰다.
“자자, 싸움은 여기까지 하고 얼른 여행이나 이어가자고요. 이제 곧 저녁 먹어야 할 시간이에요.”
밥 이야기에 천공단이 눈이 반짝거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서두르자고!”
“돼지!”
“토끼!”
“버섯!”
“사슴고기!”
요리를 소리쳐 부른 다음, 땅속 여행이 이어졌다.
구르르르르르르르…….
지귀객이 앞장서며 땅을 뚫고 나가고, 그 뒤를 천공단이 세상 편하게 이동했다.
*
지상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지하 여행에 참여하지 않은 건 항마삼협뿐.
호위 임무를 부여받은 삼협은 은소소와 함께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편히.”
은소소의 말에 삼협이 부드럽게 응했다.
은소소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형님이 이 여인을 아끼는 듯 했기에 평소의 어투 대신 단어 선택과 표정에 각별히 신경 썼다.
“천공단은 대공자가 만든 것이겠죠?”
“전혀. 형님의 친구가 만들었습니다. 이름은 주양.”
“그래요?”
뜻밖의 말에 은소소의 눈이 커졌다.
항마삼협이 웃음을 머금었다.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약속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굉장히 호전적입니다. 내공 한 줌 없다는 것이 함정입니다만, 내공이 없어도 곁에 주렁주렁 고수들을 달고 다녀서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죠.”
“천공단에 들려면 그 사람을 찾아야 하나요?”
“하하, 그럴 리가요.”
“그럼요?”
“주 공자가 대단하다지만 형님에 비하면 그냥 찌끄레기입니다. 천공단에 관여할 수 있을 리가요.”
“그럼 알려줘요. 천공단에는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나요?”
은소소가 바로 목적을 밝혔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경이롭고, 천공단의 면면도 하나같이 놀랍다. 얼굴만 보면 마도 고수들 같은 흉악한 이들에다가, 천룡의 후예들과 개방 방주의 제자들, 그리고 강호의 대도(大盜)까지. 심지어 땅을 파고들어가는 이도 함께한다.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겪은 바가 적지 않다.
소문을 초월한다. 대공자가 지나는 곳마다 폭풍이니, 은소소는 자신의 청춘을 천공단과 함께하고 싶어졌다.
“그게…….”
삼협 중 이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왜요? 까다롭나요?”
“까다롭다기보단…….”
“답답하군요. 속 시원하게 말해보세요.”
“짖으면 됩니다.”
“네?”
“형님 앞에서 개처럼 짖으면 됩니다. 그게 제일 빠른데……. 소저에겐 쉽지 않아서…….”
“왈왈, 이렇게요?”
“더 맹렬하게.”
“크르르르릉, 왈왈왈! 이건 어때요?”
“조금 낫긴 한데…….”
“흐음, 여기서 더 하면 거의 미친개 수준이잖아요. 삼협도 짖었나요?”
“어…… 우린 장로들이라.”
“천공단에 장로가 있었어요?”
“초기 인원은 다 장로랄까.”
“와아, 대단한 분들이었군요. 대공자에게 인정받은 거잖아요.”
“형님은 인정해준 적 없…….”
“응? 그게 뭐예요?”
“…….”
장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군사도 있다.
생각을 안 하는 군사.
그 군사가 부족함을 깨닫고 수행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까진 할 필요 없겠지. 어차피 직급이야 인정받은 적 없고, 그것도 생각을 안 하는 군사가 멋대로 정한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묘빙빙은 잘 지내고 있는 건가.
보고 싶네, 같은 생각을 삼협이 하고 있을 때였다.
“왈왈, 크르르르르릉, 왈왈왈……. 크르르르르르르르르르……. 왈왈왈…….”
은소소가 개처럼 뛰어다니며 짖어대기 시작했기에, 삼협은 일제히 멍해지고 말았다.
‘저게 되네?’
‘잘해.’
‘저렇게 예쁜데 짖어버렸…….’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뛰쳐나가 황급히 만류했다.
“소저, 지금 뭐합니까!”
“놔봐요. 짖어야 한다면서요.”
“연습은 혼자 있을 때 해도 되지 않소이까!”
삼협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누구 죽일 일 있냐! 형님이 특별히 여기는 소저다. 이 모습을 형님이 봤다가는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 것이 틀림없었기에, 삼협은 정신없이 만류했다.
그때였다.
까르르르르르릉!
작은 우레 소리와 함께 자줏빛 광채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어?”
“형님? 형님이 오셨다.”
삼협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짖던 은소소도 몸을 일으켜세우곤 자줏빛 광채를 보며 넋이 나갔다.
“대공자인가요?”
“네, 오셨습니다.”
“와아, 굉장해. 이기어검이로군요?”
은소소가 탄성을 터뜨렸다.
대공자의 손길에 이끌려 구름 위까지 날아올라보긴 했지만, 자줏빛 강기를 두른 채 허공을 가르는 대공자의 검광은 처음이었다.
항마삼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여태 지켜본 바 이기어검이 아닌 탓이다.
이는 그 너머다.
검들은 기운에 의해 유도되지 않는다. 제멋대로다. 형님이 어떻게 검과의 연계를 유지하는지는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카르르르르르릉!
포악하게 울부짖던 친이 지면으로 폭사해 들어갔다.
그대로 땅을 헤치며 나아갔다가 멈춰선 건 지귀객의 눈앞.
꿀꺽.
지귀객이 나타난 단검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손바닥만 한 검이 광채를 발하며 마치 살아있는 듯 눈앞에서 노려보는 것이다.
그리고 알아봤다.
‘신검…….’
지귀객은 기분이 묘해졌다.
천하제일인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안에서 훔쳐냈던 신검을 다시 보는 것이다. 신검은 셋. 그중 눈앞의 검은 금취객에게 주었던 단검이었다.
그리고 이젠 대공자의 검이 된 듯하다.
대공자는 이걸 어찌 운용하는 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 천공단, 시작되었어!
뒤쪽에 전음을 건넸다.
전음은 계속 뒤로 뒤로 이어져 전달되었다.
무엇이 시작된 건지 묻는 사람은 없다.
더불어 선두는 바뀌었다.
친이 앞장서고, 그 뒤를 지귀객과 천공단이 뒤따랐다.
*
그러부터 이틀.
약속의 시간이 찾아왔다.
사천 동남부, 서남부, 남부 각지에서 오십여 가문들이 각각의 지역에서 해당 장소로 이동했다.
“드디어 보물을 마주할 시간이야!”
“그리 좋으냐?”
“그럼요.”
누군가는 어떤 보물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기대하며 들떴고,
“제발, 엄청난 보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검이 나오길! 만박선생, 기도 같이 안 합니까?”
“속으로 했어!”
“소리 내서 하면 더 좋습니다.”
“…….”
“영약도 끝내주는 것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
“듣고 있습니까?”
주양은 이번 경매에서 형편없는 보물만 나오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했고, 만박자는 내심 천화서고 대공자의 검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다시 말해주고 싶었지만, 주양에겐 씨도 먹히지 않을 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다른 한편에선,
- 흐흐, 모조리 죽이고 쓸어가는 거야.
- 흐흐흐, 두근거리는군.
- 그래도 상황을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걸 잊으면 곤란해.
악의를 지닌 이들도 있었다.
만금전장의 장주와 그 아들과 동행하게 된 염라삼살이었다.
“대협들께선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기다리기 지루했지 않습니까.”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부디 만금전장에서 원하는 보물을 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금전장은 강호 대협으로 위장한 염라삼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염라삼살은 겉모습만 보자면 협객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떤 기대, 어떤 불안, 어떤 욕망들이 나아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번 경매가 죽음의 연회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는 건 오직 천공단뿐.
목양산으로 나아가는 천공단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웃음과 농담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단주를 뒤따르며 산의 초입에 이르러 멈췄다.
단주가 소매를 떨친 순간,
푸욱!
자줏빛 광채가 번쩍하며 땅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귀객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지귀객이 서 있던 자리에는 구덩이만 남았다. 그 구덩이로 천공단이 속속들이 뛰어들었다.
항마삼협을 필두로, 그 뒤를 당초와 소천개가, 또 그 뒤를 이어 남궁연과 언교운 등이 줄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뛰어든 건 무산쌍웅이었다.
이제 새로운 여행.
연습은 충분히 했다.
지하 십여 장.
지귀객은 눈앞에 있는 자줏빛 광채를 보며 미소 지었다. 다시 보자 반가웠다.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그 감정에 반응하듯 친이 빛을 거뒀다가 뿜었다가 하며 깜박깜박거렸다.
그렇게 동행 준비가 끝났기에,
후공은 은소소와 함께 산 위로 신형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친이 움직였다.
주인의 의식을 따라 카르르르릉 소리 대신 슥슥 땅을 돌파해갔다.
그 뒤를 지귀객이 열고, 천공단이 뒤따랐다.
구르르르르르르.
땅의 울림은 미약하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건 둘이나, 모두가 동행.
색관조와 금섬도 함께했다.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을 높이 날았다.
한차례 공격당했고, 깃털 하나를 잃었기에 구름 위로 날았다. 그러면서도 주인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두근, 두근.
그런 가운데 은소소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두려움은 아니다.
두렵지 않다.
곁에 달리는 이가 천화서고 대공자.
그녀가 두근거린 건,
그저 환희!
‘이거야! 내가 꿈꿔왔던 강호!’
적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 함정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곁에 있는 이는 강호의 절세고수이자 연륜 깊은 노고수처럼 여유롭다.
더불어 하늘 위에는 영물들이,
지하에는 그의 수하들이 은밀히 뒤따른다.
그렇기에 은소소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정 장소인 목양산 천인봉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더욱 거세게 두근거렸다.
‘강호가 내게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