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244화 (244/460)

244화. 기억해 봐. 그 노래.

상관월은 구유마공을 극한으로 끌어냈다.

그로 인해 그의 팔을 휘도는 검은 연기는 더욱 빠르게 회전했고, 짙어졌다.

그가 다뤄야 할 건 구유마공만은 아니다.

순식간에 구유마공을 십이성까지 끌어올리는 동시에 기운을 유도하며 월적하를 운용했다.

그런 탓에 의식은 분리되고, 기운도 나눠졌다.

직접 운용하여야 하므로 살펴야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점이 상관월에게 문제될 건 없었다.

월적하는 신물.

두 개의 초승달.

구백 년 전 절대자로 군림한 월하노인의 신병은 많은 내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그런 월적하가 떠오르면 그건 곧 죽음.

베지 못할 것이 없고, 뚫지 못할 것이 없다.

.

.

그렇게 알고 있었고,

거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이미 한 번의 실패를 보았다. 뚫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신병의 우위는?

없다.

월적하가 구백 년 전 천하제일인의 것이라지만, 상대의 신병도 같다. 현 시대의 천하제일인의 신검.

천화서고 대공자가 어떻게 후공의 신검을 운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의문은 미뤄두자. 그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월적하가 버텨주고 있으니 그것이면 충분.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면?

좋지 않다.

자줏빛 광채들이 포악한 우레소리를 내며 미쳐 날뛰고 있으니 오래 버텨내지는 못할 터.

그 전에 신검의 운용자를 끝내야 한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우우우우우우우웅!

휘도는 검은 안개는 음유함이 짙어졌고, 그 가운데 상관월은 일부를 파편화해 분리해냈다.

구유마공의 혼파(混波).

그리고 분(雰)의 결.

그에 따라 흑무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확산되고 퍼져 나가니, 순식간에 방원 십여 장에 잿빛 안개가 내려앉았다.

안개는 그저 흐릿함이 전부가 아니다.

시야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알알이 수천만 개의 미세한 구유의 알갱이들이 살아있는 듯 작용한다.

안개 속에 머물게 되는 자의 내력에 간섭.

어지럽히고, 흩트린다.

적은 머뭇거리게 되고 움직임은 둔화된다.

‘지금처럼!’

상관월이 눈을 빛냈다.

짓쳐드는 천화서고 대공자의 신형이 혼파의 안개 속에서 주춤한 순간, 흑무를 발출했다. 양팔을 두르며 회전하던 검은 안개가 두 마리 꿈틀대는 뱀처럼 뻗어 나갔다.

하지만,

‘흥미롭군.’

후공은 그저 재밌고 흥미로울 뿐.

마공은 늘 그렇다.

언제나 흥미롭고 재밌다.

태반이 요란하고 정신 사납다.

자신이 늙고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니다.

그저 마공의 속성 탓.

이지를 어지럽히고, 기운을 흩고, 난잡함 속에 거대한 힘. 괴력난신의 힘은 언제나 그렇게 요란함을 품고 있다.

멈칫한 것도 요란함 때문일 뿐.

잿빛 안개의 수천만 개의 알갱이들은 자령안에 이미 드러났고, 간섭은 의미 없다.

우수를 휘두르며 허운을 일으켰다.

허운은 반탄.

잿빛 안개의 간섭은 불허. 모두 튕겨내며 신형을 우측으로 틀었다.

두 줄기 검은 안개가 뱀의 움직임처럼 허공을 가르고 뒤쫓아왔다.

음유하고 강맹한 기운.

그 짓쳐 드는 속도가 잿빛 안개 속에서도 맹렬하기 이를 데 없는 건, 같은 기운인 탓이리라.

하지만 마공은 재밌다.

마공은 같잖다.

잿빛 안개의 분포는 방원 십여 장.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인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한 건가.

이미 몇 차례 보여주었는데도, 왜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보는 건가. 규격은 잊은 지 오래거늘 규격이 있는 자로 보는 것인가.

어리석음은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르는 법.

후공의 신형은 호법에게로 향했다.

잿빛 안개의 알맹이들, 도리어 그 간섭은 넓게 분포한 탓에 상관월을 보조하는 좌호법과 세 장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비검을 운용 중인 좌호법은 둔화된 탓에,

스아악!

피할 여력이 없었다.

후공의 수검(手劍)에 반응하지 못한 좌호법의 목이 날아갔다. 후공은 멈추지 않는다. 환명을 딛고 솟구쳐 방향을 선회하면서 두 장로의 몸을 갈랐다.

검은 쥐고 있지 않아도 언제나 있다.

팔이 있으니 그것이 곧 검.

호신강기를 두른 수검이 분절칠십이검식을 펼쳐내는 가운데, 마지막 장로에게 닿아갔다.

어깨에 닿아가며 사선으로 그어지려 할 때,

장로는 눈을 부릅뜨려 했지만, 그마저도 안개의 간섭에 더뎌진 탓에 다 뜨지 못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끝나기도 전,

후공에게 닥쳐온 건 두 줄기 흑무.

두 마리 검은 뱀처럼 짓쳐든 순간, 후공이 손을 내뻗었다.

한 마리의 뱀은 손으로 붙들었고, 다른 한 마리의 뱀은 서른 두 개 환명의 수렁에 잠겼다.

일 장(약 3미터) 남짓한 검은 안개가 손아귀에서 미칠 듯이 꿈틀거렸다. 후공은 뱀의 목을 틀어쥐듯 안개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찢고 구기고 우그러뜨렸다.

단순하고 우왁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실상 그 안에는 수많은 심결과 요체가 담겨 있다.

허운의 정과 역.

정으로 반탄하고, 허운을 역으로 돌려 끌어들이기도 하는가 하면, 손아귀에는 강기가 맺혀 운용되었다.

그렇게 우그러뜨리고 뭉쳐가니 구유의 검은 안개가 미칠 듯이 꼬리를 흔들며 꿈틀거렸다. 그 모습은 진정 살아있는 뱀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 와중 흑무의 마기가 흩어지며 후공의 숨결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소용없다. 삼악은 순결하면서 난폭하다. 혼탁한 기운, 해로운 기운이라면 미쳐 발작하는 삼악이 포악스럽게 일어나 마기를 집어삼켰다.

결국 그렇게 뭉쳐진 흑운은 어느샌가 뭉쳐진 검은 구슬의 형태로 변했다. 그 순간, 후공의 손에 떠오른 건 염화의 불꽃.

화르르르르르.

북해의 빙정도 녹이는 화극의 염화가 마기를 태워 소멸시켰다.

다른 한 마리의 뱀도 사정은 다를 것이 없었다.

환명에 둘러싸여 사방이 늪.

그저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후공은 그마저도 소멸시킨 후,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상관월이 주춤 물러났다.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쿨럭, 쿨럭……. 커허헉!”

이미 일격을 당해,

하얗게 질린 채 피를 울컥거렸다.

손이 닿은 건 아니다.

단순히 경악스러운 광경에 충격을 받아서도 아니었다.

구유마공의 혼파.

흑운이 붙들린 순간이 이미 서로의 격전은 시작된 터.

흑운의 몸부림은 상관월의 몸부림이었다.

벗어나려고 반격하려고 얼마나 많은 요체를 구사하고, 공력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흑운이 일그러진 건,

고스란히 상관월이 일그러진 것이었다.

더불어 상관월의 머리는 온통 의문들뿐.

어떻게 구유의 혼파를 붙잡을 수 있는가.

왜 마기가 통하지 않는가.

또 어찌하여 마기를 소멸시킬 수 있단 말인가.

“쿨럭, 쿨럭…….”

이대로 끝이라고?

그런 것 같다.

월적하는 빛을 잃어간다.

겨우 날고 있을 뿐.

부러지거나 잘려나간 건 아니나, 이미 만신창이.

그리고…….

두 장로와 십이각주들도 하나둘 최후를 맞고 있었다.

천공단과 가문의 초대로 동행한 이들의 무위에 남은 건 고작 넷. 남은 넷도 시간 문제,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안돼…….’

여기서 끝낼 순 없다.

상관월은 품에서 환약을 꺼내 삼켰다.

옥령환.

내상을 빠르게 회복시키고, 진기를 안정시킨다.

두 시진(약 4시간).

그래, 두 시진이면 충분하다.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먹먹한 느낌과 함께 흩어진 진기가 모여들기에, 그대로 신형을 뒤로 날렸다.

그로 인해 진기의 유도가 사라졌기에,

월적하. 한 쌍의 초승달은 스르르 빛을 잃고 추락했다.

카르르르르릉!

크아아아아아아앙!

그런 월적하를 조롱하듯 번과 쾌가 추락하는 월적하 주위를 휘돌다 이내 주인을 향해 날았다.

주인은 이미 신형을 날리는 중.

밤의 어둠을 뚫고 추격하는 길에 먼저 곁에 이른 검령과 친이 스치듯 지나쳐 적에게 쏘아져 갔다.

미칠 듯이 질주하던 상관월이 연신 뒤돌아봤다.

두 마리 용이 쫓아오듯 자줏빛 광채가 괴성을 발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앙!

카르르르릉!

개새끼들.

이대로 죽을 수 없어.

힘이 더 필요해.

이를 악물고 잠력을 격발했다.

조금은 무리해도 괜찮다.

옥령환의 약효는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그리고,

‘나의 천재 송아지~~.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너는 내 생애 최고의 보물.’

힘을 내기 위해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최근 떠오른 노래.

누구의 노래인지는 모른다.

어디서 들은 노래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송아지……. 나의 보물 송아지…….’

잔잔한 음률.

다정한 누군가의 목소리.

이 노래가 좋다.

이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나의 천재 송아지……. 너는 내 생애 최고의 보물…….’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한편 우습기도 하다.

누군가?

누가 부른 노래인가?

알게 뭔가.

원망의 마음이 솟구친다.

잘난 놈들.

잘난 척하는 놈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따뜻한 눈길을 받고 자란 놈들.

난 아니었다.

너희도 나 같았으면.

너희도 나처럼 어린 날을 길바닥에서 굴렀다면 과연 그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알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다리를 자르고, 팔을 잘라 길바닥에서 굴려보고 싶었다.

너희도 나와 같아져 봐라.

그럼 인정해 주마.

그런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놈이 있다면,

인정하고 그놈 앞에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흐흐흐흐…….’

하지만 그걸 해낼 놈이 있을 리가.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그렇다 해도, 뻔해도, 꼭 보고 싶었는데…….

개새끼.

천화서고 대공자.

놈이 다 틀어버렸다.

개새끼, 개새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친이 날아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급히 회피했지만 상관월의 왼팔이 속절없이 떨어져나갔다.

이어진 건 검령.

휘청이는 상관월의 두 다리를 쓸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상관월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가, 나아가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다 멈춘 건 어느덧 산의 중턱.

두 다리와 왼팔을 잃은 상관월이 대자로 널브러졌다.

대자의 빈 곳은 흐르는 피가 대신해 글씨를 완성했다.

회복되어 가던 기운은 다시금 빠르게 흩어져 간다.

흐흐, 그럼 어떤가.

“흐흐흐흐…….”

상관월은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밤.

쏟아져내릴 듯 수많은 별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흐흐, 어릴 땐…… 저 별이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별이 반짝이며 묻는 것 같았기에,

“흐흐, 지금도…… 싫어.”

상관월이 웃으며 답했다.

별은 고요할 뿐.

상관월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피는 흐른다. 막대한 출혈에 정신이 조금씩 아득해져 갔다. 눈이 가물거리고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다.

애써 숨을 크게 쉬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숨을 크게 쉬었을 때,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에 힘을 주고, 깜박이는 것으로 눈물을 떨궈냈다.

그리고 별에게 물었다.

“그 노래…… 누구의 노래지?”

별들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별이 일제히 말했다.

넌 알고 있잖아. 이미 알고 있잖아.

잘 생각해봐.

“내가…… 내가…… 알고 있다고?”

별들이 미쳤나 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상관월은 알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겠지.

그럴 것이다.

“난…… 기억이 나지 않아. 난 길바닥에…… 버려졌는걸.”

생각해봐.

별들이 채근했다.

그래서 상관월은 다시 노래를 불러보았다.

“나의…… 천재 송아지……. 너는…… 내 생애…….”

노래는 거기에서 멈췄다.

주르륵.

다시 눈물이 흘러나와서는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워 입만 뻐끔거려서도 아니었다.

그저 눈물이 흘러나왔다.

생각났다. 떠올랐다.

영원히 생각나지 않을 것 같던 기억.

세 살 이전의 기억.

‘내 생애 최고의 보물…….’

엄마의 얼굴.

내려다보는 미소.

미소와 함께 흘러나온 노래.

엄마였구나.

엄마의 품이었다.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엄마에게 나는……

최고의 보물이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건…….

하늘에서.

눈동자에 별을 담은 채 세상을 떠난 상관월의 곁.

천하제일인의 눈에는 상관월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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