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쾌가 좋아하고 있다.
그 밤, 각지에서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토끼 가면을 쓴 흑전이 나타나 확인 작업을 거친 다음 참가 조건을 설명했다.
그리고,
“산공독?”
누구 할 것 없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일시적이라도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는 점은 꺼려지기 때문이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도 이곳에서 서로 간에 작별 인사를 나누어야겠지요.”
“흐으음…….”
그건 만박자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께한 불평진인도 늘 부르던 노래를 뚝 그쳤다.
두 사람은 고민에 휩싸였지만, 주양은 아니었다.
“만 선생, 뭘 머뭇거리십니까? 설마하니 흑전을 못 믿는 건 아니겠지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한 건 숨겨진 목소리.
전음.
- 주 공자, 이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네.
“……?”
갸웃하는 주양을 향해 만박자가 전음을 이어갔다.
- 내가 흑전의 경매에 참석한 것이 이번이 세 번째일세. 이전 두 번의 경매에서는 산공독 같은 건 없었단 말이네. 이상하지 않나? 산공독을 복용한 후에는 나나 불평이나 자네를 지켜줄 수 없네. 그냥 우린 농부나 다름없는 몸이 되는 걸세. 이해했으면 고개를 두 번 끄…….
만박자는 전음을 잇지 못했다.
주양이 크게 웃음을 터뜨린 탓이었다.
“하하하하! 선생께선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는군요. 과거와 달리 흑전이 이번 경매에 산공독을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보물이 경매품으로 나온다는 뜻이고, 또 그에 비례해 위험이 수반되기에 모두를 공평하게 농부로 만드는 것인데 두려워할 일이 무엇입니까.”
만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상식 없는 새끼야.
상대가 전음을 했으면 눈치껏 그에 맞춰 대화를 이어나가야지, 대놓고 말해버리는 경우가 어딨단 말이냐!
하지만 주양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만 선생, 뭘 음침하게 전음을 쓰십니까. 제가 그래서 전음을 배우지 않는 겁니다. 군자는 당당해야지요.”
“그러니까, 참여하자?”
만박자가 전음을 포기하고 물었다.
주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아…… 좀 그런데…….”
“정 꺼려지시면 만 선생과 진인께선 돌아가십시오. 저 혼자 가겠습니다. 저야 내공도 없으니 산공독을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입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나. 만약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어찌 감당하려고 하나. 자네의 대단한 친구라도 있다면 모르겠네만, 대공자가 이 먼 사천에 와 있을 리도 없고…….”
“천화서고는 가난해서 초대장이 갔을 리 없습니다.”
“거기도 부자야!”
만박자가 소리를 꽥 질렀다.
미친놈의 새끼가 제아무리 부의 기준이 다르다 해도, 천화서고를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흐음, 제 말이 심하긴 했습니다. 그 정도까진 아닌데. 친구가 들었다면 꽤 섭섭할 말이었습니다.”
“섭섭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건 제 배려입니다만.”
태연한 답변에 만박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토해내듯 외쳤다.
“에잇! 같이 가세! 가자고!”
“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용해된 산공독을 복용했고, 두건과 가면이 주어졌다.
주양이 가면을 받으며 토끼에게 물었다.
“모두 호랑이입니까?”
“가면은 두 종류. 개구리도 있습니다.”
“하하하하! 선생, 진인! 우린 호랑이이니 운이 좋습니다.”
“…….”
“…….”
**
그렇게 대다수는 수긍했고, 동시에 경매품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어떤 이는 산공독의 종류를 파악하기도 했다.
‘신선폐?’
더 나아가 독을 해소해낸 이도 있었다.
염라삼살이 그에 해당되었다.
- 되는군.
- 별것 없군.
- 오히려 최적의 상황이 아닌가.
대협의 풍모를 풍기는 가운데, 세 노인은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은밀히 내력을 응집해내는 데 성공했고, 그 이후 발현된 독까지 해소해냈다.
자신들만 힘을 지닌 채 참여한다.
일이 쉬워졌다.
모든 참가자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면, 흑전만 상대하면 모든 경매의 보물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다.
흑전이 수고를 덜어 준 셈이니,
도리어 흑전이 고마울 지경.
표정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다 감추진 못했다.
토끼들은 보았으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흑전의 신선폐는 단계를 지녔다.
최종적인 해소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다.
그런 믿음이 토끼들의 무심함의 이유였지만, 염라삼살이 알 길은 없었다.
**
가마들이 속속들이 한 지점으로 모여들었다.
거대한 분지였다.
그 안에 건물은 없었다.
인위적으로 깊게 파낸 분지는 원형의 형태였고, 층층이 고급스러운 청강석으로 계단이 만들어졌는데, 그 계단은 계단임과 동시에 좌석이었다.
분지의 외곽을 감싸는 건 일정한 간격의 나무 기둥.
기둥은 굵었고, 기둥 안쪽은 야명주가 알알이 박혀 있어 횃불을 대신했다.
두건을 쓰고, 가면을 착용한 이들이 안내를 받아 하나둘 자리를 채워 갔다.
그 광경을 멀리서 흑전주가 지켜봤다.
산 위 정자에서 바라보고 있음에도 상관월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이탈한 가문은 세 가문입니다. 그 외 모든 가문과 동행인이 신선폐를 복용했습니다.”
호법의 보고에 상관월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시선은 여전히 경매장을 향한 채였다.
“괜찮군. 태왕전장의 동행인은?”
“천금서고의 서생은 겁에 질려 참가를 망설였다고 합니다. 여인이 겨우 달랜 다음에야 마지못해 참여를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의심의 여지는 찾지 못했다는 말이 더해졌습니다.”
“흐음, 그런가…….”
상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과 달라진 점이 없다면 의미를 부여할 가치가 없는 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잠깐 다시금 대사부의 생사여부가 떠올랐지만, 이내 떨쳐냈다. 대사부가 방해 요소가 될 리 없다. 구유마공의 음유한 공력에 세 차례나 타격을 입었고, 월적하에도 허리가 깊게 베이지 않았던가.
생각도 잠시, 상관월이 갸웃하며 미간을 좁혔다.
개구리 가면 하나와 시선이 마주친 탓이었다.
‘……?’
개구리는 어느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분지를 두르고 있는 나무 기둥 사이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보았다.
두 개의 검.
하나는 허리에, 다른 하나는 등에 메고 있는 자.
‘천금서고 선우진?’
두건을 두른 데다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있어 볼 수 없었지만, 검을 보며 상대를 파악했다.
이 거리에서 날 볼 수 있다고?
그럴 리가.
그저 무작위로 두리번거린 것이겠지.
그럴 것이다. 신선폐를 복용한 상태에서는 안력도 평범해진다. 이 먼 거리를 관통하고 바라볼 수 있을 리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상관월은 기분이 묘해졌다.
왜 놈이 자꾸만 나타나는가.
왜 매순간 눈에 걸리는가.
모를 일이다.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인가.’
그럴지도.
힘의 차이와 관계없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놈이다.
순서를 바꾸자.
놈이 첫 번째다.
놈의 사지를 제일 먼저 자른다.
“설악.”
“네!”
“첫 번째는 천금서고의 선우진이다. 그 전에 선우진을 포함 모두에게 기쁨을 주어라. 들뜨게 만들어라. 갖게 한 다음 빼앗아라. 환희가 클수록 더 고통스러울 테니. 그 추락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울 테니.”
“존명!”
설 호법이 크게 답했다.
경매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생애 마지막 불꽃. 마지막 환희를 안겨준 후 절망을 안겨주라는 명.
설악이 산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두웅, 두웅, 둥!
종소리가 경매의 시작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토끼 가면을 쓴 흑전의 검수들이 경매장 외곽을 두르고 있는 나무 기둥마다 자리했다. 서 있는 방향은 경매장을 수비하는 형태.
두웅, 두웅, 둥!
종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누군가에겐 경매의 시작, 누군가에겐 죽음의 연회.
다른 누군가에겐 급격히 긴장되는 순간.
은소소가 손을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애써 가라앉히려 하기에 후공은 가면 안에서 웃었다.
두웅, 두웅, 둥!
종소리에 맞춰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다 한순간 위로 튕겼다.
천향사주의 탄결로 솟구쳐오른 향은 삼십여 장을 올라가며 퍼뜨려졌다.
향나무의 향.
심신을 안정시키기 좋다.
향이 내려앉으며 분지 내 가득 퍼져갔다.
이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건 은소소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 향기…… 너무 좋아. 대공자, 부근에 향나무가 있나 봐요.”
은소소가 눈까지 지그시 감고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그렇군요. 운치 있는 밤입니다.”
“향나무 중에서도 극상인가 봐요.”
은소소가 잠시 불안을 잊은 모습이었기에, 후공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때,
“하하하하! 만 선생, 진인! 하늘에서 향이 쏟아집니다. 흑전은 실로 대단하군요. 어떻게 이런 곳을 경매장소로 삼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밤의 향기라니. 하하하하, 어떻습니까, 제가 반드시 참석하자고 강권한 것이 옳지 않았습니까!”
주양의 목소리였기에 후공은 물도 없이 사레가 들렸다.
“콜록, 콜록, 콜록…….”
“선우 공자, 괜찮나요?”
“괜찮지 않습니다.”
“하하, 괜찮군요.”
주양의 가문이 은하전장이니 어쩌면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리 떡하니 앉아 있는 걸 보자니 천하의 후공도 사레는 피할 수 없었다.
만 선생은 만박자일 테고,
진인이란 건 불평인가?
떠올린 의문은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곧바로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랄라라라~~~. 랄라라라~~. 향이 좋구만, 좋아! 랄라라~~.”
“콜록, 콜록, 콜록…….”
불평진인의 노래소리에 후공의 잦아들던 사레가 다시 발동했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두웅, 두웅, 두웅, 두웅, 두우우우웅!
종소리가 멈췄다.
장내도 서서히 고요해졌다.
분지의 중앙으로 토끼 셋이 들어섰다.
그중 백발이 성성한 토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중원에서 최고의 부에 이른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모시는 가운데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음에도 이 자리에 모든 분들께서 흔쾌히 응해주신 점은 감격스럽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마도 모두 짐작하셨을 겁니다. 왜 이번 흑전의 경매가 과거와 다른가? 그렇게 철두철미해야 할 만큼 이번 경매에 선보일 품목들이 진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네, 맞습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터져나왔다.
토끼는 호랑이와 개구리들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말을 이었다.
“이번에 선보일 경매품은 총 열한 가지입니다. 어떤 보물이 더 훌륭하다고 장담하기 힘든 물품들이며, 무엇을 낙찰받으시든 십 년을 기다린 보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경매의 진행과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신분 보호를 위해 모든 경매의 호칭은 번호로 대신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에 몇은 탄식했고,
몇은 다행이라 여겼다.
한 가문이 낙찰받을 수 있는 경매 물품의 최대 수량이 두 개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분들께선 경매 참여에 신중을 기해 주십시오. 먼저 두 개를 낙찰받은 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선택의 편의를 위해 경매품의 개요를 간략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영약류와 신병이기가 포함되어 있고, 그 외 미리 말씀드리기 어려운 보물들이 있습니다.”
“1번입니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손을 들어 말하는 건 1번.
호랑이 가면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신병이기 중 보검이나 신검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그건 미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젠장.”
주양이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내렸다.
그 모습에,
후공이 가면 속에서 피식 웃었다.
‘주양, 내가 말해주마. 신검이 있다.’
쾌가 있다.
가공한 속도의 암살자라 불릴 만한 쾌가 옮겨지고 있다.
쾌는 지금 좋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