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소저, 눈을 그렇게 뜨면 안 됩니다.
산은 빠르게 어둠에 잠겼다.
달빛 아래 천인봉에서 기다리길 일식경.
‘늦네.’
은소소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괜히 불안해지는 시간.
은소소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색관조를 찾아보려 했지만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어딘가에 있다. 저 하늘 위 어딘가.
‘그리고…….’
은소소의 시선은 땅으로 향했다.
여기 지하에도.
보이지 않지만, 곁에 있는 이들.
그녀의 시선은 이내 옆쪽으로 향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뒷짐을 진 채 뚱한 표정으로 서 있다. 어찌보면 거만해 보이고, 또 달리 보면 별 생각 없어 보이는 모습.
기이한 사람.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
정녕 이 사람은 긴장이란 걸 모르는 걸까?
멋있어.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은소소는 감지했다.
방향은 동북쪽.
빠른 속도로 산에 근접하는 이들은,
‘넷.’
산 중턱 정도다.
- 대공자, 오는 것 같아요.
- 그렇군요.
대공자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만으로 은소소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내 흑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넷.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고, 가면의 표정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너무 밝은 웃음이라 어딘가 정신 나가 보이고 무서워 보이는 가면이었다.
네 마리 토끼 중 하나가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어느 가문의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손한 태도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소소가 답했다.
“태왕전장의 은소소예요. 동행인은 한 명. 천금서고의 선우진 공자입니다.”
그러면서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내밀었다.
토끼가 초대장을 확인하고, 이어 시선을 돌려 서생 쪽을 바라보며 갸웃했다.
“태왕전장의 동행인은…… 흥미롭군요.”
웃는 가면인 탓에 갸웃하는 모습만으로 짙은 의구심이 드러났다. 은소소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외가 쪽은 관심을 보이지 않더군요.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겠죠?”
명확한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서로는 질문과 답을 이해했다.
왜 태왕전장의 동행인이 사천당가의 인물이 아니냐?
자존심 강한 사천당가에서 초대장을 보내지도 않은 곳에 참가하겠는가.
그런 물음과 답변.
답이 되었고 이해했기에 토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저 태왕전장과 천금서고가 인연이 있었다는 점이 의외여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아요. 이제 이동하나요?”
“아닙니다. 먼저 간단한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토끼가 말을 이었다.
내용인즉,
두건을 쓰고, 가면을 착용해야 한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게 된다.
태왕전장은 칠 번.
여기까지는 이미 인지하고 있던 내용이었기에 쓸데없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듣고 싶은 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겠지.
토끼가 공손한 어조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안전에 대한 조치입니다.”
“안전?”
은소소가 짐짓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보물이 화를 불러온다는 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소저나 공자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대다수일 터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각 가문에서 초빙한 고수들 중 만약 누군가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흑전은 그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은소소는 장단을 맞춰 주었다.
듣고 싶었던 말이다.
흑전은 어떤 수단을 쓰려는 걸까?
흑전이 과거의 흑전이 아니고, 스승을 죽인 제자가 흑전의 주인이 된 걸 알게 된 이상, 이제부터 나올 말이 중요했다.
“모든 참가자들은 산공독을 복용하게 됩니다.”
“아……!”
은소소가 탄성을 발했다.
산공독은 내공을 흩어 일시적으로 내력 운용을 불가능하게 한다. 어떤 고수라도 일반인이나 다를 것이 없어진다.
다들 평범해지겠지만,
강한 힘을 유지하는 건 오로지 흑전뿐.
다른 마음은 흑전이 품고 있으니,
‘위험해.’
어떻게 해야 하지?
흑전의 산공독은 산공독 중에서도 최상일 터.
대공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천공단이 따라오긴 해도, 대공자가 무력화되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잠시 시간을 벌자.
대공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자.
그런 생각과 함께 은소소가 입을 열었다.
“거부해도 되나요?”
답변은 예상 범주.
아니나 다를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리하시면 당연히 태왕전장은 경매에 참가하실 수 없습니다.”
당연한 대답에 은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여기까지. 결정권자는 천화서고 대공자다. 그가 결정할 차례.
“선우 공자, 그쪽 생각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말하던 은소소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대공자가 없었다. 어디로? 그러다 고개를 더 돌려서야 어느샌가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있는 대공자를 볼 수 있었다.
대공자의 얼굴은 이미 사색.
은소소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하, 저기요? 대공자님?
겨우 마음으로만 웃었다.
대공자의 겁에 질린 표정이 너무나 실감 나, 그녀도 순간 속아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은소소는 이미 겪었다.
하늘을 날아오른 이.
신검을 다루는 이.
그런 그가 겁먹을 리 없다.
대공자는 겁먹고 싶어도 그리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이 행동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에겐 해결책이 있어.’
어떻게 대공자가 그런 확신에 차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믿을 뿐.
그리고 지금 대공자는 흑전주를 만났을 때 보였던 모습, 그 연장선상에서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더불어 은소소는 다른 깨달음도 얻었다.
“선우 공자, 두려워하지 말아요.”
“하지만 소저……. 내공 운용을 못하게 되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으니…… 저는……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어눌하고 두려움에 찬 목소리.
이런 모습을 두 번째 본다.
첫 번째 보았을 땐 그저 연기를 하나 보다 했는데, 이제 은소소는 알게 된다.
천공단주가 짖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처럼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짖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천공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왜 그가 개처럼 짖으라고 하는 것인지 은소소는 알 것 같았다.
믿음을 시험하는 것도 있겠지만,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더불어 모든 일이 강한 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대공자는 자신이 먼저, 또 언제든지 짖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은소소가 미간을 찡그렸다.
“선우 공자, 실망이군요. 당신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요?”
“…….”
입을 꾹 닫고 있는 모습에 은소소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부드럽게 달랬다.
“생각해 봐요. 이건 우리에게 도리어 좋은 상황이에요. 솔직히 저나 그대나 내공이 있건 없건 화경에 이른 고수를 상대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니까요. 차라리 모두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면 그보다 안전한 환경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어……. 그, 그렇군요. 듣고 보니…… 소저 말이 맞습니다. 크흐음…… 제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요. 너무 걱정 말아요. 흑전은 신뢰할 수 있어요. 분명 이번 여정은 멋진 추억이 될 거예요.”
‘쯧쯧…….’
토끼가 내심 혀를 찼다.
둘의 대화도 대화지만, 특히 서생 놈의 태도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이런 놈을 주군께선 왜…….’
주군의 명이 따로 있었다.
태왕전장 편으로 천금서고의 서생이 함께 온다는 내용이었고, 서생을 유심히 살피라는 말이 따라왔었다.
유심히 살핀 결과는 ,
그저 머저리.
제놈이 뭐라고 내공을 잃는 걸 걱정한단 말인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놈이.
저런 놈이 뭐라고 주군은 지켜보라고 한 것인지 토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흔히 사내들이 여인 앞에서는 괜히 더 우쭐해하며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상식인데, 이놈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하니 쌀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정작 그 여인은 더 대단하게 여길 뿐.
“그럼 두 분께서 수락한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하하, 환영합니다. 결코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토끼가 웃으며 품에서 두 개의 옥병을 꺼냈다.
“용해된 산공독입니다. 그저 기운만 흩을 뿐이며, 몸에 해로운 성분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옥병이 건네졌다.
은소소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마셨다.
순간 내부 기운이 착 가라앉았다.
“놀랍군요.”
은소소가 감탄했다.
내공을 익힌 이들은 내력을 따로 운용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경맥을 휘도는 기운이 주천하는데, 그 흐름조차 끊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선우 공자께선?”
토끼가 겸양하고 시선을 돌려 재촉했다.
사내놈이 되어 옥병을 들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쩝.”
“……?”
토끼가 갸웃했다.
가면 속 이마는 찡그려졌다.
은소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원하게 들이켰는데, 이놈은 입을 쓰게 다시더니 눈을 감고 억지로 입에 가져가는 것이다.
토끼로선 하는 짓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뭔데 또 눈은 감는단 말인가.
하는 행태마다 어린아이 같으니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아니다.
눈을 감은 건, 단지 연기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눈에 신광이 번뜩임을 감추기 위함일 뿐.
후공은 옥병을 열어 향을 맡는 순간 산공독의 종류를 알아차렸다.
최고 수준의 신선폐.
기본 효능은 내력을 흩는 것이나, 신선폐는 그 다음 단계가 있다. 내력을 억지로 끌어모으려 하고 통제하려 할 때,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내재된 독이 작용한다.
단계를 두는 만큼 만들기가 어렵다.
한데 흑전의 신선폐는 세 단계.
첫 효능 이후 이어지는 건 두 번의 독이 순차적으로 발효된다.
그것이 삼악을 자극했다.
존재를 잠재우려는 첫 단계에 광분하고, 이어지는 두 번째, 세 번째 단계의 독은 정화시키려 발작했다.
그렇기에 후공은 눈을 감아야 했다.
삼악이 신선폐를 포악하게 집어삼킨 후에는 기운이 일시적으로 요동치기에 절로 두 눈에 신광이 번뜩이게 되는 것이다.
쿠궁, 쿠구궁!
내부에서 격돌이 일었다.
신선폐는 대항했지만, 삼악은 물러남이 없다.
풍열과 공청석유를 통해 강화된 삼악의 포악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간단히 진압.
직후 기운이 요동쳤다.
포식자의 여유가 뿜어나오려 했기에 후공은 기운을 가라앉히는 한편, 손을 들어 이마를 짚듯 하며 눈을 가렸다.
그 순간,
눈을 감고 있음에도 신광이 감은 눈 사이로 새어나왔다.
손을 내린 후,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은소소의 말을 따라했다.
“놀랍군요.”
토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번에도 ‘과찬이십니다’라고 말해야 했지만, 하는 짓마다 못마땅해 다정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시죠. 아래 쪽에 가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멀리 가진 않았다.
산을 조금 내려갔을 뿐.
가마는 컸다.
하나의 가마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형태였다.
가마에 오르기 전 잿빛 두건을 둘러쓰고, 개구리 가면을 착용했다.
그제야 토끼들이 가마를 들어올렸다.
“허허, 은 소저 덕분에 이거 호강합니다.”
“거봐요. 제 말을 듣길 잘했죠?”
“그렇습니다. 모두 소저 덕분입니다.”
가마를 들고 신형을 날리는 토끼들은 여전히 활짝 웃고 있었지만, 가면 안쪽의 얼굴은 많이 일그러졌다.
그 가운데,
은소소의 손가락이 후공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후공이 바라보자, 은소소가 손가락을 놀려 손등에 글자를 적었다.
- 대공자.
- …….
- 전음을 사용할 수 없어서 손글자로 대신해요.
- …….
-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일반적인 산공독이 아닌 듯해요. 전음조차 운용할 수 없으니.
은소소가 물은 다음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다.
후공은 빙긋 웃고는 은소소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손가락을 놀렸다.
-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
은소소가 갸웃하며 바라볼 때, 손은 거둬졌다.
그 대신,
- 저는 산공독보다 소저의 현명한 대처에 감탄했습니다.
전음이 들려왔기에 은소소의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어, 어떻게 전음을…….’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대공자가 내력을 운용하고 있다니!
분명 마시는 걸 봤는데, 어떻게 이리도 빨리 산공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공자의 전음이 이어졌다.
- 소저, 눈을 그렇게 뜨면 안 됩니다.
미소가 함께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