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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245화 (245/460)

245화. 거대한 슬픔이 옅어지길.

흑전주 상관월의 최후.

그 마지막 모습은 어느샌가 도착한 천공단과 만박자 등의 눈에도 들어왔다.

“클클클, 시발 새끼.”

“혓바닥 긴 거 봐.”

“웃겨 죽는구만.”

천공단이 조롱하고, 만박자 등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지금 보이는 광경은 그런 류의 무덤 하나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뿐이다.

그리고 뿌린 대로 거뒀다.

말이 씨가 되었고, 열매를 맺었다.

흑전주는 하나의 팔과 두 다리를 잃고, 말한 대로 최후를 맞았다.

무덤은 없다.

흑전주는 불타는 중.

대공자가 소맷자락을 떨쳐낸 순간, 불꽃이 주검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화장이 아니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

그런 편의를 봐 줄 천공단주가 아니다.

천공단주는 마기의 잔재를 소멸시키고 있을 뿐.

하지만 모르는 것도 있다.

어떤 불꽃인가?

어떻게 발현하는 건가?

화극의 염화에 대해서는 기이함을 느꼈다.

그리고 또다른 의문.

대공자의 경지는 어디에 닿아있는가.

흑전주의 어검술, 그 위력을 보았기에 흑전주가 화경의 극에 이르렀다 짐작되거늘, 대공자는 상대의 공세를 그저 종잇장 구기듯 구겨버린 것이다.

그럼 생각하게 된다.

‘현경이라고?’

화경에 도달하기도 어렵기만, 화겸을 넘어 현경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아득하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까지.

대공자가 돌아섰기에 그 무심한 표정을 일견한 순간, 모두 감사의 예를 표했다.

“대공자, 고맙네.”

“천공단주! 이 은혜 잊지 않겠네.”

“덕분에 다시 태어났네. 언제든 힘이 필요하면 불러주게. 어디든 달려감세.”

일지노괴, 설응자, 불평진인 등이 앞다투고, 마지막을 장식한 건 만박자.

“대공자, 앞으로 내가 형님으로 모셔도 되겠나?”

인연이 있는지라 만박자는 싱글벙글.

하지만,

“그리하십시오.”

“어?”

만박자는 삽시간에 표정을 잃었다.

농담인데 이걸 받아버린다고?

아무리 그래도 형님은…….

“대, 대공자…… 저기…… 농담이었네만.”

“저는 진심입니다만.”

하지만 대공자가 미소를 짓고 있으니 알 수 있다.

“하하하하, 놀랐잖나!”

만박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짐짓 가슴을 쓸어버렸다.

무산쌍웅과 항마삼협도 따라 웃었다.

만박자의 당황하는 모습에 금적선생이 겹쳐 떠오른 탓이었다.

무극살부의 수면독에서 목숨을 건진 날.

자신은 나이가 많아서 형님으로 부르는 건 좀 그렇다면서 쭈뼜대던 금적 선생과 오늘의 만박자가 똑 닮은 것이다.

우린 다행이다.

형님이라 부를 수 있어서.

무산쌍웅과 항마삼협, 낭인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

목양산 초입.

대피는 끝났다.

천공단이 지하를 뚫고 들어간 지점이었고, 예정된 약속 장소이기도 했다.

모두가 지하에서 나왔을 때는 해독이 완료된 상태.

지하 통로를 이동 중에 천년자패를 옮겨가며 누구 할 것 없이 신선폐에서 벗어났다.

여전히 사방이 어둠에 잠긴 밤.

모두가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말해야 한다.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한 사람을 기다렸다.

오래 걸리겠지.

오래 걸리더라도 아무 일 없었으면…….

부디 무사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이대로 아침이 오고, 정오가 된다 해도 기다릴 수 있었다. 감사의 말을 할 수 있길, 고마움을 표해야 할 이가 무사히 돌아오길 소망했다.

차분한 건 천공단,

걱정하기엔 보고 겪은 바가 너무 많다.

- 사형, 안 그래도 돈 걱정 없었는데, 이젠 아주 끝나버렸네.

- 그러게. 거지 팔자가 상팔자가 되었네. 우린 이제 부자인데 길바닥에서 자는 거지가 된 거야. 이거 뭔가 멋지다.

은앙개가 장단을 맞췄다.

무극살부 부주의 보물을 쓸어온 것도 언제 다 쓸 수 있을지 모르는 판에, 이번 일로 중원의 대부호들의 은인이 되었으니 앞으로 행복한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엄마가 좋아하겠다.

- 너 엄마 없잖아.

- 욕이야?

- 나도 없잖아.

- 헤헤, 그렇지.

- 근데 보고 싶긴 하다.

- 나도.

거지들이 전음을 나눌 때 은소소와 당초가 다가왔다.

“부탁할 게 있어.”

“응, 뭐든.”

“주양 공자를 소개시켜줘.”

“왜?”

은앙개가 미간을 찡그렸다.

은소소는 어깨를 으쓱.

“천공단을 만든 사람이니까. 궁금해서.”

“그냥 넣어둬. 주 형하곤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게 좋아.”

“왜?”

“우릴 보고도 몰라? 천공단의 아버지야. 아버지는 더 미쳤어.”

“…….”

은소소가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천공단이 제정신이 아닌 건 그녀도 이제 아는 바. 그런 천공단이 미쳤다고 할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은앙개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

은소소의 시선이 따라갔다.

그러다 갸웃했다.

가리키는 곳엔 한 청년이 우두커니 바위에 걸터앉아 있을 뿐인 것이다. 딴짓 없이 그저 달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운치가 있으면 있었지,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멀쩡한데?”

“그게 문제라는 거야.”

“왜?”

멀쩡한 것이 왜 문제인가?

그렇게 의아해할 때 들려왔다.

“두목을 살인청부했거든.”

“으응?”

은소소의 눈이 커졌다.

덩달아 놀란 당초가 목을 움츠리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형님, 근데 왜 저 사람 아직 살아 있는 건가요?”

“청부를 두목이 요청한 거라.”

“네에에??”

“그런 게 있어. 여기까지. 젠장,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어질거리네.”

은앙개가 손사래를 쳤다.

이야기의 시작점도 시작점인데, 말하다 보면 소요파까지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흐흐, 물론 소요파 때는 즐거웠지만……. 어쨌든 이야기가 길어.’

그때, 도착했다.

밤하늘을 가르며 대공자를 비롯 신형들이 내려서자, 누군가 환호성을 터뜨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환호성이 커졌다.

무사귀환.

그리고 귀환이 빨랐다.

다친 곳은 없다.

잃은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오십여 가문들과 그의 동행인들은 마음을 놓았고, 둥그렇게 모여들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앞으로’, 혹은 ‘오늘로부터’라는 말로 시작된 은혜에 보답하겠노라는 말들도 이어져갔다.

후공은 일일이 답하기도 지칠 지경.

겨우 끝내고 작별을 고했다.

경매에 나온 보물에 관해 말하는 이는 없었다.

꺼낼 사안도 아니고, 염치도 있다.

물에서 건져주었는데,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하는지는 명확.

그렇게 훗날을 기약하며 분분히 떠나갔다.

만박자와 불평진인과 함께 떠나는 주양의 뒷통수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잘 가요!”

“아버지, 또 봐!”

“아버님!”

돌아보니 거지들과 한 미녀가 열렬히 손을 흔들고 있었기에 주양이 미간을 찡그렸다.

“선생, 진인. 천공단이 왜 저러는지 아십니까? 자꾸 저보고 아버지라고 합니다. 저거 괜찮은 건가요? 돌아버린 것 같아 걱정입니다.”

만박자와 불평진인이 그런 주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가 누굴 보고 괜찮냐고 묻는 건가.

“가세.”

“랄라라, 랄라라라라라~~~~.”

“아니, 제 말이 틀렸습니까?”

***

“하아…… 하아…… 하아…….”

기다림이 지옥이다.

어떤 기다림은 행복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노인에겐 아니었다.

쇠사슬에 매어진 노인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이미 들었기에 한 번씩 몸부림치고, 한 번씩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파골을 관통한 쇠사슬이 움직일 때마다 고통으로 다가왔지만 기다림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철렁, 철렁, 철렁.

쇠사슬이 신경을 자극하며 통증이 말로 할 수 없었지만 노인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노인, 흑전주는 그저 후회와 번민 속에 있을 뿐.

그날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길을 지나치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면.

수많은 만약들.

하지만 만약은 오지 않는다.

오고 있는 건 절망.

그리고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들.

울부짖음과 비통함이 딸려올 뿐이다.

그렇게 서역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곳에서 비루한 나날을 보내게 한다고 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야 한다.

모두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시간이 왜 이리 더딘가.

저 문은 언제 열리는 건가.

흑전주의 시선은 석실의 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저 문이 열리면 제자의 웃는 얼굴을 보게 된다.

그래서 염원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저 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길…….

하지만,

이내 들려온 건 발자국 소리.

“……?”

흑전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망이 무색하게도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기에, 흑전주는 이내 절망에 사로잡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결국…… 저질렀구나.’

그그그그그그긍.

석문이 열려간다.

이제 곧.

제자의 웃는 얼굴.

그 잔악한 얼굴을 보게 된다.

하지만,

“……?”

흑전주의 눈이 커졌다.

왜?

어떻게 된 일인가?

제자가 아니었다.

한 명도 아니다. 또 모두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아니 시발, 사람을 이렇게 매달아놓으면 어떡해!”

“아주 개놈의 새끼네!”

“와아, 뭐지? 사슬이 몸을 뚫고 지나갔는데?”

“개소리 작작하고 빨리 빨리 풀기나 해!”

어린 거지도 있고, 청년 검수도 있고, 험악한 외모의 중년인들까지. 두리번거리는 것도 잠시, 이내 다가와 쇠사슬을 풀어갔다.

“다, 당신들…… 누, 누구요?”

“우리가 누구인지 궁금한 건가요?”

“……?”

“우리가 누구냐면! 우.리.는!”

소천개가 자세를 취하려고 했기에,

“거기까지 해. 안 그러면 죽여버릴 거야!”

“흐흐흐.”

무산쌍웅의 호통에 소천개가 배시시 웃었다.

**

그렇게 사흘.

흑전주는 천공단의 비호 아래 몸을 회복해갔다.

공청석유를 지키는 영물이었던 금섬이 외상치료를 도왔고, 경매품으로 나온 영약 중 구엽구화초가 회복에 쓰였다.

영약 중에 영약이라는 공청석유를 흡수한 천공단에게 구엽구화초는 효과가 미미한 영약이었기에 의미가 없기도 했지만, 애초에 경매에 나온 보물은 본래 흑전주의 것.

스승에게 제자는 아들과 같기에, 천공단은 슬픔을 위로하는 데 전념했다.

물론 위로하는 방식은 깔깔깔.

흑전주로서는 처음 겪는 유쾌함이어서 사흘 내내 잠시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와중 모든 사정을 듣게 되었다.

형의 죽음을 들으며 눈물 지었고,

경매장에서 벌어진 일에는 분노하고 경탄했다.

그리고 천화서고 대공자.

강호의 소식을 통해 명성을 듣긴 했지만, 직접 자신이 마주하고 겪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공자, 고맙네.”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찻잔이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말이 오갔다.

흑전주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줄 것이라곤 감사의 마음뿐이네. 그 끔찍한 결과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남은 평생을 고마워해도 부족할 것이네.”

“다시 재건하십시오.”

“흑전을 말인가?”

“십 년 뒤 흑전의 초대를 받고 싶습니다. 천화서고가 대부호가 아니라서 초대 받지 못할까봐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하하하하!”

흑전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의 의미를 모르겠는가.

무언가에 몰두하길,

그래서 슬픔을 잊으라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유쾌하게 전하고 있으니, 그저 고맙고 놀라울 따름.

“왜 묻지 않나?”

“제가 뭔가를 궁금해해야 하나 보군요.”

“흑전이 보물을 찾는 방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하하, 이거 괜히 먼저 말했군.”

진중할 겨를도 없이 흑전주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여유를 주고, 여유를 풍긴다.

흑전주는 대공자를 마주하고 있음이 마치 강호의 원로 고수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호의도 기쁘게 받을 것이다.

“대공자, 경매에 나온 보물은 모두 자네의 것이네. 부디 사양하지 말아 주게.”

“뭐……, 정 원하신다면.”

“하하하하!”

흑전주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슬픔은 거대했지만, 웃음과 함께 조금은 옅어졌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옅어지길.

후공은 마음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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