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43화 (243/460)

243화. 그 마음가짐은 틀렸다.

상관월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기막(氣膜)이라고?’

아니, 아니다.

단순히 기를 둘러친 수준이 아니다.

상관월은 떠오른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부정했다.

기막은 기의 장벽.

기막의 흔한 용도는 소리의 차단이다. 주변을 기로 둘러 소리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

월적하가 기막 따위를 뚫지 못할 리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펼쳐 보인 건 막(膜)의 수준이 아니다.

벽(壁).

지금 보고 있는 건 기의 장벽이라 할 만하다.

장벽의 두꺼움은 호신강기를 뛰어넘고, 유연함도 갖췄다. 그런 유연함의 묘체가 담겨 있어 뚫지 못했다.

마치 살아있는 듯 월적하를 붙들고 늘어졌고, 월적하를 회수할 때도 늪에서 빼내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떤 묘체요, 공능인가?

그 결과,

또 한 번의 실패.

자신의 의도는 번번이 가로막히고 있다.

정확히는 실패 이상.

놈이 지켜내려는 이들을 도륙해 마음을 흔들려 했는데, 도리어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

장로들의 비검도 상황이 좋지 않다.

두 줄기 자줏빛 광채에 의해 이미 둘이 조각났고, 하나는 빛을 잃고 추락한다. 남은 둘도 쫓기고 있는 형국.

‘무림맹주의 세 자루 신검을 모두 회수한 건가?’

그런데 나머지 하나도 왜 자줏빛인가?

원래 신검이 네 자루였나?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천화서고 대공자.

간극이 너무 크다.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천양지차.

이것이 천화서고 대공자의 본 모습인가.

상황은 급변 중.

아지랑이 같은 보호 장벽 안쪽의 인원들이 지하로 대피해가며 빠르게 숫자가 줄어간다. 농락을 위해 진품으로 선보인 천년자패는 어이없게도 놈들의 해독에 쓰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계획은 강제 변경.

언짢음에, 악의가 차오름에 상관월의 안광이 빛났다.

핏빛 광채가 폭주하듯 뿜어져나왔다.

놈을 죽이는 데 전력을 다한다.

*

대피는 빠르게 이루어져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 통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고, 무대 위에 남은 건 고작 열 명 남짓.

그들도 쉼 없이 움직이는 천공단에 의해 지하로 옮겨졌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건 은소소.

은소소는 열망했다.

가고 싶지 않아.

여기에 남고 싶어.

‘보고 싶어!’

강호 경험이 미미한 은소소다.

비검이 날고, 어검술이 난무하는 절세고수들의 격전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옛날 옛적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듣기만 했다.

한데 오늘 보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세와 엄청난 보호벽.

얼마나 가공할 내력이 소용돌이치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외할아버지도 절세고수라지만 외할아버지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어린 나날은 외할아버지의 목에 올라타 ‘저쪽으로’, ‘아니야, 이쪽으로’ 하면 껄껄 웃으며 달려가는 모습만 봤다.

당문의 무공을 전수받긴 했어도, 절세의 무학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오늘 본 광경은 충격 그 자체.

하지만…….

내내 이런 걸 보고 싶었어.

한 번의 격돌, 한 번의 공수에 담긴 악의와 인의.

“누님!”

당초가 손을 잡아끌었다.

“…….”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이곳에는 자신의 설 자리가 없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천년자패로 산공독을 날려버린다 해도 그저 걸리적거릴 뿐.

당초를 따라가며 은소소는 다시금 모든 걸 눈에 담았다.

반원의 형태로 둘러진 아지랑이.

아지랑이 너머 번져보이는 자줏빛 광채들.

흐릿함 속에서도 또렷해보이는 흑전주 상관월의 붉게 빛나는 안광. 기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악의는 선명히 느껴진다.

그리고…….

천화서고 대공자.

그의 뒷모습.

‘기억해야 해. 잊지 않아야 해.’

그렇게 다짐해보지만, 알고 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걱정은 되지 않는다.

그저 믿게 된다.

그가 무너지는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누님! 어서요!”

당초의 외침과 함께 은소소가 땅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마지막이었다.

최종확인과 통로를 메꾸며 후방을 책임지는 건 지귀객의 몫.

지귀객이 최종적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빠르게 훑었다. 빠뜨린 사람은 없다.

지상에 남은 항마삼협, 무산쌍웅, 낭인왕이 웃으며 손을 들어보이는 모습에 어떻게 된 일인지 지귀객은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다.

저들이 늘 패고 때려서만은 아니었다.

쑥스러워! 그래서 그저 옅게 고개만 끄덕였다.

천공단은 반으로 나뉜 터.

대피조와 격돌조.

지귀객은 지하로 내려가 자신이 파놓은 구멍들을 메꾸며 경화시켜 가며 빠르게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맨 뒤에서 홀로 통로를 무너뜨려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희열을 토해냈다.

“시발, 해냈어! 완벽해! 이거지!”

왜인가.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건가.

아니, 알고 있다.

이런 걸 처음 해본다.

내가 사람들을 구했다고! 나도 영웅이야! 협객이야!

맨날 도둑질만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난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보물을 훔칠 때도 짜릿했지만, 지금의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후공의 신검을 훔칠 때도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지만, 어떻게 된 게 지금은 그날의 밤보다 더했다.

나도 쓸모가 있었어!

내가 쓸모있는 놈이었을 줄이야!

목표를 정하고, 하나둘 세워지는 계획.

계획은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그게 그렇게 말같이 쉽게 될 리가 없는데…….

그런데 되었다.

천공단주의 실행력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고,

연습할 때는 손발도 안 맞고 궁시렁대기만 하던 천공단은, 실전에서는 누구보다 진심.

대체 천공단은 뭘 어떻게 겪어온 것인가.

하나같이 미친 새끼들인데 정이 간다.

이상한 일.

‘시발, 이런 식인가.’

이거 그거다.

중독이다.

이 맛에 들리면 빠져나갈 수 없다.

천공단에 들어가려고 낭인왕이 짖었다고 하더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천공단 하고 싶어.’

“시발, 이게 무슨 생각이지! 내가 미쳤나!”

생각과 말이 반대로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지귀객은 싱글벙글 지하 통로를 메꿔가며 이동했다.

다른 한편,

지하 통로 앞쪽은 연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소천개야, 너희 두목이자, 내 친구 말이다. 검이 후진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검이 엄청 많고 좋던데 어떻게 된 거냐?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 아닌가? 여기 오게 되어 너도 보게 되었으니 잘한 일인가?”

주양이 쉴새없이 재잘거렸다.

“형아.”

“응?”

“형아는 위기감이 없어?”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야?

겨우 목숨을 건졌잖아.

그렇게 따지듯 소천개가 책망했다.

하지만,

“위기감이 뭔데?”

“응?”

“넌 늘 조마조마한 모양이지?”

“…….”

“쯧쯧. 왜 그렇게 사니?”

말싸움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는 소천개도 주양의 태연한 말에는 말문이 콱 막혔다.

상대가 누구인지 잊고 있었다.

깨달았기에,

“미안.”

소천개는 바로 사과했다.

“야, 뭐가 갑자기 미안이야. 하하하하!”

“아무튼 내가 잘못했어. 얼른 가자.”

소천개의 후회는 빨랐다.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른 것이다.

절친을 청부살해하고 자신도 자결하려 했던 이.

목숨을 아주 초개같이 여기는 이.

그뿐인가.

멸살단과 천공단을 만든 이다.

자신이 청부한 주제에 청부를 안 멈춘다면 다 죽여야지, 라고 큰 소리친 사람이다.

놀랍게도 그게 또 그렇게 되었다.

천공단의 아버지.

아버지 앞에서 위기감을 논하다니.

“형아, 내가 크게 잘못했어.”

“하하하하하, 왜 자꾸 그래. 너 머리가 어떻게 됐구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건 형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천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천공단도 말이 안 통하긴 마찬가지지만…….

그건 아버지 탓이다.

그래, 이 형아는 그거다.

천공단의 아버지인 것이다.

**

네 줄기 자줏빛 광채는 격돌을 멈추고 돌아왔다.

되돌아가는 길에 스르르, 환명이 거두워졌고 그대로 주인을 향해 쏘아져 갔다.

검집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그저 주인의 의지에 따라 곁을 맴돌 뿐.

진정한 격전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번쾌친은 주인과 함께 죽음의 언덕을 수없이 넘나들었고, 매번 상대에게 죽음을 선사해왔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늘 같다.

언제나 최후라는 이름은 적의 몫.

까르르르르르르르르릉!

검성을 조각냈을 때처럼 이 밤도 상대를 분쇄한다.

그건 검령도 마찬가지. 언제든 질주할 태세로 우레소리를 내며 상대를 겁박했다.

기의 장벽이 걷히면서 흑전이 경매장 외곽으로 다가왔다.

나무 기둥 사이 사이를 지나 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상관월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이들은 열여덟.

이쪽은 항마삼협과 무산쌍웅, 낭인왕.

그리고 해독된 관허법사, 설응자, 일지노괴, 불평진인, 만박자.

서로는 말없이 그저 바라볼 뿐.

대화는 없었다.

대화는 의미없다.

서로간에 악의와 살의는 명백하다.

죽이는 자가 묻게 되고,

죽는 자는 답하게 된다.

그 전에 회한에 젖게 될 지도.

그렇게 누군가는 피를 울컥대며 인생의 주마등을 보게 된다.

늘 노래하던 불평진인도 지금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지금은 마음껏 화를 내도 된다.

화를 가라앉히려 노래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그때,

- 모두 무리할 것 없습니다.

대공자의 전음이 나직이 들려왔다.

격돌은 이제 시작.

대공자의 전음에 모두가 일제히 반응했다.

항마삼협의 양손에 햐얀 광채가 맺혀가고, 무산쌍웅이 비수를 발출할 태세를 갖췄다.

스릉!

낭인왕이 빼어든 도에 금빛 도강이 맺혀갔다.

뚱뚱한 일지노괴의 소매자락이 거센 바람을 맞은 듯 펄럭이고, 관허법사의 손에는 어느샌가 불진이 들렸다.

설응자의 품에서는 은빛으로 빛나는 륜이 빠져나와 떠올랐다. 불평진인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양손에 채워진 환에서 몽글몽글 다섯 개의 원형의 띠가 떠올랐다.

만박자는 그저 시큰둥.

하지만 그의 양손은 이미 달려졌다.

항마삼협과 비슷해 보였지만, 조금 달랐다. 하얀 광채가 머금고 있지만 너무 선명해 투명해 보일 정도.

살의는 명백하나,

흑전을 우습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흑전은 보물과 영약을 다루는 이들.

모든 영약을 경매에 내놓은 건 아닐 터.

그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영약의 도움을 받았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모두가 그렇게 태세를 갖추었기에.

후공이 신형을 날렸다.

방향은 상관월.

주인의 의지에 따라 검령과 번쾌친이 반응해 쏘아져갔다.

상관월도 이미 준비를 마친 터.

붉게 타오르는 안광으로 월적하를 운용했다. 한 쌍의 초승달이 짓쳐드는 네 줄기 자줏빛 광채를 맞이하고, 그의 곁에 선 좌호법의 비검이 쏘아졌다.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스아아아아앙!

두 개의 초승달과 비검들이 뒤엉키는 가운데 상관월의 양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났다.

구유마공(九幽魔功).

아홉 단계의 음유한 기운.

이미 상대를 인정하고 감탄했기에 상관월의 마음에 방심은 없다. 그저 전력을 다한다. 최고 수준인 마지막 단계를 처음부터 극상으로 끌어올렸다.

천화서고 대공자!

그의 공능을 이미 보았기에,

‘천하제일인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임한다!’

이는 누구를 상대하든 최고의 마음가짐.

강호에서 적을 맞이할 때 이런 마음을 품게 되면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틀렸다.

상대는 말 그대로 천하제일인.

현실은 단순히 마음가짐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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